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아름다운 얼굴

忍齋 黃薔 李相遠 2010. 7. 19. 0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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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얼굴

 

 바람 속에 무언가 달큼하고도 쌉쌀한 향기가 배어있다. 조금 있으면 그 바람 끝에 몸 뒤척이며 지천은 붉게 물들 것이다. 대지가 달아오를 때쯤 내 마음 역시 까닭 없이 몸살을 앓을 테고, 바람을 따라 무작정 길로 나설 것이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저 바람이 끄는 대로, 바람이 부는대로 코를 킁킁거리며 정분난 사람처럼, 그렇게 발밤발밤 바람의 뒤를 밟아나갈 것이다. 가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의 열정으로 얼굴 붉어진 연인들 같은 얼굴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바람을 따라 걷는 그 길에서 아는 얼굴도 만날 테고, 난생 처음 본 얼굴들도 만날 것이다. 아는 얼굴이되, 도무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얼굴도 있을 테고,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입에 익은 이름 몇 개쯤도 떠오를지 모른다. 바람의 장난으로, 문득 누군가의 음성이 듣고 싶어 전화를 걸어 그간의 안부를 물을지도 모른다. 그들 중 누군가는 감정의 앙금이 남아 불편한 관계로 남아있는 사람이 있을 테고, 또 누군가는 이름만 떠올려도 가슴이 일렁이는 사람도 있을 테다. 그 길에서 참 많이도 만났다. 하지만 만났으되 지금까지 이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물며 얼굴이야.

 

 하지만 난 결코 한사람을 잊지 못한다. 아니 안다고도 할 수 없다. 일주일에 두어 번 얼굴을 보면서도 아직 이름도 모르고, 그 사람의 사적인 부분을 알고 있지 않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모른다고 해야 옳을 일일 터이다. 그러나 단언하건대, 나는 앞으로도 그 사람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난 것은 정확히 십칠 년 전 쯤의 일이다. 그때 내 나이가 딱 떨어지는 삼십 세였으니, 지금 나이에 빼고 더하는 일은 쉬운 일이다. 십칠 년 전, 내가 일하던 직장 부근에 그 사람의 일터가 있었다. 그때 나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내 존재에 대해, 자존에 대해. 그리고 내 존재와 주변의 관계에 대해. 물론 그 이전부터 존재에 대한 고민은 있었지만 삼십 세에 이르러 나는 그 보다는 더 근본적인 각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누구나 그렇듯 젊은 날의 치기와 호기와 열정이 그 존재의 진실한 각성을 방해하고 굴절시키고, 왜곡시켰다.

 

 그랬다. 그는 내가 일하던 직장 부근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다. 어깨가 실하고, 얼굴도 환한, 이십대 중반쯤의 청년이 조그마한 알루미늄 부스 안에서 열심히 구두를 닦고 있는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었다. 그 청년이 있는 부스 앞을 오며가며, 나는 그를 눈여겨보았다. 아무리 봐도 그는 구두를 닦고 있을만한 청년이 아닌 듯싶었다. 물론 구두를 닦는 일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혈기왕성한, 단단한 근육이 불끈거리는 청년이 구두를 닦고, 헤진 구두 굽을 손보는 일이 어딘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어느 날 나는 마음먹고 청년의 작업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구두를 닦다말고 사람 좋은 표정으로 나를 맞았다. 구두코에 열심히 윤기를 내고 있던 탓이었는지 청년의 얼굴이 발그레 달아올라 있었다.

 

 나는 오래 신어 볼이 늘어나고 여기저기 찍혀 볼품없는 내 구두를 내밀었다.

 

 “조금 기다리셔야 되겠네요.”

 

 그가 친절하게 말하며 등받이가 없는 둥근 의자를 내게 권했다. 하지만 자그마한 작업장 안에는 청년의 친구인 듯한 다른 남자가 간이 의자에 앉아있었고, 나는 그들과 함께 앉아 있는 게 거북해 새침하게 말했다.

 

 “아녜요. 다 닦이면 가져다주세요.”

 

 나는 청년의 작업장에서 빤히 바라다 보이는 한 건물의 3층을 가리켰다. 순간 그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옆에 있던 청년의 친구인 듯한 남자도 차가운 시선으로 내 위아래를 훑어 내렸다. 남자의 고깝다는 시선이 내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돈을 지불할 터이므로 나는 그 정도의 요구는 할 수 있다고 여겼고, 그것이 내 존재를 대접하는 일이라 여겼다.

 

 “조금 늦어도 상관없지요?”

 

 청년은 이내 곤혹스러운 표정을 거두고는 미소로 대답했다. 나는 그의 작업실을 나왔다. 헌데 여전히 등 뒤에서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다. 아마도 그 청년의 친구였을 남자가 보내는 눈치였을 것이다. 그 눈총 때문에 나는 더 심술궂은 여자가 돼갔다.

 

 여섯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퇴근을 해야 하는데, 신발이 없었다. 그 청년이 내준 슬리퍼를 신고 있던 나는 내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참다못해 가방을 챙겨들고 막 일어나던 참이었다. 그때 청년이 문을 열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는 그 순간 할 말을 잃어버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청년의 양쪽 겨드랑이에는 목발이 끼워져 있었고, 다리하나는 굳건히 땅을 딛지 못한 채 짧은 길이로 덜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얼른 그 청년의 기색을 살폈다. 숨을 고르고 있는 청년의 얼굴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려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청년은 가쁜 숨 때문에 말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리고 기진맥진한 표정으로 구두를 내밀었다. 나는 숨고 싶었고, 그 청년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다리가 이런지 몰랐다고. 하지만 나는 표정을 숨겼다. 오히려 내 사과에 그 청년이 입을 상처가 염려되어서였다. 대신 나는 자책했다. 그따위 것으로 자존을 생각하다니. 올라오는 것보다도 내려가기가 더 위험해 보이는 청년에게 부축해주겠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나를 쏘아보던 그 청년의 친구의 눈빛도 그제야 이해되었다. 그때 차라리 일어나 나를 나무라주었더라면……

 

 가을, 붉게 타오르는 단풍을 보노라면 그 청년의 붉디붉은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청년의 얼굴이 딱 그랬다. 청년의 작업장은 지금도 그곳에 있고, 이제는 마음 편하게 웃으며 인사한다. 나는 청년에게 그때의 일에 대해 아직 사과하지 못했고, 그 청년역시 자신의 장애를 빌미로 사람들에게 특별한 대접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건강한 다리를 지닌 사람들보다도 더 힘차게 세상을 살아간다. 지금껏 보아왔던 가장 아름다운 단풍의 붉음은 그 청년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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