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남댕이로 이사를 가다
어머니, 남동생과 함께 친정에 살면서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남동생이 결혼하게 되자, 고생했던 시댁 시절이 생각나서 남동생 부부에게 방을 쓰라고 하고 친정을 나와 벼 6섬 반(13가마)을 빚내어 7섬을 주고 남당 마을(남댕이라고 합니다)에 있는 방 2개 있는 작은 초가집을 사서 이사를 갔습니다. 작은 방에는 새끼틀을 놓아서 방이 1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집에는 우물도 텃밭도 없고 달랑 건물만 있는데, 옆집에서 고맙게도 담장을 터주어 그 우물을 같이 쓸 수가 있었습니다.
여기서, 둘째 아들 의섭이를 낳았습니다. 다른 얘들은 전부 겨울에 낳았는데, 의섭이만 한 여름에 낳았습니다. 농사일로 한창 바쁜 때라서 아이 낳고 3일만에 일을 나가야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다른 얘들 생일은 모르고 지나갈 때도 있지만 의섭이가 장가가고 10년이 다 되었지만 지금도 의섭이 생일 때만 되면 한 3일은 꼼짝 못하고 들어 누워 ‘둘째 생일이구나’ 하고 알게 됩니다.
둘째가 갓난아기 때는 방에 두고, 큰 얘는 대문 밖에 나가지 말고 동생 잘 보라고 하고 일을 다녔습니다. 어느 날 동네 처녀가 큰 얘가 학교에 가는 형한테 “부집아, 학교가면 얘기 안보냐”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여 제가 잘못했다 싶어서 그냥 밖에 나가 놀라고 했습니다. 의섭이는 기어 다니게 되자 방문을 다 찢어버려서 밤에 모기가 들어와서 옥희처럼 방에 가둘 수가 없었습니다. 남편은 일하러 가면서 의섭이를 지게에 지고 가서 논밭에 내려놓고 일을 했습니다.
의섭이는 입이 까다로운 형, 누나와 달리 어려서부터 아무거나 잘 먹고 살이 통통해서 ‘먹새과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옥희와 동섭이는 젖꼭지에 종이만 붙여서 쉽게 젖을 떼었는데, 의섭이는 쓴 약을 발라도 빨아서 ‘퉤 퉤’하고 뱉어내고 젖을 빨았습니다. 둘째가 태어나고부터 우리 식구는 한 끼도 굶어본 적도 없고, 꽁보리밥만 먹은 적도 없으니 그것도 제 복인 모양입니다. 그래도, 엄마가 먹는 것이 워낙 부실하여 젖이 잘 나오지 않자 젖에 박치기를 하면서 울어대곤 했습니다.
먹고 살기도 바쁘고 학교 가기 전에 너무 많이 알면 공부에 흥미를 잃을까봐 얘들에게는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이름 석자만 가르쳐 주고, 숫자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들에서 돌아오는데, 동네 사람들이 삥 둘러서서 뭘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뭔가하고 기웃하니 다섯 살짜리 큰 얘가 그 한 가운데에서 1부터 1000까지 세고 있었습니다. 교회 주일학교에 다니며 배운 모양인데, 시골 사람들은 구경거리가 없어서 아이가 1000까지 세는 것도 신기했던 모양입니다.
8. 남댕이 할머니 집으로 들어가다
집 앞에는 시댁 집안 어른인 할머니(김창호씨 댁)가 홀로 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아들이 서울역장(김용중)을 하고, 손자들도 전북대 의대 교수(김공수), 약사들을 하여 동네에서 존경을 받는 어르신입니다.
