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
시간과의 술래잡기
손톱 길이만큼 흰머리가 자라나 있었다. 머리에 검은 물을 들인 게 한달 전 쯤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검은색과 흰색의 그 경계가 여지없이 칼날처럼 내 마음을 그었다. 염색을 하기 위해 미장원을 찾을 때마다 이 일을 꼭해야 하나 망설여지곤 했다. 그냥 시간에 순응하며, 내 몸에 일어나는 노화의 흔적들을 지금까지 살아온 훈장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게 현명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내 발목을 잡아서였다.
한편으로는 굳이 나이가 들었음을 증명해 보이듯 흰머리 성성하게 지내는 게 옳은 일일까, 회의도 들었다. 자신을 가꾸는 것과 가꾸지 않는 것. 외모가 한 사람을 온전히 대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라나는 흰머리를 방치하는 일은 곧 자신에 대한 방기라는 쪽에 무게가 실리면서 나는 어정쩡 미용실로 향하곤 했다. 염색을 함으로써 잠깐만이라도 노화의 증거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 또한 행복한 일이며 자신에게 위로가 되는 일이다.
아버지는 은발이셨다. 검은 머리카락 한 올 섞이지 않은 순백의 머리카락으로 중년과 노년을 사셨다. 하얗게 빛나던 그 머리가 어찌나 멋지던지…. 사람들은 먼저 감탄사부터 내질렀다. 아버지가 일부러 염색을 하지 않으셨던 것은 아니었다. 염색약 부작용 때문이었는데, 아버지는 오히려 그 은발이 더 잘 어울리셨다. 하지만 꼭 그랬을까. 아버지라고 젊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의 은발을 싫어하셨다. 상당한 미인이라는 말을 들으셨던 어머니는 당신의 나이보다 열 살은 아래로 보였고, 그런 탓에 사람들로부터 달갑지 않은 의혹을 사야 했다.
젊다는 것은 좋았지만 아버지의 정실부인이 아니지 않나, 하는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아버지에게 제발 염색 좀 하라고 타박하셨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어물쩍 넘어가셨다. 다른 사람한테 젊게 보이는 것이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그냥 주어지는 대로 사는 게 편하다며 어머니의 곱지 않은 시선을 비껴냈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나는 어김없이 자라난 흰머리를 감추기 위해 시커먼 약을 머리에 뒤발한 채 정해진 시간을 지키느라 고개를 곧추세우고 앉아 있는 그 시간이 번거롭고 힘들기 짝이 없었다. 끝내 염색을 마다하신 아버지의 심정을 이해할 만했다.
내가 20대였을 때는 빨리 나이가 들기를 원했다. 열기와 치기와 호기로 똘똘 뭉쳐진 에너지는 자꾸만 나의 눈을 가렸고, 그 때문에 나는 번번이 길을 잃었었다. 가야 할 길이 아닌데도 뚜벅뚜벅 걸어갔다가 허방에 빠지기도 했고, 쓸데없는 일에 휘둘려 된통 당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세월이 빨리 지나가기를 원했다. 그러면 나이를 먹을 테고,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지혜도 생길 것이며, 행동은 좀 더 진중해질 테고, 마음속의 번민과 혼란도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고 나면 삶을 아주 잘 살아낼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한데 어느 날 문득 고개를 들고 세상을 둘러보니 그리 더디 가기만 하던 시간이 나에게로만 왕창 달려 들어와 있었다. 내가 언제 이렇게 나이가 들어버렸을까, 그 각성 중에도 정작 번민과 혼란은 20대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혼돈과 갈등과 번민은 세월만큼 깊어져서는 이전보다도 더 나를 흔들어대고 있는데 세월에 육신만 조글조글 삭아버려서는 나를 당혹케 만들었다. 이제는 젊은 날에 부렸던 치기와 호기와 열정은 주름 속으로 숨겨야만 했다.
나는 언제쯤이나 아버지처럼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수 있을는지. 애써 치장하거나 나이가 들어감을 숨기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내보이며 또 그런 자신을 부끄럽지 않게 여길 수 있을는지. 게다가 내 나이만큼의 너비와 깊이로 타인들을 끌어안을 수 있을까. 하지만 타인을 안기에 내 안의 품은 갈수록 작아지고, 생각 또한 편협해져서 금방금방 가시들이 돋치곤 한다. 큰 나무를 닮을 것이라던 이전의 기대 또한 치기였음을 깨닫는다. 일 센티미터도 안 되게 자라난 흰머리들이 자꾸만 천근 무게로 나를 내리누르며 힐책한다. 그냥 두라고. 시간에 순응하며 살라고. 그게 더 아름다울지도 모른다고.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7-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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