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푸른광장> 30분 먼저/문화일보[2010-04-15]

忍齋 黃薔 李相遠 2010. 4. 18. 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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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30분 먼저

 

 

사는 순간 순간이 다 배움의 연속들이라면 지나친 말일까. 늘 같은 일상을 반복해 살아도 어느 순간에는 이런저런 갈등을 하고 후회를 할 때가 있다. 엽렵하게 일의 선후를 추리고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택의 순간에는 내 안의 욕심과 현실의 이해가 상충해 명쾌한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게다가 누군가 내게 부탁을 해오면 마음은 불편한데 거절을 하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끌려갈 때가 많다.

어쨌거나 매사가 엽렵하지 못하고 느려터진 데다 딱 부러지지 못한 성격이다 보니 나 스스로도 참으로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한데 그런 나에게 얼마 전 어느 어른께서 웃으시면서 나무라셨다.

그리 오래지 않은 날이다. 그 어른과 약속이 있어 나름, 바쁘게 외출 준비를 했다. 칠십이 가까운 그 어른은 교육 분야에서 성공한 분이었고, 일분일초를 아끼며 사셨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성실한 분이셨는데, 나는 그 반대였다. 가끔 그분은 그런 나를 답답해하셨다.

그날은 점심 약속이었는데, 내가 사는 수원에서 약속 장소까지는 2시간 거리였다. 광역버스를 타고 서울 사당역에서 내려 다시 지하철 4호선으로 갈아타고 목적지까지 가는 데 2시간. 12시, 약속 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적어도 9시부터는 준비를 해야 했다.

한데 그게 여의치가 않았다. 주방 설거지며 방과 거실 정리정돈에 화장실 청소 등 소소한 집안일을 끝내고 나니 10시가 됐다. 집안일을 버려두고 외출 준비를 할 수도 있을 테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연로한 어머니가 할 게 분명했으므로 대충이라도 해놓고 가야 했다.

그렇게 건성, 집안일을 끝내 놓고 대문을 나선 시각이 11시였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그러니 마음은 바빴다. 버스 안에서도, 지하철 안에서도, 내 마음은 쉬지 않고 달렸다. 째깍째깍, 무심하게 달아나는 시간이 야속할 뿐이었다.

택시를 탈까도 생각해봤다. 하지만 언젠가 빨리 가야겠다는 생각에 택시를 탔다가 더 늦었던 일이 있기에 그냥 눌러앉아 있었다. 매정하게도 이미 약속 시간은 훨씬 지나 있었다. 나 역시 살아가면서 가장 아까운 것 가운데 하나는 허투루 보내는 시간이었다. 매사가 느려터지긴 했지만 그래도 시간을 낭비하지는 않았다.

여하튼 평소에는 내 시간이 아까운 만큼 시간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바쁘면 돌아가라는 말이 있듯이, 그날은 급한 마음에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지하철에서 내려 출구를 잘못 나간 탓에 한참을 헤매어야 했고, 반달음박질 걸음에 온 몸은 땀으로 뒤발해 있었다. 그 어른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들을 해야 하는지, 마음의 준비 같은 것은 할 수도 없었다. 그저 죄송스러운 마음밖에 없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그 어른을 찾아뵈니 역시나 표정이 많이 굳어 있었다. 왜 그러지 않겠는가. 약속한 시간이 40분이나 지나 있었으니 나라도 마뜩치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 어른에게 40분의 시간은 세상을 구하고도 남을 시간이니 어찌 괘씸하지 않을 수 있을까.

땀을 닦으며 연신 죄송하다는 나를 가만히 지켜보시던 그분이 말씀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존경하는 한 분이 있었소. 그분은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분인데, 만나는 상대가 누구든 간에 30분 먼저 약속 장소에 나와 꼼꼼히 준비를 했소. 자신이 만나야 할 사람이 누군지, 관심사가 뭔지, 그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점검하고 또 점검했소. 그 사람은 크게 성공했지요. 그 사람의 성실성과 준비성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신뢰감을 주었으니까요. 약속 장소에 늦게 나온다는 것은 이미 실패한 거요. 왜냐하면 이미 상대방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출발하기 때문에 부탁을 할 수도 없고, 또 상대가 부탁한 것에 대해서는 들어줘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소. 늦게 나오는 데는 누구나 다 사정이 있을 수밖에 없을 거요. 하지만 그것은 변명이 되지 않아요.”

그 어른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나는 부끄러웠다. 그날, 헤어지는 순간까지 내내 죄송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인생의 성공은 30분 먼저라는 그분의 말씀은 곧 삶의 지혜였다. 이후로 30분은 아니더라도 늦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30분의 지혜.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은미희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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