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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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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한 해가 저물었다. 변심한 애인이 붙잡는 애인을 냉정하게 떨치고 가듯 가는 시간도 야속하기 짝이 없다. 한 해 동안 참 열심히 살았던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성큼성큼 가는 시간 앞에서 황망한 표정으로 남은 시간을 헤아리며 자신을 책망하고 있기가 십상이다.
2007 정해년, 그 첫출발 선상에서 다짐했던 결의는 가상했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어디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씩씩하게 살기. 그러나 나는 이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했다. 때로는 휴식을 가장해 게으름을 부리며 남아도는 시간을 지루해했고, 인생이 별거더냐 하루하루 사는 게 인생이지 하는 심정으로 적당히 대충대충 살았다.
지나치게 엄숙한 태도로 삶을 사는 것이 잘사는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반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저냥 사는 것 역시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안다. 하긴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온 대로, 해찰을 부리며 살아온 사람들은 해찰을 부린 대로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결코 허비하는 일 없이 알뜰히 쓰겠노라 매번 다짐해보지만 언제나 한 해 끄트머리에서 뒤돌아보면 대견함보다는 후회스러운 마음이 더 크다.
새해 해돋이를 보면서 품었던 각오대로 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이 한 해 무탈한 삶을 살았으니 감사할 뿐이다. 아니, 아니다. 뜻하지 않은 암초에 부닥쳐 삶이 좌초돼버린 사람들에게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 해 반성 운운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가 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음이다.
지나온 날을 곰곰 되작여보며 반성을 하는 이 시간이 매우 조심스러운 까닭은 어쩔 수 없이 내일을 기약해볼 수 없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한 해의 반성 역시 생사의 기로 앞에서는 사치일 수밖에 없음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던, 얼굴에 자글자글 주름이 팬, 바닷바람에 그을린 늙은 아낙의 울음 섞인 한탄이 체물처럼 명치 끝에 걸린다. 이게 웬 날벼락이냐고. 평생 갯벌에서 조개 주우며 살았는데 이제 뭘 먹고 살아야 하냐고. 욕심 부리지 않았다고.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고, 나이도 먹었으니 이제 어쩌냐고. 그 늙은 아낙은 기름 범벅인 조개를 들어 보이며 눈물바람을 했다.
그 늙은 아낙 또한 새해 첫 기도에 올 한 해를 무사하게 보내게 해주십사 비손을 했을 터이다. 이제까지 살아온 만큼만 달라고 빌고 또 빌었을 터이다. 그리고 믿었을 것이다. 조개도 줍고, 낙지도 잡고, 고깃배 타고 나간 가족을 기다리며 하늘의 일기를 살피거나 그렇게 먼 바다를 쳐다보고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그 모범 답안은 알지 못하지만 인생에는 공짜가 없다는 사실만큼은 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오르막 길이 있으면 내리막 길이 있으며 고난 다음에 낙이 온다는 진리를 안다. 인생은 새옹지마요 전화위복이라지 않던가. 그러니 일희일비 하지 말라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나에게 세상은 역시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게 해준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정해년 끄트머리. 바다를 뒤덮은 검은 기름을 걷어내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팔 걷어붙이고 검은 해안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아직 세상이 참 따듯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정말,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며 그들이 있어 내일을 꿈꿀 수 있다. 그들이 있기에 또 다시 2008년을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당장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내일을 믿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혹여 새로운 삶이 예비돼 있을지 모르므로. 또 한번 세상에 속고 자신에게 속더라도 꿈을 믿고 품을 수밖에.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시름도 가게 마련이다. 게다가 우리 주변에는 따듯한 마음을 지닌 이가 많지 않은가. 다가오는 2008년, 무자년 새해 첫 기도는 나보다 먼저 그들을 위해 준비해야겠다.
