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노점, 행상 생활
[1972년 ~ 1976년]
1. 생선, 야채 행상을 시작하다
남편에게 서울로 이사가자고 하니 “농사지을 논도 없으니 나는 생선장사하고 당신은 채소장사해서 먹고 삽시다”해서, 아이들 봄방학을 맞자마자 옷보따리만 싸서 밤새 열차를 타고 새벽에 영등포에 도착하여 소사읍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형부는 옛날 성수암 보살님 점이 맞았는지 사업에 성공해서 소명여고 앞에 큰 집을 가지고 대여섯 집에 세를 주고 있었습니다. 형부네 방 한 칸에 세들었는데, 돈도 없고 객지에서 무얼 해야 하는지 몰라서 두 달을 아무 것도 않고 보냈습니다. 하루는 형부가 우리 부부를 부르더니 “아이가 넷씩이나 있는 사람 둘이서 어떻게 맨날 방구석에만 않아 있냐”면서 눈물을 흘리며 장사라도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남편이 생선장사를 하겠다며 자전거 살 돈을 달라더니 새 자전거를 사란 말을 안 듣고 중고 자전거를 사서, 허구한 날 고장이 나서 세워놓은 날이 더 많고 고치는 삯이 새 자전거 값보다 더 들었습니다. 남편은 6개월만에 생선은 팔아보지도 못하고 자전거를 팔아버렸습니다. 남편은 공무원이나 하면 어울리지 ‘내 간 쏙 빼놓고 하는’ 장사에는 소질이 없었습니다. 남편은 신혼 때에는 매일 낚시나 하고 술자리나 찾아다니는 아버지한테 질려서인지 술을 안마셨습니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하고 남당 마을에 와서 자리를 잡자 겨울에 한가할 때면 두부집에 다니며 노름도 하고 술도 마셨지만 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사에 올라와서 소질도 없는 장사를 하려니 속상해서인지 막걸리에 빠져 살았습니다.
사는 꼴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던지 조숙했던 인천 수산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 언니네 큰 조카가 “이모, 소사역(지금의 부천역)에 가보세요. 아줌마들이 함지박을 가지고 인천에서 생선을 사다 파니까 장사를 해보세요.”하고 말하였습니다. 바로 함지박을 사서 다음날 새벽 소사역에 가서 보니 함지박을 든 아줌마들이 하인천(지금의 인천역) 차표를 들고 있길래 같은 표를 사서 그 아줌마들을 뒤따라 갔습니다. 임신을 하고나서부터 소변을 잘 참지 못하여 한 번 마려우면 5분, 10분도 참기가 힘듭니다. 아줌마들을 놓칠까봐 소사역에서부터 소변이 마려운데도 참고 하인천 생선 도매하는 곳까지 따라가서 동태 1상자를 산 후에야 소변을 보았습니다. 지금도 그 때 소변 참던 생각을 하면 골치가 다 지끈지끈 합니다. 생선은 냄새가 나서 하인천에서 생선을 사올 때에는 객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기차칸 사이에 서서 생선을 지키고 있어야 했습니다.
그 날부터 오전에는 부천 자유시장 시장통 한 가운데에서 생선을 팔았는데, 시장통 양쪽 가게 주인들이 생선 냄새를 싫어해서 손님이 많은 오후에는 남은 생선을 머리에 이고 8킬로미터까지 걸어 상리(상동)나 중리(중동)의 외딴 동네를 찾아가서 팔았습니다. 동네에서 생선을 팔면 돈보다 쌀로 받는 일이 많아서 집에 올 때는 생선 대신에 쌀을 머리에 이고 옵니다.
한 번은 생선을 잔뜩 이고 가는데, 반대편 가게에서 여자들 2명이 ?i아나와 유리창이 넘어져 깨졌으니 돈을 내라고 하여, “그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바람에 넘어진 것 아니냐”고 하였지만 “본 사람이 있다”며 막무가네로 나오고 외딴 곳이라 도와줄 사람도 없어서 할 수 없이 동태 3마리 주기로 했는데, “생선 머리에 이는 것 좀 도와달라”고 하고 일어서서 돌아보니 빼놓은 생선이 5마리나 되는 것을 보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냥 갔습니다.