둘째 아들을 낳자 할머니는 몸조리하라고 쌀을 2되나 갖다 주셨습니다. 고마운 마음에 산에 심었던 수박을 수확하여 할머니에게 가져다 드리자, 할머니는 쌀을 대승(큰 됫박) 2되나 주셨습니다. 그 수박은 읍내 시장에 이고 가서 팔면 소승(작은 됫박) 1되나 받을 정도였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다음에는 일부러 시장에 팔기 어려운 작은 수박을 몇 개 골라서 갖다 드리자, 그래도 쌀 2되를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수박을 갖다 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비가 올듯하여 비설거지를 하러 할머니 집에 갔더니, 인부들이 비오기 전에 고추를 따려고 서둘러 밭으로 나가고 있었습니다. 인부들을 뒤따라서 밭일을 하고 돌아오니 할머니는 우리 얘들 둘을 데려다가 깨끗이 씻기고 저녁까지 먹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수고 했다”면서 쌀 대승 2되를 주었습니다. 제가 “할머님, 하루 품삯이 남자는 대승 1되, 여자는 소승 1되인데, 잠깐 밭일을 봐준 것 뿐입니다”고 항의하니, 할머니는 웃으며 “니가 따온 고추가 제일로 좋다. 너는 1시간을 일하나 하루 종일 일하나 무조건 대승 2되이니 그렇게 알아라”고 하였습니다. (동섭이 말이 비슷한 내용이 성서에 나와 있다고 합니다)
할머니는 객지로 떠난 자녀들 대신에 저를 손녀딸처럼 귀여워하여 친정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정말 오랜만에 어른의 따듯한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저녁마다 일찍 식사를 치우고 나서 할머니 댁에 가서 고추 꼬뚜리 정리, 이불 호창 꿰메기, 청소 등등 집안일을 닥치는대로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밭일이 있을 때면 항상 불러서 일을 시키고 꼭 쌀 대승 2되를 주었습니다.
할머니 연세가 8순이 지나 거동이 어려워 광주 아들네 집으로 이사를 간다며 집을 벼 30석에 내놓았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어느날 “애비가 3년만 있으면 이 집을 살 수 있다고 하더라”면서 넌지시 집을 사라고 권하였습니다. 제가 “애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겁니다. 지금 집도 7섬에 샀는데, 우리 것은 1가마이고 다 빚인데, 3년만에 30석을 어떻게 벌어요” 하니, 할머니는 “애비가 한 번 산다고 했으면 3년이 아니라 30년이 걸려서라도 틀림없이 살 것이다”면서 집값도 받지 않고 방2개, 광1개, 앞에 화단도 있고 뒤에 텃밭도 있는 그 동네에서 손꼽히는 좋은 집을 우리 부부에게 내주고 광주로 이사를 갔습니다. 이 집에서 외딸 선희와 막내 아들 정섭이가 태어났습니다.
선희가 태어나자 시집와서 처음으로 호강하였습니다. 친정 어머니가 산후조리를 해주시면서 7 x 7 = 49일 동안 산모를 꼼짝도 못하게 하고 1주일마다 한 번씩 떡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어머니 힘들까봐 떡을 못하게 하니까 어머니는 몰래 떡을 하느라 학독(보리쌀을 물에 불려 가는데 쓰이는 돌로 만든 조리도구)에 찹쌀을 갈아서 채로 쳐서 떡을 했습니다. “엄니, 제발 그러지 마쇼”하고 말려도, 어머니는 “그런 말 마라. 딸은 친정에서 잘해 줘야 시집가서도 대접받는다. 니가 딸 때문에 몸이 편해야 너도 딸을 위하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남편이 세상을 뜨고 객지로 광주리 장사를 다니며 오랫동안 고생을 하여서 잘난 딸자식이 이제 밥굶지 않고 좋은 집에 사는 것이 대견하고 기분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고생을 많이 해서 그 때에 벌써 3번째 중풍이 와서 잘 움직이지 못하더니 우리가 부천으로 이사갈 때는 바닥에 비닐 비료 부대를 깔고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습니다. 평생 고생만 하시다가 노년에는 중풍으로 자식들에게 욕보인 어머니를 생각하면 너무 불쌍하고 잘 해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광에 새끼틀을 설치하였는데, 남편이 병이 도졌는지 ‘힘든 일은 못하겠다’고 하여, 제가 새끼를 꼬는 일이 더 많았습니다.
집 뒤 너른 텃밭에는 오이, 가지, 머우 온갖 것을 다 심었지만 제일 넓은 데에 마늘을 심어 수확하고 나면 깨를 심어 수확하였고, 텃밭에 빙 둘러서 감나무도 많았습니다. 매년 가을에 텃밭에서 거둔 마늘과 참깨, 기름, 감을 챙겨서 광주 할머니에게 인사를 가면 그 댁 숙모는 시장금보다 더 많은 돈을 주어 사람을 난처하게 하였습니다. 숙부 집은 광주에서 유명한 부잣집으로 ‘임동 오동나무집’이라고 하면 택시 기사들도 다 알았습니다.