잘 가거라, 정해년. 생의 한 페이지를 또 넘긴다.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7-12-27
2007 정해년, 그 첫출발 선상에서 다짐했던 결의는 가상했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 변명하지 않기, 어디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씩씩하게 살기. 그러나 나는 이 약속을 성실하게 이행하지 못했다. 때로는 휴식을 가장해 게으름을 부리며 남아도는 시간을 지루해했고, 인생이 별거더냐 하루하루 사는 게 인생이지 하는 심정으로 적당히 대충대충 살았다.
지나치게 엄숙한 태도로 삶을 사는 것이 잘사는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반대로 아무 생각 없이 그냥저냥 사는 것 역시 안 된다는 사실도 잘 안다. 하긴 열심히 살아온 사람들은 열심히 살아온 대로, 해찰을 부리며 살아온 사람들은 해찰을 부린 대로 아쉬움이 남기 마련이다.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결코 허비하는 일 없이 알뜰히 쓰겠노라 매번 다짐해보지만 언제나 한 해 끄트머리에서 뒤돌아보면 대견함보다는 후회스러운 마음이 더 크다.
새해 해돋이를 보면서 품었던 각오대로 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나는 이 한 해 무탈한 삶을 살았으니 감사할 뿐이다. 아니, 아니다. 뜻하지 않은 암초에 부닥쳐 삶이 좌초돼버린 사람들에게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앞선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생존 자체가 위협받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한 해 반성 운운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내가 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음이다.
지나온 날을 곰곰 되작여보며 반성을 하는 이 시간이 매우 조심스러운 까닭은 어쩔 수 없이 내일을 기약해볼 수 없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한 해의 반성 역시 생사의 기로 앞에서는 사치일 수밖에 없음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던, 얼굴에 자글자글 주름이 팬, 바닷바람에 그을린 늙은 아낙의 울음 섞인 한탄이 체물처럼 명치 끝에 걸린다. 이게 웬 날벼락이냐고. 평생 갯벌에서 조개 주우며 살았는데 이제 뭘 먹고 살아야 하냐고. 욕심 부리지 않았다고.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고, 나이도 먹었으니 이제 어쩌냐고. 그 늙은 아낙은 기름 범벅인 조개를 들어 보이며 눈물바람을 했다.
그 늙은 아낙 또한 새해 첫 기도에 올 한 해를 무사하게 보내게 해주십사 비손을 했을 터이다. 이제까지 살아온 만큼만 달라고 빌고 또 빌었을 터이다. 그리고 믿었을 것이다. 조개도 줍고, 낙지도 잡고, 고깃배 타고 나간 가족을 기다리며 하늘의 일기를 살피거나 그렇게 먼 바다를 쳐다보고 살아갈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그 모범 답안은 알지 못하지만 인생에는 공짜가 없다는 사실만큼은 안다.
밤이 지나면 아침이 오고 오르막 길이 있으면 내리막 길이 있으며 고난 다음에 낙이 온다는 진리를 안다. 인생은 새옹지마요 전화위복이라지 않던가. 그러니 일희일비 하지 말라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나에게 세상은 역시 살아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게 해준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정해년 끄트머리. 바다를 뒤덮은 검은 기름을 걷어내기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팔 걷어붙이고 검은 해안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아직 세상이 참 따듯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정말, 세상은 나 혼자 사는 게 아니며 그들이 있어 내일을 꿈꿀 수 있다. 그들이 있기에 또 다시 2008년을 살아갈 용기가 생긴다. 당장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떠한 말로도 위로가 될 수 없음을 안다. 하지만 내일을 믿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혹여 새로운 삶이 예비돼 있을지 모르므로. 또 한번 세상에 속고 자신에게 속더라도 꿈을 믿고 품을 수밖에.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시름도 가게 마련이다. 게다가 우리 주변에는 따듯한 마음을 지닌 이가 많지 않은가. 다가오는 2008년, 무자년 새해 첫 기도는 나보다 먼저 그들을 위해 준비해야겠다.
잘 가거라, 정해년. 생의 한 페이지를 또 넘긴다.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7-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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