또 한 번은 대문을 몸으로 밀고 들어가면서 “생선 사세요” 하는데, 개가 치마를 물어뜯어 버렸습니다. 집 주인은 미안하다고 하기는커녕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왜, 들어왔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개조심’이라고 써붙이지도 않았는데, 새끼를 낳았는지 어찌 알겠는가? 남의 집에 들어가 생선 파는 사람이 따질 수도 없어서 다음 집에 가서 실바늘을 빌려 찢어진 치마를 꿰매면서 그 집 주인과 함께 울었습니다.
어느 날은 평소보다 생선을 일찍 팔아 해가 뉘엿뉘엿 할 때에 밭을 지나다가 상추가 좋아 보여 사다가 그대로 쌓아놓고 팔아보니 저울도 없고 씻지도 않았지만 금방 다 팔렸습니다. 다른 상인들은 상추에 뭍은 흙을 씻고 물을 주지만, 사람들 말이 바로 밭에서 가져온 상추라 싱싱하고 물을 줘서 근종(무게)을 올리지 않아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 때부터 낮에는 생선 장사, 저녁에는 상추 장사를 하여 돈을 두 배로 벌었습니다.
노점을 할 때건 가게를 할 때건 도매상에 가면 그냥 물건만 사오는 게 아니라 새로 나온 물건을 유심히 보았기에 다른 상인들보다 항상 앞서서 새 물건을 시작했고, 파는 방법도 달리 하려고 궁리했습니다. 동태철이 지나 준치를 파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농담 삼아 “썩어도 준치”라고 하길래, 바로 흉내 내서 “썩어도 준치 왔어요” 하니 금새 다 팔렸습니다. 이민수(임연수, 이면수)를 팔 때에는 “뼈도 없고 맛있는 이민수씨가 찾아 왔어요”하고 팔았습니다.
장사는 품종을 많이 한다고 좋은 것이 아니고 잘되는 한 품종만 집중해서 팔아야 하고, 여러 가지로 아이디어를 써야 팔린다는 것을 터득하였습니다. 시장통 한가운데에서 양쪽 가게 주인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비켜주어야 하는 처지에 여러 가지 품종을 취급하는 것은 쉽지도 않습니다. 노점상들은 물건 욕심에 이것 저것 많이 가져다 놓고, 가게 주인이 잔소리하면 커피, 박카스 같은 걸 사주며 아쉬운 소리도 하고 싸우기도 하지만, 저는 가게 주인이 가라고 하면 부탁하기도 싸우기도 싫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다른 곳에 가서 팔았습니다.
아이들이 시골에서는 용이었지만, 도시에 와서는 공부건, 학우 관계이건 적응하는데 쉽지 않고 시간이 걸릴 것이 뻔했습니다. 그렇지만, 먹고 살길도 막막한 터에 장성에서처럼 자모회장으로 치마바람은 고사하고 아이들이 가난한 집이라고 멸시를 받을까봐 걱정만 하였습니다.
다행히 첫째는 5학년에 전학 와서 첫 시험부터 전교 일등을 했습니다. 곽 근 담임 선생님이 우리가 살던 언니네 집으로 가정방문을 온다고 했지만 시장에서 생선을 파느라 가보질 못했습니다. 곽선생님은 집에 와보고 형편을 짐작했는지 다음날 선생님 댁의 헌 옷을 싸서 동섭이에게 보내 주었습니다.
둘째는 공부의 틀도 잡히지 않고 전학와서 학교 적응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려서부터 혼자 있기 싫어하고 응석도 잘 부렸는데, 엄마, 아빠가 행상, 노점을 하느라 밤늦게 들어오니 한동안 공부가 뒷걸음질치다가 4학년 때 우등상을 타면서 점차 공부를 더 잘하기 시작했습니다.
선희는 딸이라서 그런지 아빠한테 붙임성이 있어서 다섯 살 때부터 곧잘 용돈을 얻어 썼습니다. 선희가 아빠한테 “아빠 돈 하나만 줘”하고 조르면, 남편은 “없다”고 잡아뗍니다. 선희는 “그러면, 뛰어봐”해서 ‘짤랑 짤랑’하는 동전 소리를 듣고 기어코 동전 1, 2개를 얻어서 막내를 데리고 멀리 가서 오빠들 몰래 과자를 사먹고 오곤 했습니다.