할머니나 숙모나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인격을 존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니 복을 받아 자녀들도 모두 잘되고 건강하고 사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9. 아이들 학교 입학
큰 얘는 일곱 살에 성산초등학교에 입학하여 급우들보다 한 살 어립니다. 틈틈이 정채석 담임 선생님을 만나 급우들과 잘 지내는지, 공부는 열심히 하는지 상담하고 자모회에도 가입하였습니다. 치마바람 덕분인지 시험 때마다 1등을 도맡아서인지 1학년 때부터 반장을 맡아 부천에 이사올 때까지 계속 반장을 하였습니다.
큰 얘는 자기보다 힘 센 친구에게는 지는 것을 유독 싫어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에 아랫집에 사는 철승이가 돌맹이를 던져 이마를 깨고 도망을 갔는데, 동생과 함께 세수대야에 돌맹이를 하나 가득 담아 철승이네 집 앞에 가서 양철문에 계속 돌을 던지면서 “철승이 나와라”하고 떠드는 통에 할머니가 나오셔서 “문 다 망가지겠다. 동섭아 미안하다. 내가 철승이를 두들겨 주마”하고는 이마에 된장을 발라주고 달래서 보냈다고 합니다.
둘째는 학교 들어갈 때까지 숫자를 몰랐습니다. 다섯 살 때, 부천에서 언니네 조카들이 와서 나이를 알려 주었는데, 다음 해에 동네 아줌마가 “몇 살이냐”하고 물어보면 “작년에 다섯 살이었는데, 설 1개 지냈으니까···· 우리 엄마한테 물어 보세요”하고 대답을 했답니다. 그래서, 일곱 살이 되어서도 학교 보낼 생각을 안했습니다. 입학식이 끝나고 1주일쯤 지나 남편이 아침을 먹다가 “여보, 의섭이 왜 입학 안 시켜요”해서 숫자 안 가르친 것은 생각도 않고 “제 나이도 모르는 녀석을 어떻게 입학시켜요”하고 대꾸했습니다. 마침 문화방송에서 프로그램 안내가 나오고 있었는데, 남편이 “다음에 뭐냐”고 물으니 의섭이가 앞질러서 줄줄 프로그램을 외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바로 아이를 데리고 학교에 가서 교무 선생님에게 입학을 시키겠다고 하니, 4학년 자모회장 끝발이 ?였쩝?, “1반은 아빠 선생, 2반은 엄마 선생, 3반은 처음으로 담임을 맡은 처녀 선생인데, 회장님 맘대로 고르세요” 했습니다. 막 발령 받은 선생이 의욕이 더 좋지 않을까 해서 3반에 넣어달라고 했습니다. 의섭이는 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곧바로 글도 익히고 무용도 잘하여 담임 선생님이 의섭이를 반장 시키겠다고 연락하여 왔습니다. 학교에 가서 “의섭이는 아직 나이가 어려 통솔력이 부족하니, 사촌 형(큰 시숙네 막내 아들)을 반장 시켜달라”고 했습니다. 그 때 반장을 했던 정열이는 시골인 장성에서는 수재급이나 입학할 수 있는 교대를 졸업하고 지금 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습니다.
둘째가 학교에 적응은 잘 하지만 어려서 먹새과장인데다가 자기 나이도 몰랐으니 남들 따라가기만 해도 황송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의섭이가 입학하여 처음 일제고사에서 1학년 전체에서 1등을 해서 깜짝 놀라 남편에게 자랑하니, “당신이 열성 자모고 시험관 선생님이 동섭이 담임 선생이라 힌트 준 것 아니요”해서 저도 생각해보니 믿기지가 않아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당시에 일제고사를 볼 때면 전교생들이 한꺼번에 운동장에서 시험을 치르고, 다른 반 담임 선생님들이 시험 감독을 하였습니다. 다음 일제고사에서도 의섭이가 1등을 해서, 남편에게 “이번에도 시험관이 동섭이 담임이었답니까, 모르면 잠자코 계세요”하고 큰 소리를 쳤습니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항상 자랑이었고, 아무리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습니다.
아이들 유치원에 보낼 형편도 아니고, 유치원도 흔치 않던 시절이라서 부천에 이사 와서 셋째, 넷째까지 모두 일곱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요즈음은 아이들을 늦게 입학시키는게 유행이라는데, 일찍 입학하면 형, 언니들과 어울리면서 더 빨리 깨치는 장점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어도 1년에 2번 이상은 아이들 담임 선생님을 만났지만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될 때까지도 비밀로 하였습니다. 학부모가 선생님을 만나 자녀의 학교 생활을 물어보고 부족한 점을 알려주고 부탁하는 것은 어린 아이 교육에는 꼭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엄마가 학교에 가면 다른 급우들에게 놀림을 당할 수도 있고, 아이가 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므로 비밀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매년 초파일에는 아이들 이름을 쓴 연등을 달아주었습니다. 초파일에만 절에 가고, 스님이 가게에 찾아와 목탁을 두드리면서 시주를 구하면 ‘(예수) 믿습니다’ 하고 ?i아내니 양심껏 말해서 불교신자라고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아이들 잘 되라고 부처님께 빌고 싶었습니다.
