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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겨 맘'
박미희씨는 반상회에 가면 맨 구석자리에 앉아 있곤 했다. 남의 집에 간다는 것부터 거북했다. 그 소심한 주부가 딸에게 걸림돌이 되는 일 앞에선 참지 못하는 소문난 싸움꾼이 됐다. 새 요리 하나 배우는 것도 쩔쩔매던 어설픈 주부가 피겨스케이팅 기술부터 운동역학까지 두루 꿰는 반(半)전문가가 됐다. 박씨는 딸 연아를 키우면서 스스로도 놀랍게 사람이 바뀌었다고 했다(아이의 재능에 꿈의 날개를 달아라·폴라북스).
▶ 박씨의 삶을 180도 틀어놓은 것은 일곱 살 유치원생 연아가 다니던 과천시민회관 스케이팅 강좌 코치의 한마디였다. 7개월짜리 단체강습이 끝나갈 무렵 코치가 상담을 청해왔다. "실례지만 가정 형편은 어떠신지요. 스케이팅은 돈이 많이 들어가는 운동입니다. 아이를 계속 밀어줄 수 있겠습니까." 박씨는 코치가 강습을 한 학기 더 시키려는 게 아니라 아이의 인생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 박씨는 집에 오자마자 계산기를 두드렸다. 단체강습 한 달 수강료는 4만9000원, 본격적으로 개인 레슨을 받으려면 35만원이다. 9만원짜리 스케이트화부터 100만원대 선수용으로 바꿔줘야 한다. 박씨는 큰아이의 과천 강좌를 그만두게 하고 연아의 피아노와 미술 학원도 끊었다. 최소한 가계 지출만 남겨놓고 나머지 돈을 모두 연아의 스케이팅에 몰았다. 박씨는 동창회, 친구 모임, 문화센터까지 개인시간도 모두 포기했다.
▶ "연아 어머니, 아직 멀었어요? 우리 불 꺼야 돼요." 모녀는 밤마다 과천실내링크 직원들 재촉을 받으며 자정 넘도록 연습을 거듭했다. 박씨는 점프와 착지 기술, 물리치료도 독학으로 공부해 "엄마가 어쩌다 코치 일까지 하게 됐느냐"는 질문을 받곤 했다. 대학 전공은 의상이었지만 인생 전공은 오직 연아였다.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연애할 때보다 더 열렬히 아이에게 몰두했다"고 했다.
▶ 11년 전 박세리의 맨발 샷은 외환위기 그늘에 사위어가던 국민에게 힘과 용기를 줬다. 그 뒤엔 여중생 세리를 공동묘지까지 데려가 담력훈련을 시켰던 아버지 박준철씨가 있었다. 다시 닥친 경제위기 앞에서 '피겨 퀸' 김a연아가 한국
인의 능력과 자부심을 새롭게 일깨워줬다. 우리네 부모들은 덜 먹고 덜 입으며 억척스럽게 일해 자식 뒷바라지를 했다. 2세를 잘 가르치고 나라를 일으켜세웠던 아버지·어머니 세대의 현대적 투혼을 '골프 대디(Daddy)' '피겨 맘(Mom)'에게서 본다.- 오태진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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