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광장> 긍정의 힘 |
얼마 전 친하게 지내던 한 소설가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늘 그렇듯 자분자분한 음성으로 그간의 안부를 묻고 용건을 이야기했다. 내용인즉 소설 쓰는 한 선배가 남도 땅끝 마을에 가고 싶어하는데 동행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그 친구가 기꺼이 운전은 하겠다고 했다. 마침 단풍이 드는 모습을 보고 싶던 참이어서 흔쾌히 응낙했다.
화엄의 세상이 따로 있던가. 봄 여름 치열하게 살다 다음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몸 일부를 버리며 최소한의 체적으로 혹독한 세월을 견디는 것. 자연이 몸으로 가르치는 삶의 이치이며 지혜이지 않던가. 한데 그 선배가 건강이 좋지 않다고 했다. 십수년째, 이틀에 한번 병원에 가 투석을 받는다고 했다. 2박3일의 일정이 무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더니 병원에서 투석이 끝나는 대로 선배를 태우고 바로 출발하겠노라고 했다.
그렇게 나선 길이었다. 선배는 초면인데도 환하게 웃으며 오래된 지인처럼 나를 맞아주었다. 얼굴색은 병색으로 잿빛에 가까울 만큼 검었고 팔목에는 투석을 위해 확장시켜 놓은 혈관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선배는 더 이상 책날개 속에 들어 있던 눈빛 초롱초롱한 젊은 여인이 아니었다. 선배는 연탄가스 중독사고까지 겪었다고 했다. 축 늘어져 거의 죽은 거나 다름없던 선배는 어찌어찌하여 목숨은 건졌지만 그 후유증으로 많은 고생을 했던 모양이었다. 만만치 않은 삶의 이력들을 덤덤한 표정으로 불쑥불쑥 내던지는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멀쩡한 육신을 가지고서도 나는 늘 비틀거리기만 하는데 선배는 하루하루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그 삶에 스스로 상을 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땅끝 마을은 유난히 햇빛이 좋은 고장이었다. 그 고장에 미황사라는 절이 있었다. 소의 울음이 아름다워 미황사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절에는 숨이 막히도록 아름다운 괘불이 있었다. 1년에 한 번 거풍을 겸해 그 괘불을 밖으로 내놓고 법회를 여는데, 그 괘불재를 보고 싶어 무리하게 욕심을 부렸노라고 선배는 말했다. 알고 보니 선배는 고향이 토말, 해남이었다. 선배는 그 고장에서 철없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했다. 상기된 얼굴로 감탄사를 연발했고, 얼굴에 자글자글 주름이 팬 사람들과 아이처럼 임의롭게 이름을 부르며 옛날을 추억했으며, 빈 밭에 들어가 절로 뿌리를 내린 갓을 뽑아들며 맛있는 밥상을 상상했다.
서울생활을 하면서 맵싸한 맛을 지닌 갓김치가 그렇게도 먹고 싶었노라며 쑥스럽게 웃을 때 나는 사는 게 저런 맛이구나 하고 깨달았다. 선배의 맛있는 밥상을 위해 나도 따라 들어가 갓을 뽑았지만 내가 하나 뽑을 때 선배의 손에는 벌써 한 움큼의 갓이 들려 있었다. 그러다가도 선배는 어쩔 수 없이 가쁜 숨을 골라내고, 휘청거리는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잠깐 자신의 육신을 지탱해줄 버팀목을 찾았다. 그 모습이 위태해 보였다.
하지만 선배는 내내 행복해했고, 삶에 감사했다. 식후에 꼬박꼬박 몇 종류의 약을 챙겨먹어야 했지만 병은 선배의 삶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건강한 내가 되지도 않을 욕심에 우울증까지 겪을 때 그녀는 겨울나무들처럼 시련을 견뎌낼 방법을 찾고 있었다. 게다가 선배는 투병을 빌미로 적당히 게으름을 부릴 법한데도 자신의 약값을 아껴 동네 떠돌이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건강한 나는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 치여 전전긍긍하고 있었지만 선배는 그렇지 않았다. 선배에게 세상은 참 재미있는 삶터였고, 선배의 그 같은 생각은 단아한 문장으로 풀려나왔다. 돌아오는 내내 지금 삶이 행복하다는 선배의 음성이 귓전에 맴돌았다.
삶에 대한 긍정의 자세. 그게 선배의 힘이었다. 믿는 대로 된다고 했는데 선배는 긍정적인 생각으로 몸의 병을 견뎌내고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고 있었으며 하루하루를 소중한 추억으로 갈무리하고 있었다. 나는 선배의 반이라도 닮고 싶다. 불확실한 미래에 마음을 다치고만 있을 게 아니라 오늘보다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지금의 불안을 견뎌내고 싶다. 진정한 삶은 살아 있음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의 몫이리니. 그 가을, 참 아름다운 나무는 선배였다.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0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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