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2_한국역사

[스크랩] 할머니, 공부가 재미있어요?(4) -제2장4~6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5. 5.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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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벽돌공장에서의 새로운 출발

          

   남편은 몸이 조금 나아지자 양조장 사장이 함께 운영하던 흙벽돌공장에 서기로 취직하였습니다. 동네에서 외따로 떨어진 방 3개 있는 사택의 한 방에 들어가 살면서 여기서도 개칠개 등을 계속 만들었습니다. 남편은 사장이 시켜서 양조장에 갔다가 며칠이고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옆방에 사는 아저씨가 “김서기,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까”하고 물으면 “아니요. 양조장이 많이 바쁜 모양이에요. 밤늦게 들어왔다가 새벽이면 양조장에 또 나가요”하고 거짓말을 하고, 늦은 밤까지 남편이 들어오지 않으면 남편 신발을 뜰 앞에 내놓고 방문을 안으로 잠그고 쇠망치를 머리맡에 놓고서야 잠들 수가 있었습니다.

  저녁에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벽돌공장안에 들어가서 구워진 벽돌을 14장씩 지고 나와 종고를 쌓아 두곤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점차 흙벽돌을 쓰지 않으면서 벽돌공장도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살면서 큰 딸 옥희를 낳았습니다. 벽돌공장에서 먹고 사는 법도 배우고, 남편 병도 완전히 고치고 첫 아이를 보았으니 지금도 벽돌공장 시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5. 큰 딸이 세상을 떠나다


   우리 가족은 시댁 식구들과 친정 어머님이 살던 구읍 수산리 김인수씨 집(돼지장사)에 월세로 이사가서 한 1년을 살다가 친정에 들어갔습니다.


    남편 병을 치료하느라 빚도 많이 지고 있고, 논밭도 없어서 하루 하루 품팔이를 하여 쌀이 없는 보리밥이라도 먹게 되면 감사했습니다. 냉수만 마시며 굶는 한이 있어도 누구한테 도와달라고 말해본 적도 없지만 부탁할 사람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이발소를 하는 친구(딸 이름이 박명숙)가 우리 밥상을 보고는 아이를 업은 보태기(보자기) 속에 남편에게 들킬 새라 쌀을 조금씩 숨겨 가져다 주었습니다. 저는 이 글을 쓰면서도 동기간처럼 잘 해준 명숙이 엄마 생각에 눈물이 납니다.

   한 번은 식량이 다 떨어졌는데, 남편이 죽을 끓여달라고 해서 마침 친정 어머니가 돼지 먹이려고 사온 밀대가 낀 껍질을 끓여주었더니, 남편은 3일간을 설사를 하고 복통을 앓았습니다. 언니가 그 꼴을 보더니, 보리쌀을 1학(큰 되로 20되)이나 주었고, 그 후 굶는 일은 없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도 시아버지는 매일 와서 쌀을 달라 돈을 달라 졸랐습니다. 하루는 이모 집에서 5일간 일하기로 하고 좁쌀 5되를 가져 왔는데, 시아버지가 집에 와서 “내가 아침에 밥을 먹었으면 성이 박(밥)씨다”고 소리를 질러서 “그럼 시동생을 보내세요”하였습니다. 시동생들에게 자루에 좁쌀을 담아주고 있는데, 친정에 같이 세들어 살던 요진이 색씨가 “야, 너희들 아침 밥 먹었냐”고 물으니, 시동생들이 “예”하고 대답하자, 저에게 “이 병신아, 왜 다 줘”하더니 “너희 형수는 어제 저녁밥도 못먹었다”며 자루를 뺐었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지 밑에서 사는 시동생들이 불쌍해서 “크는 얘들은 먹게 해야 한다”며 자루를 내주었습니다.
 

   큰 딸 옥희는 태어날 때부터 남들보다 크고, 조숙하여 얘 어른 같았습니다. 남편은 작은 벌이마저 아버지에게 다 주고 장성에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월급을 준 적이 없습니다. 다섯이나 되는 다른 자식을 다 놔두고, 꼭 병들고 빚많고 굶주리는 셋째 아들네서만 얻어가는 시아버지가 원망스럽지 않았다면 거짓말입니다.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 식구가 당장 굶을 판이라서, 옥희의 허리를 띠로 묶고 띠의 한 끝을 앞다지(장롱) 고리에 묶어두고 일을 다녔습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우리 집에 갔다가 옥희가 띠가 목에 걸려 죽기 직전이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그 때부터는 밖에서 문을 걸고 일을 다녔습니다. 옥희는 엄마가 밖에 나가 문 잠그는 ‘똑’ 소리를 들으면 ‘이제 나가는구나’ 싶어서인지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아 몰래 숨어서 울음 소리가 그치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일하러 갔습니다.  


   큰 아들 동섭이를 낳고나서, 품팔이로 빚을 갚기는커녕 먹고 살기도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 낳고 3개월만에 아이들을 친정 어머니에게 맡기고 내복, 양은 그릇을 머리에 이고 나가 팔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고생하는 새댁이 불쌍해서인지 값이 쌀 5되라고 하면 쌀 5되 반을 주는 등 너무 잘해 주었습니다. 나중에 미안한 마음에 동네 사람들에게 팔지 않고 멀리 다니며 팔았지만 동네 사람들이 물건을 사러 집에까지 찾아오곤 하였으니 사람 복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갓난얘에게 먹일 젖이 없어서 쌀을 갈아서 설탕이나 당원을 타서 먹이는 고생을 하셨습니다.

