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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내 기억의 풍경/문화일보 [2010-05-13]

忍齋 黃薔 李相遠 2010. 6. 10.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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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내 기억의 풍경

 

기사 게재 일자 : 2010-05-13 13:46
은미희 / 소설가

마감해야 할 원고를 붙잡고 있느라 봄이 오고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산란하는 빛이 어지러워 유리창을 창호로 붙여놓은 방에서는 꽃이 피고 지는 바깥을 내다볼 수 없었다. 내가 생활하는 공간은 아파트 9층 한편의 작은 방인데, 작정하고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봐야만 사람이 사는 세상을 볼 수 있었다. 모든 소설가가 그러겠지만, 나 역시 장편 소설을 쓸 때는 온통 소설 생각뿐이다. 내가 소설 속의 인물이 되기도 하고, 소설적 배경이 되는 가상의 공간들이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흘러간다. 그러니 어찌 현실 속의 세상살이를 잘 할 수 있겠는가.

그러다 어느날 문득, 잠에서 깨어나듯 밖이 궁금해졌다. 이 시기의 산하가 가장 아름다울 때라는 사실이 생각난 것이다. 야트막한 동산에 피어난 진달래, 개나리, 또 새로 돋는 나무의 연녹색 이파리들은 왜 그리 맑고 살가운지. 어느 것 하나 예쁘지 않고,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다.

서둘러 베란다로 나와 세상을 내려다보니, 아뿔싸, 왕복 사차로의 도로변에 심어놓은 왕벚꽃나무가 하얗게 꽃을 피워서는 바람이 불 때마다 난분분, 꽃비를 뿌리고 있었다. 그 풍경에 또 한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무슨 누리를 보겠다고 이리 어둑한 골방에 틀어박혀서는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지인에게 내 속내를 드러내 보이며 푸념을 했다. 뼈가 물러지도록 소설을 써대느라 정작 계절의 변화를 지켜보지 못했으니 어찌 그 소설이 온전할까. 게다가 그리 소설을 쓰고 또 써도 늘 무언가 허전한 것이 이제 마음부터 지친다고도 했다.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푸념을 귀담아 들었던 지인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나를 데리고 꽃구경을 떠나주었다. 남도 길이었다. 구불구불 산 밑 부리를 감고 이어지는 좁은 국도를 따라 우리는 봄의 세상을 달렸다. 길이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섬진강변이었다. 그날 따라 햇빛도 환했다. 평일이라 차들도 많지 않아 가는 길이 그만큼 편하고 느긋했다.

날씨가 변덕스러웠던 탓이었는지 꽃들은 순서 없이 뒤섞여 피어나 있었다. 시들어가는 동백이 있었고, 응달진 곳에서는 자목련이 뻘쭘하게 서 있었으며, 개나리 뒤에서 진달래는 수줍은 연분홍으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어디 그뿐일까. 배꽃, 라일락이 다투어 피어나서는 서로가 시간을 묻고 있었다. 누가 이른지, 누가 늦었는지, 서로 상관하지 않고 한데 피어나서는 꽃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어찌 보면 함께 뒤섞여 있는 연분홍, 노랑, 연록의 색들이 유치할 만한 데도 자연이 만들어놓은 색깔들은 알록달록 곱기만 했다. 무슨 수로 인간이 그 자연의 색들을 모방해낼 수 있을까. 모처럼 햇빛은 오지게도 푸졌다. 황사도, 스모그도, 먹장구름도 그날만큼은 말끔히 개어서는 남도 산하가 더없이 맑고도 밝았다.

한데, 시간이 갈수록 설렘이 실망으로 바뀌었다. 모처럼 떠나온 여행인데, 정말 올 들어 처음으로 나온 꽃구경인데, 내 마음속에는 무언가 마뜩찮음이 괴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내 기억 속에 들어 있던 것과는 어딘지 조금씩 달랐던 것이다. 아니, 조금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 가본 곳처럼 생경하고도 불편했다. 도로 곳곳이 확장과 단장을 구실로 파헤쳐져 있었고, 강변을 따라 들어선 각종 음식점들은 섬진강 맑은 물길을 가리고 있었다. 게다가 군데군데에 공사 자재들이 부려져 있어 통행을 방해했으며 경치를 가리는 지자체들의 온갖 현수막들이 구호처럼 펄럭이고 있었다. 옛날의 정답고 살가웠던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연히 감탄사는 나오지 않았다. 다만 마뜩찮았고, 불편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그런데 우리의 욕심으로 그 아름답던 자연이 볼썽사납게 망가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대로 두었으면 저들끼리 알아서 그늘도 만들고 꽃도 만들고 풍경도 만들 것을. 그 아름답던 길은 이제 더 이상 만나볼 수 없다.

하긴 우리의 욕심으로 변해버린 것이 어디 그곳뿐이랴. 조금 눈길이 머문다 싶으면 어김없이 개발이라는 이유로 곳곳이 깎여나가고 잘려나가서는 마음을 쓰리게 하던 곳이 얼마나 많던가. 그게 아쉽고 서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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