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3_미국이야기

아빠와 아들 - 절친한 친구되기

忍齋 黃薔 李相遠 2007. 6. 6. 06:05
반응형

아빠와 아들 - 절친한 친구되기

 

(이글에 대한 관심과 반응에 감사드립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 제목을 바꾸어 다시 올려달라 부탁을 하셔서 다시 올립니다.)

 

내가 알던 교민중에 자식들을 잡아서 명문학교를 보낸 분들이 더러 있는데. 자식들과 원수처럼 살더군요. 한인교회 장로를 하시고 늘 명문학교 나온 자식자랑을 하던 로드아일랜드에서 암으로 돌아가신 분이 한분 계신데 장례식 조차 자식들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앗구요. 그때 자식에 대한 욕심을 조용히 내려놓고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되기로 작정을 했지요. 공부야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수 있는거 않이겠어요?


------------------------------------------------------------------------

 

20년 가까이 한국을 떠나와 자식교육에 대한 느낌이 한국과는 피부로 체감하는게 다를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식때문에 속을 끓였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


(내 아들 태어나기전)

 

1. 난 80년대에 군대를 가서 국토방위를 했다기보다 소위 녹화사업을 받았다. 보안대에서 두들겨 맞으면서 운동권들의 밀정노릇을 하면 군대도 집에서 편하게 보내주고 호주나 일본으로 유학도 보내주겠다는 감언이설도 들었다. 재수가 없어 대학 1학년짜리가 잡혀가서 어울리는 말은 아니겠지만 피라미가 대어가 되었을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난 내가 밀정노릇을 할만한 진짜 운동권을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했다. 거부를 한다는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것이었다. 다행히 1980년 대학1학년때 이미 난 선배의 죽음도 목도했고 죽음의 고통이 우스워 보일정도로 몸이 망가지면서 고문도 받아보았다. 하지만 거부의 결과는 무릎이 엉덩이 만큼 부을 정도로 구타와 고문을 받고 ... 보안대 녹화사업과 관련하여 떠들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다(죽지 않은게 사실 다행이다)는 협박을 들으며 대구통합병원에 입원을 했다. 공병대에서 작업하다 다쳤다는 각본으로. 내몸이 병신이 되는지도 모르고 난 너무도 기쁘고 행복했다. 통합병원에 입원한 놈을 또 죽도록 패고 고문하는 일은 없을거라는 안도감으로 ... 난 그곳 대구통합병원 성당에서 보앗던 국군간호사관학교 4학년 생도였던 지금의 내 각시를 만났다.


(내 아들 잉태하기전)

 

2. .... 세월이 흘러 난 청진동에 잇던 잡지연구소 연구원으로 잡지기자교육과 잡지납본업무 그리고 취재지원업무 특히 국제회의 업무를 맞는 직업을 가졌고 내 각시는 수도통합병원에 간호장교 중위로 근무를 할때 여의도성당에서 결혼을 하였다. 결혼하자마자 전후방 교체라고 내각시는 강원도 양양에 있던 동해경비사령부산하 동해병원으로 전출을 같다. 결혼했다고 봐주는거 없더라. 토요일 일과를 마치자마자 속초행 비행기에 몸을 싫고 ... 주말부부 노릇을 했다. 알다시피 기자를 교육하고 상대하는 직업 … 업무와 과도한 폭음이 한줄로 연결된 직업 … 술이 덜깨서 단내를 풍기며 출근하고 또 술마시고 … 주말부부에 … 코피까지 쏟으며 … 이러다 3년도 살기 힘들것 같더라.


(내 아들 잉태시키고 태어난뒤)

 

3. 내 각시에게 … 당신 제대할때까지 유학을 다녀오겠다. 힘들겠지만 미래를 위해서 … 어쩌고 저쩌고 … 박사아내가 되는것도 나쁘진 않았던 모양이더라. 그래서 난 씨만 뿌리고 … 얼마전 조승희가 총질을 해댄 '버지니아 텍'으로 유학을 나왔다 (조승희는 은퇴를 얼마남기지 않은 수문학을 가르친 내 은사도 죽였다). 그곳에서 1년반만뒤에 … 노스이스턴공대로 …


4. 내각시는 1992년에 대위로 제대를 했다. 그때 한국에 자리를 잡앗으면 했는데 … 학부를 전북대농대를 나왔다는게 한국에 교수로 자리잡는걸 꿈도 꾸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때 한국에서 창서와 동영이를 만났었다. 그리곤 제대한 내 각시와 내가 미국에 있는사이에 태어난 89년생 3살백이 내 아들을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각설하고.