10. 야당 선거운동을 하다
우리 부부는 열심히 돈을 모아 1970년에 장성댐 하류에 있는 비옥한 논 800평을 사고, 야외 전축을 사서 문화생활도 누리게 되었습니다.
1971년에는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총선이 있어서 전국이 선거 바람으로 들썩하였지만 남편이나 저는 정치에 무관심하였습니다. 하루는 몸이 아파 누워 있는데, 미장원에서 오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성산초등학교 4학년 자모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마침 학교 신축공사가 있어서 부르나 싶어서 억지로 몸을 일으켜 학교에 낼 돈봉투를 마련하여 미장원에 갔습니다. 미장원장은 ‘형님’하면서 머리를 손질하고 화장까지 시켜주더니 읍장 사택으로 데려갔습니다. 거기에 가보니 읍장 부인, 군수 부인, 경찰서장 부인 등 지역 유지 부인이 총 출동하여 잔치를 벌이고 저를 포함한 동네 사람 3, 4명이 거기에 끼었습니다. 전라도에서 제대로 된 잔치상에는 홍어가 반드시 나오지만 미나리 같은 야채로 버무리고 홍어는 보일동 말동 넣기 마련인데, 그 날 홍어무침은 미나리는 보일동 말동하고 비싼 홍어만 보였습니다. 저는 그 뱃속이 뻔히 보여서 “이런 홍어는 처음 먹어 보네” 한마디를 하였습니다. 사택을 나오면서 나이롱(나일론) 바구니와 책 3권을 주길래, 돌아가는 길에 같이 갔던 동네 사람들에게 “이렇게 두꺼운 책을 언제 다 읽어보란 거야. 정정당당하게 출마하면 안되나. 없는 사람은 어디 국회의원에 나올 수나 있겠나” 하고 한 마디 했습니다.
며칠 후에 일터로 가면서 막내를 맡겨두는 가게에 들렀더니, 가게 주인이 김대중 대통령 후보 사진을 보여주면서 “잘 생겼지요” 하길래, 얼굴도 자세히 보지 않고 인사말로 “예, 잘 생겼네요”하였습니다. 장성에서는 신민당 국회의원 후보로 김상복씨가 출마하였는데, 가게 주인이 야당 당원인지도 몰랐습니다. 다음날 야당 사람이 찾아와서 “저희들에게 협조를 해주세요”하고 부탁하길래, “여보세요, 그런 시간이 어디 있어요”하고 딱 잘라 거절하였습니다. 바로 그 다음날 경찰이 찾아와서 “아주머니, 그러면 안되지요. 왜 야당 운동을 합니까?” 하여서, “여당이고 야당이고 선거에 관심 없어요”하고 대꾸하였습니다. 경찰관 2명이 그 후에도 매일 같이 대문 앞을 지키면서 무슨 말을 주고받고, 집을 나서면 졸졸 따라다니며 ‘학교 자모회장이니 여당 입당원서에 도장을 찍으라’고 졸랐습니다. 계속 거절하는데도 귀찮게 따라다녀서 한 번은 화가 나서 “경찰관님, 여당은 공무원도 하고 민간인도 하는데, 야당은 야당증이 없으면 못한다면서요. 야당증 하러 갈랍니다”하고는 10리를 걸어서 백운장에 있는 야당 당사로 찾아가서 신민당 당원증을 만들었습니다. 그 때에 야당 당원 일당이 1,000원(농사일 품삯이 150원)이었는데, 목숨 걸고 독립운동하듯이 선거운동을 하였습니다. 경찰관들이 여당에 입당하라고 하도 귀찮게 하길래 야당 당원증을 만들면 따라다니지 않을 줄로 알았던 것이지 그 때까지만도 목숨을 거는 일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루는 종기가 난 막내 아들을 데리고 광주의 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집에 오니, 맏동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맏동서는 “예이 몹쓸 사람. 지서장님이 자네하고 가게 주인이 야당 선전하러 북상(면)으로 갔다고 자전거로 30리나 갔다가 허탕치고 오셨다네” 하길래, 부아가 나서 “그래서, 왜, 못잡았다는대요”하고 물었습니다. 맏동서가 “자네가 장성으로 가는 것을 보고 누가 신고하였다데. 자네가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북상(북쪽)으로 가면서 일부러 장성(남쪽)으로 갔다고 생각하고 지서장이 북상까지 쫓아갔다가 놓친거네” 했습니다. “형님, 얘가 아파서 (장성보다 더 남쪽인 광주에 있는) 병원에 갔다온 것을 보고도 그런 말씀을 하세요. 경찰관이 헛고생을 하였으니 야당에서 일당을 받아서 술사준다고 하세요” 하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미 맏동서를 무서워하는 철부지 새색씨가 아니었습니다.