2. 자유시장으로 이사가서 자리잡다
생선 장사를 하면서 밥 굶지 않게 되었지만 생선은 상하기 쉽고 냄새가 납니다. 행상을 나갔다가 길거리에서 소변을 참기 힘들어도 화장실이 있는 곳을 찾아서 생선을 이고 택시나 버스를 탈 수 없습니다. 정해진 노점 자리 없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로는 생선, 채소만큼 좋은 것이 없지만 평생 ?i겨 다니는 노점 생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자유시장 바로 지나서 있는 소사극장 앞에 야채 깡시장이 있습니다. 거기서 옷가지나 그릇 같은 걸 팔면 되겠다 싶었지만 이런 물건은 구색도 갖추어야 하고 양도 많아 소명학교 앞에서 깡시장까지 보따리를 가지고 다니기도 어렵습니다.
시장 동네로 이사가려고 알아보니 아이들이 많다고 다들 세를 주지 않아, 자유시장 끝에 있는 철도 건널목 바로 아래에 있는 집에 가서 네 식구라고 거짓말하고 6만원에 전세로 얻고, 큰 얘들 둘만 데리고 이사를 가고, 아래 두 아이는 언니네 맡겨 놓았습니다. 집주인에게 부침개도 해주고 잘 보이려고 하면서 1주일 있다가 셋째, 또 1주일 있다가 막내를 데려가니 집 주인도 그나마 정이 들었는지 나가란 말을 못했습니다.
부천 시장통을 흘러온 하숫물이 철도 건널목 옆 개울에 모여 흘러가는데, 그 바로 옆에 있던 집은 개울 바닥만큼이나 집바닥이 낮아 비가 좀 왔다 싶으면 물이 부엌과 방에까지 들어왔습니다. 물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온갖 쓰레기며 똥덩어리까지 방안에 들어와서 그 때마다 피신을 가야하고, 물이 빠지면 옷이고 그릇이고 씻고 말리느라 난리가 나지만 식구가 많아서 이사 갈 곳도 없었습니다. 생각다 못해 남편이 장롱 한 짝을 얻어다가 방 한쪽에 커다란 선반을 만들어(얘들이 올라가서 놀아도 될만큼 튼튼했습니다), 장사를 하다가도 비가 올 것 같으면 얼른 집에 달려가서 이불, 옷보따리, 식량 등을 선반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그 때부터 남편 별명이 ‘치깐 목수’입니다. 치깐은 화장실의 사투리로서 야외 화장실 만들 정도의 솜씨는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그런 집이라도 얘들 때문에 ?i겨날까봐 집주인이 싫은 소리라도 할라치면 무조건 잘 보이려고 노력했습니다. 하루는 주인 아줌마가 “얘들이 수도꼭지를 만진다”고 하여, 수도세가 얼마 나오냐고 물어보니 기본요금이 150원이라고 해서 “150원 넘게 나온 건 다 우리가 낼께요” 했습니다. 집 주인 아저씨는 마당에서 소가죽에 붙은 살을 벗겨내는 일을 하였는데, 그 때문에 마당에 수도꼭지가 하나 있었습니다. 얘들한테 미안한 것 중 하나가 장난감 하나 사 준 적이 없고, 남편이 세발 자전거를 주워 칠을 해서 준 것이 유일할 겁니다. 장난감도 없는 얘들이 수도 있는 집에 처음으로 이사가서 신기해서 수도 몇 번 만진 걸 가지고 아이들 기가 죽을까봐 기본요금 이상은 다 낸다고 했던 것입니다. 한 달이 지나서 주인 아줌마에게 수도세가 얼마 나왔냐고 물어보니 150원이 나왔다고 해서 그냥 150원을 주고 “얘들이 수도 가지고 놀아도 이해 좀 해주세요”하였습니다.
