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푸른광장> 과유불급/문화일보 [2010-01-21]

忍齋 黃薔 李相遠 2010. 1. 28. 02:18
반응형

<푸른광장>

과유불급

며칠 몸이 아팠다. 욕심으로 가득 찬 마음이 육신의 병을 일으킨 것인데, 꽤나 깊게 앓았다. 이불 속에 누워 땀을 뻘뻘 흘려대면서 생각한 것이 많았다. ‘과유불급’이라고, 새해 각오가 너무 지나쳤던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지나치면 오히려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지혜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래도 무언가 쫓기는 심정이었다. 게다가 이제 내가 나를 책임지겠다고 만천하에 대고 약조를 했으니 게으르게 있을 수가 없었다.

계획도 계획이려니와 이제부터는 건강도 챙긴다며 운동을 했는데, 그게 무리가 온 모양이다. 좀 쉬어줬으면 좋았으련만 몸이 적응하도록 고집을 부린 데다, 작심삼일이 되지 않도록 스스로를 닦아세웠으니 그게 병으로 도진 것이다. 마음에 든 욕심만으로도 버거웠을 텐데, 힘에 부치는 그 욕심을 좇아 무리하게 몸을 움직였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잘 하려고 하다가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한 경우가 내 삶에 있어 얼마나 많던가.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한 방송사의 어린이 노래자랑 프로그램에 학교 대표로 참가하게 되었다. '옥수수나무’라는 가사의 짧은 노래를 곡목으로 정했고, 무대에 올랐다. 4분의 3 박자로 경쾌한 곡이었는데, 잘하려고 욕심을 부리다보니 나도 모르게 8분의 6박자로 불렀다. 그러니 당연히 몇 마디 부르지 못하고 그만 무대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나마 구겨진 내 체면이 위안을 받은 것이 다른 아이에게 그 노래를 부를 기회를 주었는데, 두 명의 아이들 역시 연거푸 나와 같이 ‘땡’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또 한번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합창단이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는데, 그날도 나는 더 잘하고 싶어 저녁 늦게 단복을 빨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걱정이 되었다. 아침까지 단복이 마를지 확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기어이 자리에서 일어나 물이 뚝뚝 떨어지는 단복을 걷어 연탄불 위에서 말리기 시작했다. 노란 원피스에 커다란 흰색 칼라가 달린 단복은 불 위에서 하얀 김을 내뿜으며 말라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약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 냄새가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러다 한참이 지난 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황급히 뒤집어본 단복에는 이미 커다란 구멍이 생겨나 있었고, 그 구멍 주위로 까맣게 그슬린 자국이 손바닥만 하게 나 있었다. 당연히 다음날 아침에 방송사에 갈 수가 없었다. 그냥 평소처럼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너무 욕심을 부렸던 탓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잘하려고 하다가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꽤나 많았다. 욕심을 비우고 일을 하면 오히려 뜻하지 않게 좋은 결과를 얻을 때도 있었는데, 무언가 각오를 하고 작심삼일을 경계하며 몸을 움직이다보면 번번이 탈이 났다. 그저 마음을 비우고 진인사 대천명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면 될 텐데, 욕심이 과해 몸을 상하게 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그 경계를 알지는 못한다. 어디만큼이 최선이고, 어디만큼이 과욕인지. 그 지혜를 어디서 구할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과욕을 부렸다고는 생각들지 않는다.

내가 나를 책임지기 위해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일이 어찌 과욕이 될 수 있을까?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일이고 보면 어떻게든 내가 한 약속은 지켜야 할 터. 몸의 병을 앓으면서도 그렇게 그렇게 나를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단것이 먹기는 좋아도 너무 많이 먹으면 물리고, 좋은 날만 계속되면 세상은 사막이 된다고. 그러니 육신의 아픔도 아름답지 않은가? 아프다고 짜증내지 않고, 그 아픔을 오히려 마조히즘의 즐거움으로 치환시키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그 또한 열심히 살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나무도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것이 더 강인하지 않은가? 사람 역시 아픈 만큼 더 품이 커지고 넓어지는 법. 나 역시 그래야 할 것이다. 육신의 고통에 무너지지 않고 견뎌내야 할 것이다. 당장의 아픔과 힘듦에 좌절하지 않고 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그 시련을 이겨내는 내성이 생기지 않겠는가. 그 내성을 길러보리라.

[[은미희 / 소설가]]


기사 게재 일자 2010-01-21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