(자식교육)

 

5. 내 아들을 유치원 가기전 단계인 프리스쿨을 보냈는데,

늘 오줌을 저려가며 어린것이 신통하게 잘 적응해 가기는 하는데

가끔씩 아이들을 줘패서 프리스쿨에서 퇴학 (?)도 당해보고 …

이것도 지난일이라 쉽게 이야기하지 …

한국에서 태어나서 몇년이고 한국에서 살았던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주먹질부터 익히는게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햇다.

미국은 사소한 폭력. 하다못해 아이들의 장난같은 주먹질도 용납하지 않는 사회더라 …

정말 심각한 상황들이 기다리고 있더군.

 

(한국어와 영어)

 

6. 내 학교와 직장때문에 유치원과 국민학교는 로드아일랜드에서 보냈다.

동양아이라곤 내 아들 하나만 있는곳 …

처음엔 할아버지 할머니 사촌들과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서 한국말을 열심히 쓰고 가르쳤다.

그런데 …

한국말로 “학교에서 아무일 없었니?”그러면 늘 아무일 없엇단다.

하지만 실제로는 왕따에 인종차별에 부당한 대우에 …

어마 어마한 비교육적인 일들이 버려지고 있었음을 문제들이 켜져서 내가 학교에 불려가서야 알게 되엇다.

 

그래서 영어로 오늘 학교에서 무슨일 없었니 (How was your school, today?)라고 물으니

정말 엄청난 일들이 매일같이 버러졌고 버러지고 있더라.

 

7. 첫번째 제일먼저 내가

한일이 집에서 조차 영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일이었다.

한국말과 영어는 어순이 틀려서 사고의 호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영어도 하고 한국말도 철저히 하면 이상적이었겠지만

나역시 미국 공무원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그럴 여유가 없엇다).

 

두번째는

동내법원으로 달려가 내 아들은 영세명 미카엘(미국식 발음 마이클)로

나는 견진명 사무엘을 First Name으로 바꾸었다.

(나역시 쌩원 썅원 해데고 한국녀석이 어찌 미국공무원을 하는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부담감에 늘 피곤해 있었으니

꼉환해데는 미국아이들의 놀림은 불을 보듯 하였다.

민족의 자존성 운운하며 비난하던 사람도 있기는 했는데 나와 내아들의 생존에 관한 일이라).

내아들 이름이 마이클 경환 리 (Michael Gyunghwan Lee) 내 이름은 사무엘 상원 리 (Samuel Sangwon Lee)가 된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다른 동내로 이사를 하여 학교를 옮겨주엇다.

 

8. PTA라고 학부모회의도 열심히 나가고

마술을 익혀서 아이반애들에게 가끔식 마술쇼도 해주고 …

무사히 국민학교를 마치게 되었다.

 

9. 직장때문에 플로리다에 살게되어 중학교 (미국은 6학년 7학년 8학년)를

플로리다 북부 조지아 경계쯤에 있는 잭슨빌에서 다니게 되었다.

미국 남부는

Red Neck (농사짖느라 햇빛에 목이 빨갓케 타서 미국 남부사람들을 비하하여 칭하는 말)이라고

대부분 남침례교회 (서던 벱티스트)에 사람들이 죽자 살자 다니고

조용기 목사의 순복음교회의 대형화를 또 죽어라 부러워한다.

일요일에 잔듸라도 깍고 있으면 주일날 일한다고 한마디씩하고 지나간다.

정확히 흑인과 백인이 사는곳이 나누어져 있다.

그런데 동양인은 백인에 낑겨산다.

 

10. 이곳에서 내 아들은

미국남부 꼴통인 선생들과 아이들에게

무시무시한 인종차별과 부당함을 당하기 시작한다.

이거 일일이 설명하면 수명 10년은 감축된다.

나는 사소한 문제라도 변호사까지 고용해가며 아들을 위해 싸워주엇다.

미국인들의 습성은 그렇다.

자신보다 못하거나 보잘것 없어 보이는 자에겐 천사처럼 너그럽고 착하다.

하지만 자신보다 잘나거나 있어보이면 무섭게 공격하고 트집을 잡고

마치 하이이나처럼 집요하게 목숨줄을 끊어버릴듯이 덤벼든다.

