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
어머니의 가을
갑자기 계절이 바뀌어 버렸다. 연이어 내린 비에 폭염이 사라지더니 대기가 달라졌다. 만만찮은 열기에 숨쉬기도 버겁더니만, 이제 제법 아침저녁으로 살갗에 오소소 소름까지 돋는 것이 가을임을 실감할 수 있다. 골목길을 걷다보면 어느 가정집 담장을 넘어온 대추나무, 은행나무, 감나무, 석류나무 가지들을 볼 수 있었는데, 가지마다 제법 굵은 알이 달려 있던 게 그 폭염 속에서도 가을은 잉태됐던 모양이었다.
나날이 굵어지고, 익어가던 그 알들을 바라보면서도 폭염의 위세가 워낙 그악스러워 가을은 그저 멀고먼 계절인 줄만 알았다. 한데 내가 더위를 탓하며 게으름을 부리고 있는 동안 시간은 착실하게 다가올 계절을 준비하고, 변화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의 자전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 계절의 변화니만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거야 당연한 일이고, 필연적인 일이겠지만 그래도 들이닥치듯 찾아온 가을은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어릴 때의 가을은 어머니의 한숨과 함께 시작되었다. 다가올 추석과 겨우살이 걱정에 어머니는 달력의 날짜들을 더듬으며 포옥 한숨을 내쉬곤 하셨다. 지금이야 시장에 나가면 물건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별 고생하지 않고서도 때깔 좋은 햇과일과 햇곡식, 온갖 나물들을 장만할 수 있지만, 그때는 모든 게 부족한 시절이라 서두르지 않으면 좋은 물건을 놓치기가 십상이었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조금이라도 더 쌀 때 추석 제수거리를 준비하느라 틈만 나면 시장에 들러 물건들을 살펴보고 값을 비교해보며 주어진 예산과 맞춰보곤 하셨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이때쯤이면 우리 집 냉장고나 부엌에는 추석거리용 과일이나 생선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고, 어머니 몰래 탐스러운 햇과일을 훔쳐 먹다 된통 혼나는 일까지 있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한 계절을 앞서 사셨다. 바람 끝에 조금이라도 매운 기가 느껴지면 어머니의 한숨소리는 더욱 흥감스러웠다. 유난히 추위를 잘 타던 어머니는 연탄 광에 연탄 몇 백 장은 들여놓아야 한겨울 추위 걱정에서 놓여나곤 하셨는데, 그 시절에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늘 웃돈을 주고서야 원하는 때 필요한 만큼 쟁여놓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모든 준비를 한번도 놓친 적이 없었다. 한데 이제는 어머니의 그런 걱정은 들어볼 수 없다. 가을이 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탓도 있겠지만, 가을을 실감하고서도 예전 같지 않게 조금은 허전한 게 어머니의 양념 같은 한숨이 빠져 있기 때문이리라. 생각해보니 어머니의 가을맞이 걱정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그동안 눈치채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추석 제수거리 장만 걱정에, 연탄 걱정을 하지 않는 어머니를 보고서도 그게 이상하지가 않았다. 정말, 그 한숨이 언제부터 사라졌을까? 언제든 스위치만 돌리면 방바닥이 따끈따끈 데워지는 가스보일러가 있고, 어디를 가든 먹음직스러운 햇과일과 먹을 것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어머니는 더 이상 셈을 하지 않고, 미리 장을 봐다 놓지도 않으신다. 일찌감치 장을 봐다 놓으면 오히려 더 거추장스러울 뿐. 어머니가 이제 무엇으로 가을을 맞이하시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한 번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꼼꼼한 계획과 준비 속에 가을을 맞던 어머니를 닮지 않은 모양이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뒤늦은 후회 속에 여름을 보내고 가을을 맞을 뿐. 내게 주어진 시간을 알뜰히 쓰겠노라고 매번 다짐을 하지만 이번 여름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에 흰색으로 탈색돼 가는 세상을 바라보며 나는 살아 있다는 기척을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 사이 한 계절이 후딱 지나가버린 것이다.
누군들 그러지 않겠는가마는, 이렇게 성큼성큼 가는 시간들을 보노라면 무섭기 짝이 없다. 내게 준비된 여름이 또 하나 사라졌구나 하는 안타까움과 허무함에 마음 한편이 시리다. 여름을 그냥 허투루 보냈으니, 가을은 두 배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저 후회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 지금부터라도 어머니의 가을처럼 그렇게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하나도 놓치지 않는 그런 알찬 계절로 가꿔 나가야겠다. 여러분도 그러시라.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7-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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