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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아버지 |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간혹 집 근처 저수지로 산책을 나가는 때가 있다. 그곳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연꽃과, 산책로를 따라 나무가 터널을 이루는 운치 있는 풍경 때문에 많은 사람이 찾는다. 쉼터에다 화장실, 우레탄이 깔린 걷기 전용로와 발을 지압할 수 있는 자갈 길, 저수지 가운데 오롯이 솟아 있는 작은 섬과 분수까지, 한낮 동안 이런저런 일로 심신이 지친 사람들이 가볍게 산책하면서 하루를 정리하기는 딱 좋은 곳이다. 게다가 가끔 이곳에서 작은 음악회도 열리곤 하는데, 어쨌거나 도시 한가운데 이런 자연 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참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오후가 되면 나처럼 운동 겸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이곳은 꽤나 북적인다. 남녀노소가 따로 없다.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사람도 있고, 유모차를 밀고 나온 사람도 있고, 목발을 짚은 사람도 있다. 연인들은 벤치에 앉아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상대의 몸을 더듬고, 장관을 이룬 연꽃을 사진에 담으려는 사진작가들의 위험한 포즈도 볼 수 있다. 이 번잡스럽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간이 나름대로 질서가 유지되고, 조용한 것은 신기하다. 아무도 이곳에서 눈살을 찌푸릴 만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알게 모르게 우리 역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많이 정착돼가는 느낌이다. 문화의 힘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 우쭐해지기도 한다. 한데 왜 갑자기 어린 시절이 떠올랐을까. 생전의 아버지는 보름에 한번 꼴로 우리를 당신 앞으로 불러 앉히셨다. 아버지 앞으로 불려가는 게 왜 그리도 싫었던지. 교장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훈계는 한 시간 이상 계속됐고, 아버지는 가끔 나를 비롯한 언니들에게 스스로의 생각을 묻기도 하셨다. 장래 희망이라든지, 당장에 고쳐야 할 생활 습관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고 아버지에게 약속을 하게 만드셨다. 그때는 모든 게 다 싫었다. 아버지도 싫었고, 아버지의 훈계도 싫었고, 또 나에게 말을 시키는 일도 싫었다.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대답을 안 할라치면 아버지는 화를 누르며 대답을 채근하고, 또 채근하셨다. 마지못해 건성으로 대답하고 아버지 앞에서 풀려나올 때쯤 다리가 저려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때의 나를 돌아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고, 그런 나를 지켜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싶다. 왜 지금에 와 그 시절이 그리운 것일까. 항상 시간은 사람의 기억과 생각을 배반한다. 그때 아버지 앞으로 불려가는 게 죽을 것처럼 싫었으면 나이가 들어서도 여일하게 싫어야 마땅하겠지만 어느 때부터선가는 고개가 끄덕여지며 마음 한 구석이 훈훈해지는 것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아버지가 묻는 말에 자분자분 대답하고 그거밖에 못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한데 누가, 어느 장사가, 시간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까? 아무튼 그랬을 것이다. 그날, 천천히 이런저런 생각에 사로잡혀 걷는데, 문득 앞에 가는 한 부자가 내 주의를 끌었을 것이다. 40대 중반가량의 아버지와 중학생인 듯싶은 아들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일부러 들으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많은 사람이 시계 방향으로 돌고 있었고, 나 또한 그들과 함께 같은 방향으로 돌다보니 어쩌다 그들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대화가 자연스럽게 내 귀에 잡혔다. 아버지는 아들이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썩 좋지 않은 학교 성적에,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찬 의욕도 없고, 구체적인 계획도 없으며, 친구들과도 별로 교류가 없는 아들이 내심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것저것 조심스럽게 묻는 아버지의 염려에 아들은 시종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다. 그저 모든 게 다 짜증나고 귀찮다는 태도였다. 그게 내 청소년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랬다. 나 또한 아버지의 걱정에 그런 태도를 보였었다. 좋은 약은 입에 쓴 법.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내 앞을 걷던 그 아들도 내 나이가 되면 깨우칠까. 그때라도 깨우치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지금 누가 나에게 아버지처럼, 나를 야단쳐주고 지혜로운 길로 인도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버지의 야단과 염려가 그립다. 사랑하지 않으면 야단도 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은미희 /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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