그래서 흔히 소수계들이 좋게 좋게 굽신거리며 위기를 모면하는데 나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리고 중요한건

나는 늘 내 아들에게 "I’m your best friend forever (나는 너의 영원한 베스트 친구다)"라고 말해주었다.

진짜 친구처럼 모든걸 이야기하고 나눈다.

 

11. 내 아들은 전기키타치기를 좋아하고 메탈쪽 음악을 좋아한다.

머리도 길게 기르고 검은계통의 옷을 즐겨입는 록 메탈 스타 흉내를 내길 좋아한다.

나 역시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든다.

하지만 그곳 미국 레드낵 동네에서는 록과 메탈이 악마의 상징이라고 내 아들을 문제아 취급을 했다.

돈을 드려가며 그 차별의 부당성을 풀기위해 고소까지 했다.

법정에서 오라 가라하는게 아이 공부에 지장이 있어서

나와 내아이는 그사이에 진짜(?) 미국인 캘리포니아(이민온 수많은 소수민족과 인종이 어울러져 사는곳)로 전근과 전학을 오고

법정은 가장 비싸고 가장 유능한 유태계 변호사에게 맞기어 1년반뒤에 승소를 하였다.

경제적으로 많은 돈이 들어갔지만 내 아들의 마음의 상처는 많이 치료되었다.

 

12. 캘리포니아에서는 자신의 밴드까지 만들고 아주 행복하게 12학년(고3)을 마무리 해가고 있다.

흠이라면 이곳엔 한국에서 조기유학온 한국아이들이 많아서 한국식으로 과외도 엄청나게 하고

유학온 한국아이들이 전과목을 올 A로 깔아버린다.

그걸 중국아이들이 따라하고

또 인도아이들이 따라하고

유태인들이 따라한다.

난 내 아이에게 그런식으론 공부하지 말고 즐겁고 재미있게 놀면서 공부하라 하였다.

흔한 미국아이들 처럼 내 아들의 성적표는 A, B로 구성되어 있는데

(사실 그정도면 미국 딴 지역에서는 상위인데) 한국아이들에 비하면 형편없이 못하는거다.

하지만 내아들은 UC계열의 학교와 좋은 사립학교들에 입학허가를 받았다.

더우기 자기가 원하는 툴래인 대학교에 합격하여 아주 행복해 한다.

 

13. 재즈로 유명한 뉴올리온즈에 있는 툴래인 유니버스티 (TULANE UNIVERSITY),

나는 아들에게 주립인 UC DAVIS가 학비가 싸고 가까우니 그리가면 어떻겠느냐 했더니

자신 스스로 이런 저런 하다못해 동문회 장학금까지 신청하여 받아내고는 꼭 그 학교를 가겠다고 한다.

18살 이상이니 자기가 모든걸 책임지겠다고 …

 

(미국에서의 자식교육 단상)

 

14. 내가 미국와서 처음 다녔던 버지니아 텍

가슴 아픈 조승희가 떠오른다.

그리고

버벅거리는 영어로 자식들과 진지한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한

세탁소나 컴비니온 스토아를 하는 수많은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나는 실제로 미국의 50위권의 명문대학인 버지니아 텍을 다니면서

패배의식에 젖어있던 많은 한국1.5세와 2세 대학생들과 그 부모들을 보았었다.

 

그 부모들은 한결같이

“내가 누구때문에 이 고생을 하는데 … “

“누구네는 하바드를 가고 누구네는 예일을 갔는데 … 너는 … “

“니 누나는 프린스톤을 갔는데 … 대학원이라도 하바드는 가야 …”

자신들의 자랑거리만을 염두에 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아이들에게 씻지목할 상처를 주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

 

나는 조승희의 부모가 내가 흔히 보던 그런 철딱서니 없는 아이비리그병에 걸린 분들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미국까지 과외열풍을 몰고온 일부 한인들과

자식들과 한국말이든 영어든 진지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며

오로지 자식을 위해 세탁소나 컴비니언 스토어에서 죽도록 일한다는 교민들과

자식들은 미국사회속에 남겨두고

자신들만 한국보다 더 한국스러운 한인교회들과 한인성당 속에 젖어

장로가 되어야하고 회장이 되어야 하는

명분에 골몰하는 한인지도자들의 모습이 자꾸 자꾸 오버랩이 되는지 모르겠다.

 
얼마전에는 스탠포드 학생을 사칭하며 기숙사생활을 하던 - 정말 망가같은 - 한인 여학생이 껄렸다. 성적표를 스스로 만들어 ROTC교육까지 받았다니 말 다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