주인 집에는 거실, 방 2개, 부엌, 돼지울까지 형광등이 5개나 되었는데, 우리 집에는 방과 부엌을 뚫어서 그 사이에 둔 형광등 1개밖에 없고, 전자제품은 하나도 없었지만 집주인하고 전기세도 반씩 냈습니다.
제 돈 아까운 줄은 누구나 잘 아는 것이지만 주인에게 무조건 양보를 하니까 집주인도 2년 사는 동안에 아무 잔소리를 안하고, 나중에 이사간다니까 “계속 살지 왜 이사를 가려느냐”며 몇 번을 말렸습니다.
새벽같이 깡시장에 가서 노점 자리를 확보하였다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이면 티셔츠, 그릇, 속옷, 양말 등등을 팔기 시작했습니다. 부끄럽다는 생각도 없이 무조건 물건 팔 욕심에 남자 뽀뿌링(포풀린, 면 종류의 겉옷감) 주르스(사각팬티)를 머리에 거꾸로 뒤집어쓰고, 메리야쓰(속옷)와 주르스를 착착 털면서 ‘무조건 100원씩’ 하고 외치면 손님들이 빙 둘러싸고 구경을 하다가 물건을 사갔습니다. 깡시장은 오전에 장사가 끝나는지라 오후에는 생선을 팔았습니다.
첫째의 6학년 담임이었던 20대 후반의 김웅재 선생님은 가장 기억이 남는 싹싹하고 솔직한 선생님입니다. 졸업할 때가 되어서 중학교 입학 상담을 하러가니 김선생님이 “집안 형편이 어려우니 인천공업중학교 보내세요. 거기도 철도고처럼 다 공짜에요” 했지만, 큰 얘는 공업중학교는 앞날이 없고 손재주도 없다고 인문계인 부천중학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부천에 올라올 때에는 가난한 수재들이 모인다는 철도고등학교에 보내는 것이 꿈이었는데, 큰 얘 말을 듣고 보니 맞는 것 같았습니다. 졸업식에서 전교 1등에게 주는 교육감상을 주지 않아서 김선생님에게 따지니, “실업계 갔으면 교육감상인데, 인문계로 갔으니 대신 중학교 입학금 전액(8,848원)을 장학금으로 준 거에요” 했습니다. 장성에서 어떤 사람이 아들이 수석 졸업을 한다고 해서 혹시 쌀이나 주나 해서 솥을 깨끗이 씻어놨더니 상으로 사전을 받아와서 엉엉 울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만 그건 자식 덕에 팔자 고치려는 무식한 부모 이야기일 뿐입니다. 아무리 부모가 노점을 하기로서 돈 몇 푼 때문에 평생 명예를 놓쳤다는 생각에 적잖이 섭섭했습니다. 김선생님은 정이 많은 사람이라서 그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큰 얘가 졸업한 후에도 부천에 근무하던 7, 8년여 동안 노점이나 가게에 찾아와서 “엄마, 힘내세요. 동섭이 공부 잘하지요” 하고 물어 보곤 했습니다.
선희가 7살이 되어 자유시장 바로 옆에 있는 부천남초등학교에 데려갔더니 나이(학령)가 모자란다며 “우리 학교는 교직원 가족도 안됩니다”며 접수를 거절했습니다. 어쩌나 하는 마음에 고민하다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부천북초등학교에 가서 큰 얘 담임 선생님들을 뵈었습니다. 곽근 선생님은 “예비소집일에 그냥 데려 오세요. 제가 다 해드릴께요”하고, 김웅재 선생님은 “몇 살 먹었냐고 물어보면 8살이고, 7월에 태어났다고 하세요. 호적은 전라도까지 가서 떼어 와야 하는데 안가져 왔다고 하세요”하고 자세히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선희가 미리 교육받은대로 여덟 살이라고 대답을 하고 다른 질문도 대답을 잘 해서 입학 허가를 받았습니다. 김웅재 선생님은 담당 선생도 아닌데, 옆에서 구경하다가 밖에 따라 나와서 선희를 얼싸안아 올리고 “그 오빠에 그 동생이다. 앞으로 공부 잘하겠다”고 좋아했습니다. 나중에 막내가 남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선희도 남초등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저는 바쁘지만 아침마다 2년간 선희를 자전거로 태우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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