다음날도 맏동서가 경찰의 부탁을 받고 찾아왔길래, 경찰들 미운 생각에 야당 사람을 찾아 갔습니다. 야당 사람들을 만나보니 말도 잘 통하고 지하운동을 하는 것이 재미도 있어서 선거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원래 말수가 적은데다가 자녀들에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싫은 소리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아무리 잘한다고 하여도 부모 입장에서는 부족한 점이 한 둘이 아니지만 남편은 저에게만 자녀들에 대한 불만을 말해줍니다. 남편은 제가 말을 걸어도 필요한 대답만 하고, 때로는 제 생각과 반대로 움직이길 더 좋아하는 사람 같습니다. 남편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말하고 “야당 선거운동을 해야겠어요”하였습니다. 남편이 얼마 후에 여당에 가입하였는데, 남편만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여당 당원이었습니다. 남편은 여당에 열성인 사람과 야당에 조금이라도 호감이 있는 사람을 파악하여 저에게 알려주고, 공화당에서 받은 돈 봉투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넌지시 손가락 2개를 펴고(기호 2번 신민당) “잘 부탁합니다”하고 몰래 야당 선거운동을 하였습니다.
총선 전날 대문을 닫으려니 경찰관 2명이 그곳을 지키다가 “저 여자가 나가려다가 우리가 있으니까 들어갔다”고 소곤대는 말이 들렸습니다. 곧바로 집에 불을 끄고 뒷담을 넘어가서 야당에서 받은 일당과 활동비(차비)를 모아 놓은 돈 20,000원을 이름을 써놓은 봉투 100개에 나누어 넣고, 10개씩 묶어 동네에서 몰래 야당을 하던 박씨 집에 찾아 갔습니다. 박씨에게 봉투 묶음을 주면서 “맨 앞 봉투에 있는 사람에게 갖다 주시고 9집씩 나눠달라고 하세요.”하고 다시 뒷담을 넘어 집에 들어와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새벽, 대문을 열면서 보니 경찰관 2명이 앉아 있길래, “밤새 우리 집을 지켜주느라 고생하신 줄 알았으면 대통령 될 아들이나 하나 만들 걸 안타깝네요”하고 놀려주었습니다. 총선에서 공화당 후보가 표를 70%나 얻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지만 제가 맡았던 성산과 남당 마을은 집집마다 공화당원인데도 신민당 후보가 70%나 되는 표를 얻어 야당 마을로 찍히게 되었습니다. 총선이 끝나고 제 구역에서 돈 봉투를 받은 사람과 금액을 정리하여 야당 사람에게 전해주었습니다.
김상복 후보는 선거가 끝나고 술과 고기를 사서 우리 집을 찾아와서 열심히 운동을 해주어 고맙다며 낙선인사를 하였습니다. 그 후에도 야당 사람들을 종종 만났는데, 어느 날 “당신 집에서 동아일보 보시죠. 야당신문을 본다고 지서에 명부가 찍혀 있어요. 그래서 경찰이 당신을 항상 감시하는 것입니다”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없이 살고 무식해도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알게 신문 하나는 봐야 한다고 생각해서 유명한 동아일보를 보았을 뿐인데, 신문에도 여당신문, 야당신문이 있다는 것은 그 때에 처음 알았습니다. 신민당 사람들은 말끝마다 “자식을 도시에서 교육시켜야 훌륭하게 키울 수 있다”고 권하곤 하였습니다.