   옥희는 새침때기라서 다른 얘들하고 노는 것도 말하는 것도 싫어하였지만 동생은 잘 봐주었습니다. 옥희가 세살 때부터 배가 불러와서 뱃속에 자래든 줄 알고 침과 뜸으로 1년 넘어 치료를 하였지만 낫지 않아 다섯 살에 광주 제중병원에 가보니 신장암이라면서 콩팥이 2개이니 하나를 떼어 내도 괜찮다고 하여 수술을 받았습니다. 옥희를 가두어 키우다보니 스트레스로 암이 걸린 것 같았습니다.

   퇴원하고 3개월만에 암이 재발하여 다시 옥희를 업고 병원에 가서 500원짜리 진찰권을 끊었다가 ‘콩팥이 하나 밖에 없는데 마저 떼어내면 어떡하나’하는 생각에 진찰도 받지 않고 되돌아와 버렸습니다. 저는 그 때에 전남 잠업시험장에서 뽕나무 접목 기술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기술자가 뽕나무를 째서 눈을 넣어주면 보조가  잘 붙게 짬매고(묶어주고), 다른 보조가 다시 25개씩 묶어주는데, 봄철 접목하는 때가 되면 몹시 바쁘고 기술자가 없으면 보조 2명도 놀아야 합니다.    


   제중병원에서 돌아온지 3일만에 접목을 하러 나갔다가 점심 먹으러 집에 오면서 반달 떡을 두 개 살 돈도 없어서 한 개만 사왔습니다. 집에 들어가 옥희를 보니 턱 한 쪽이 축 늘어져 있어서, 떡을 주면서 “아이고 우리 딸 죽겠네” 했더니 눈물만 주르르 흘렸습니다. 딸의 불쌍한 몰골을 보고도 접목이 바쁜 때라서 차마 떨어지지 않는 걸음으로 오후에 일하러 나갔습니다. 옥희는 달떡을 동생과 나누어 먹고 외할머니에게 목욕을 시켜 달라고 하고, 평소 동네 얘들하고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 않았는데, 마당에 놀던 동네 친구들을 불러 달라고 하여 방에서 외할머니와 동생과 동네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남편이 옥희를 담요에 싸서 묻고 담요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착한 딸이 어미를 잘못 만나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 너무 슬프고 미안해서 그 담요를 보관하면서 아이들한테는 그 담요가 무엇인지 말도 안하고 가끔 담요를 보면서 옥희 생각을 했는데, 작년에 달라는 사람에게 줘버렸습니다. 옥희가 항상 제 부모와 동생들을 지켜 주었는지 그 후로 우리 집에서는 모든 일이 잘 풀려 나갔습니다.

    

    6. 농사를 시작하다


   2년간 장사를 하여 돈이 좀 모여서 무논 3마지기를 샀습니다. 무논은 보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일모작 논을 말합니다. 첫 해에는 그전 논 주인처럼 벼 7섬(14가마)을 수확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음 해 장마에 거름 흙이 논에 들어와서 벼가 다 떠내려가고 조금 남은 것도 벼 끝만 보여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었습니다. ‘올해 벼농사는 틀렸구나’하고 밭으로 가다가 어떤 두엄간에 뿌리에 싹이 나고 누렇게 뜬 반쯤 썩은 모를 보았습니다. 주인을 찾아 가서 “저 모를 주세요”하니, “어차피 버린 것이니 가져가라”고 하였습니다. 썩은 모라도 혹시 다른 사람이 가져갈까봐 그 때까지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던 지게까지 빌려서 모를 집으로 나르고, 남편을 불러 모두 다섯 지게의 모를 논으로 날랐습니다.

   모를 심을 때, 보통은 4, 5폭(포기)을 심는데, 모가 부족하여 1, 2폭씩만 심었습니다. 그런데, 그 해 가을에 벼를 11섬이나 수확하여 남편은 농업박사란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언니네 밭 600평을 소작하여 고추를 심었는데, 보통 한 고랑에 5줄씩 심는데 남편은 3줄만 심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니, 통풍이 잘되어 썩지도 않고 좋은 품질의 고추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남편은 몸은 약하여 농사를 지어본 적이 거의 없고 회사에서 서기만 하였지만 머리가 좋아 어떻게 농사를 지으면 잘 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새끼틀(새끼짜는 기계)를 집에 들여놓고 겨울철이 아니라도 짬만 나면 새끼를 꼬았습니다.   

  아이만 두고 일하러 다니고 밤에는 남편과 교대로 밤이 새도록 새끼를 꼬아 남당 마을로 이사갈 무렵에는 빚을 다 갚게 되었습니다. 남에게 빌린 돈을 한자리씩 갚아 빚이 줄어드는 것을 계산할 때가 세상에 태어나서 제일로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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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원아, 정식으로 출판하기는 어렵다.

 지금 글도 뼈대만 있고, 서술이 부족하거든

 희연이가 새로 성원에 참석하였으니, 그 성원에 힘입어 조금 더 올려본다

출처 : 복사2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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