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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Humanities/22_한국역사

소련의 두차례 KAL 요격 진실 반드시 밝혀야!!!

忍齋 黃薔 李相遠 2009. 3. 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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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두차례 KAL 요격 진실 반드시 밝혀야!!!
  2009/03/03 10:41  정병선      
 정병선의 러시아 모스크바 리포트
 

대한항공 화물기가 지난 7일 교신이 끊긴 채 유럽상공을 비행하다 독일전투기들이 출격했다.

이는 자국 영공을 수호하는 공군 전투기들의 임무다. 스파이기 등의 접근에 대한 대처이기도 하다. 지금은 덜하지만 여전히 나토와 러시아 사이에도 정찰비행은 수도 없이 진행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냉전 시절 적대국 상공에 진입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 사건은 1978년과 1983년 소련이 대한항공을 두 차례 요격한 사건을 연상시킨다. 더구나 12일 정부는 1978년 KAL기의 무르만스크 불시착 사건 발생 30년을 맞아 당시 비밀 외교 문서를 공개했다. 1978년과 1983년 KAL기는 북극과 사할린 상공의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 정부는 한심하다. 이런 사건에 대한 진실을 제대로 밝히지도 못한다. 이런 사건에 대한 전담 부서도 없다. 매번 사건 무마나 당장 피하기에 급급해 한다. 이러니 국민들이 한심한 정부라고 비난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런 사건에다 우리 외교관이 극동에서 피살사건된 데 대한 진실도 캐지 못하고 있다. 뭐가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매번 허우적거리며 형식적인 행정처리에만 급급하다.

 

지난 2001년 사할린 방문해서 대한항공 여객기 희생탑을 보면서도 더 분노감을 느꼈다. 이 나라 정부는 온전하고 정말 국민들을 위해 존재하려는 공무원들이나 있을까하고. 이러니 러시아 대통령이 알맹이 없는 블랙박스를 우리 정부에 가져오지 않았겠나?

 

 


◆1978년과 83년의 반복된 비극

1978년 4월20일 승무원과 승객 110명을 태우고 파리에서 서울로 가던 KAL 707은 앵커리지로 향하다 항로를 이탈해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 KAL기는 소련 수호이(SU-15) 전투기에 피격돼 무르만스크에 비상 착륙했다. 미사일이 날개 아닌 동체에 명중했다면 전원이 몰사했을 아찔한 순간이었다.

1983년 9월1일, 앵커리지에서 서울로 향하던 KAL 007이 소련 영공을 침범했다. 이번에는 SU-15전투기의 요격이 명중해 승객과 승무원 269명이 몰사했다. 이런 사건이 왜 반복됐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정부가 공개한 외교문서도 무르만스크 불시착 사건에 대한 궁금증만 증폭시킬 뿐이다.

◆진실은 왜 공개되지 않는 것일까

무르만스크 사고 때 비행기에는 조종사, 부조종사, 항법사가 있었다. 1978년에는 INS(관성항법장치)나 GPS(위성항법장치)가 없어 항법사가 동승해 비행루트를 잡아줬다. 항법사는 자이로콤파스(gyrocompass·항공기 방향 제시계기)와 로란스(LORANS·무선원거리 항행원조시설)를 이용했다.

외교부가 외교 문서를 통해 '사건 발생이 항법사의 오판'으로 발표하자 당시 항법사였던 이근식(78)씨는 "이는 사실과 다르며 상당 부분 날조됐다"고 반발하면서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항로 이탈은 항법사의 판단 착오가 아니라 조종사의 과실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씨와 동승했던 차순도 부기장 역시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항법을 잘못한 것"이라고 밝혔다. 김창규 당시 기장도 차 부기장과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이 항법사는 "당시 대한항공 707기는 자이로콤파스가 고장이었으며 비행시간을 지키기 위해 안전을 무시한 비행을 했다"며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회항을 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또 "기장의 말과 달리 당시 항로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항로 설정에 어려움이 있었다"며 "그런데도 기장은 구름 띠를 따라 1시간 이상 북으로 조종하는 바람에 항로를 이탈했다"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이씨와 기장은 '서로 자기가 주장하는 항로가 맞다'며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객기가 소련 영공을 침범한 것도 모르고 있다가 갑자기 소련 전투기가 접근하면서 상황이 돌변했다는 사실이다. 소련 전투기가 여객기 앞에 나타나자 차 부기장은 호출을 시도했다. 상대와 교신이 안되자 손짓 발짓으로 비상 신호를 했다.

전투기 조종사도 손짓을 했지만 KAL 조종사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전투기 조종사 역시 전혀 이해를 못하는 듯했다. 그런 다음 전투기는 여객기 주위를 한 바퀴 선회한 뒤 사라졌다. 그로부터 4~5초 가 지난 뒤 여객기는 전투기에서 발사한 미사일을 맞고 추락하기 시작했다.

왼쪽 날개가 떨어져 나가고 여객기가 급강하하자 기내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김 조종사는 처음에는 검게 난 도로를 보고 착륙을 시도했지만 그 순간 기차가 빨간 불빛을 하고 나타났다. 기장이 그냥 착륙했다면 모두 비명 횡사했을 것이다. 비행기는 다시 고도를 높인 뒤 얼음이 언 호수로 비상 착륙했다. 이씨는 "그야말로 구사일생이었다"고 말했다.

여객기에 미사일을 발사한 소련에 대한 비난이 있었지만 소련은 영공 방어 차원에서 당연히 응대할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소련은 여객기가 스파이기로 위장한 것으로 판별했으며, 유도 착륙에 응하지 않아 격추시키려 했다고 말했다.

무르만스크 상공에서 대한항공 격추를 시도했던 SU-15 전투기 조종사 아나톨리 케레포프씨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분명히 비상신호와 유도착륙 사인을 보냈으며 여객기는 유도에 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당시 생존 승무원과 승객들은 모두 귀환했다.

 

 

기자가 소련 사할린상공에서 대한항공을 격추한 조종사의 집을 찾아가 인터뷰하고 있는 장면. 그 역시 소련시대의 희생양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5년 뒤 KAL 007기는 소련 영공인 사할린 상공에서 SU-15전투기에서 발사된 열 추적 미사일에 격추됐다. 소련은 "유도 착륙을 시도했지만 여객기가 불응해 격추했다"고 밝혔다. KAL기를 격추한 SU-15 전투기 조종사 겐나디 오시포비치는 기자에게 "유도착륙에 응하지 않아 격추했다"고 했다. (기자는 이 조종사를 찾기 위해 크라스노 다르 지역을 누비고 다녔다)

두 사건의 진실을 밝혀줄 유일한 단서는 블랙박스다. 하지만 우리 정부는 두 사건에 대한 블랙박스를 건네받지 못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대규모 인명살상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인 루트를 통한 공식 항의도 못하고 보상도 받지 못했다. 그 사이 벌써 30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지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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