11. 고향을 떠나다
정부에서는 1971년경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호남고속도로 공사를 한다고 발표하였는데, 하필이면 우리가 10년 동안 아이들 방에 가둬두고 큰 딸이 죽기까지 하는 피눈물을 흘려가며 마련한 논이 수용되었습니다. 논을 살 때에는 흉년이라서 1섬에 13만원이나 하여 쌀 100섬 값인 1300만원을 주었는데, 수용될 때는 생수가 나는 땅 70평을 제외하고, 좌우의 자투리 땅을 제하여 보상 받을 쌀이 40섬도 채 안되었습니다. 또, 그 해가 풍년이라서 벼 1섬에 7만원 밖에 안되어 보상비가 총270만원이고, 그것도 3년에 걸쳐서 나누어 준다고 했습니다. 10년간 번 돈이 1년 만에 5분지 1로 줄어들다니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다 없었습니다. 10년 넘게 번 돈을 다 뺏기게 되니 더 이상 살 의욕이 없어서 아이들하고 쥐약이나 먹고 죽으려고 했는데, 철승이 엄마가 ?i아다니며 감시하고 말려서 죽을 수도 없었습니다.
고향에 정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야당 사람들 말이 아니라도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어서 고향을 떠나기로 하였는데, 믿고 따르던 할머님이 계시는 광주로 떠날 생각이었습니다.
그 때, 동네 어느 집에 사주쟁이가 왔으니 가보자는 동네 아줌마를 따라 구경을 갔습니다. 그 집에 가자마자 점쟁이가 “지금 온 아줌마 이리 들어와 앉아요” 하길래, 얼떨결에 방 한가운데 들어가 앉으니, “당신 지금 남쪽(광주)으로 이사갈려고 하지. 남쪽으로 가면 지금보다 더 빌어먹어. 북쪽으로 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주쟁이는 다른 아줌마를 보고서 묻지도 않는데 “딴 남편 얻어서 딸을 낳았네” 하였습니다. 그 아줌마는 동네에서 평소 얌전한 사람으로 다들 알고 있었습니다. 그 아줌마와 같이 집으로 오는 길에 “사주쟁이가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하네요. 아줌마 세상에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하니, 그 아줌마는 “맞아요. 우리 딸이 최00 딸이에요”라고 깜짝 놀랄 고백을 하였습니다. 지난 20여년 세월도 지긋지긋한데 더 빌어먹을 곳으로 이사갈 용기가 나지 않아 소사읍에 사는 언니에게 이사를 가겠다고 연락하였습니다.
중요한 인생 대목에서 두 번이나 점쟁이 말을 들었으니, 점이나 보러 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점쟁이들은 손님의 표정과 입성, 말하는 것을 보고 대충 맞추는 눈치 빠른 사람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혼자 점보러 나선 적도, 누구더러 먼저 점보러 가자고 한 적도 없습니다. 아이들 결혼할 때에 궁합은 보았지만 유명한 곳을 찾아 다닌게 아니라 잘 모르는 남의 식구가 어떤지 궁금해서 재미로 보았습니다. 세상에 진짜 점쟁이도 없지 않겠지만, 어려운 처지에 빠져서 갈피를 못 잡을 때에 우연히 듣는 말이 마음 속 생각과 같아 힘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집에서 돼지, 닭을 키웠는데, 세 번째 임신하여 출산을 1주일 앞 둔 어미 돼지가 짚단을 갈아주는 과정에서 그만 배를 다치고 말았습니다. 돼지가 곧 진통이 오더니 새끼를 13마리나 낳고 죽고 말았습니다. 어미 돼지는 고기로 팔고, 어미 없는 새끼들을 키울 수가 없어서 남편에게 약을 하여 주고, 돼지 머리와 내장을 삶아서 동네 부부들을 불러다 마당에서 잔치를 벌이고 고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작은 잔치 하나도 없던 가난한 동네인지라 나중에 동네 사람들을 다시 만났을 때에 두고두고 이야기거리가 되었습니다.
'2. Humanities > 22_한국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할머니,공부가 재미있어요?(8)제3장 (0) | 2007.05.16 |
---|---|
[스크랩] 할머니,공부가 재미있어요?(7)제3장1~2 (0) | 2007.05.15 |
[스크랩] 할머니, 공부가 재미있어요?(4) -제2장4~6 (0) | 2007.05.05 |
[스크랩] 할머니, 공부가 재미있어요?(4) 제2장 1~3 (0) | 2007.05.04 |
[스크랩] 할머니, 공부가 재미있어요?(3) 제1장 4~5 (0) | 2007.05.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