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새벽을 여는 두부장수

忍齋 黃薔 李相遠 2010. 7. 19. 10:59
반응형

VADOSE DOT NET


새벽을 여는 두부장수

 

 딸랑딸랑. 종소리는 아침마다 푸르스름한 새벽 기운을 뚫고 날아왔다. 혼곤한 잠속에서 그 종소리를 들을 때면 나는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나는 하루의 첫 시작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시작해야 안심이 되었다.

 

어쩌면 이 강박증에 가까운 의식은 나만의 증상이 아닐 것이다. 하루하루를 전투적으로 살지 않으면 낙오돼버리는 이 치열한 삶의 전장에서 명찰 달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런 강박증 하나쯤은 지니고 있게 마련이다. 다만 그 수위와 농도에 따라 병으로 분류되느냐, 아니면 삶을 견인하는 원동력이 되느냐, 그 차이만 있을 뿐이다.

 

 간밤, 폭풍이 불거나 눈이 내릴 때면 나는 새벽의 종소리를 걱정해야만 했다. 그 지난한 길을 뚫고 두부장수는 여느 때처럼 두부를 팔러 올 것인가. 바람에 섞여 비라도 퍼부을라치면 아무도 두부를 사러 나가지 않을 텐데, 두부장수는 그래도 내 혼곤한 새벽잠을 깨울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나의 기우였다. 두부장수는 딸랑딸랑,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종을 울리며 새벽을 열었다. 새벽잠이 많은 나였지만 날이 순하지 못한 날만큼은 카디건을 걸치고 나가 두부를 사곤 했다. 그 같은 가상한 내 행동은 두부장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나를 위한 것이었다.

 

두부가 팔리지 않으면 두부장수는 새벽장사를 그만둘 테고, 나는 제의처럼 내 의식을 깨우는, 아니, 하루의 안정된 시작을 축복해주는 종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될 터이므로, 나는 나를 위해 두부를 사곤 했다.

 

 새벽의 종소리는 나에게 이상한 슬픔을 안겨주곤 했다. 그 맑은 소리는 의식 밑바닥에 자리하고 있는 쓸쓸함, 외로움, 고적함 같은 것을 흔들고, 이내 그 슬픔의 인자들은 설움으로 왈칵 밀려나왔다. 그 슬픔은 갸륵하게 나에게 살아야 하는 의지를 안겨주곤 했다. 어려서부터 나를 키우고, 여물게 하고, 보듬어 준 것은 슬픔이었다.

 

살 떨리는 기쁨보다, 숨 막히는 환희보다, 언제나 먹먹한 슬픔에 익숙했고, 또 푸근했다. 하긴 누군들 매일 매일을 열락 속에 살겠는가. 어깨를 파고드는 노역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다들 시지프스처럼 정상을 향해 걷고 또 걸어가는 것을.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정상은 점점 더 멀어져 가기만 할 뿐이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기 위해,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안달하며 늘 목표를 수정하고, 재무장하느라 마음이 어지러울 것이다. 하긴 자신의 의지로 목표치를 수정하지 않아도 세상은 이를 악 물고 뛰어가도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스스로 변화하고 진화해 가지 않던가. 날개를 가진 이가 아니면 도저히 그 빛나는 세상의 중심으로 끼어들 수 없을 것이다.

 

 새벽마다 갓 만든 두부를 작은 트럭에 싣고 동네를 돌며 두부를 파는 그 두부장수는 오십을 넘겼을까싶은 작은 몸피의 남자였다. 두부 한모를 주문하며 많이 팔리냐는 나의 물음에 요즘에 누가 아침식사를 하느냐고 대답했다. 정말, 이 바쁜 아침에 누가 알뜰히 끼니 챙겨먹고 다닐까. 더구나 슈퍼에 나가면 인스턴트 밥에, 두부도 종류별로, 가격별로, 크기별로, 입맛대로 얼마든지 고를 수 있고, 전화 한통이면 국과 밥과 반찬에, 과일까지 배달해주는데, 누가 바쁜 새벽 시간 쪼개 두부를 살까.

 

  팔리지 않는데 왜 고집스럽게 새벽판매를 하느냐는 내 질문에 두부장수는 툴툴거렸다. 지금껏 두부 파는 일만 해왔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그만두겠냐고, 이거 그만두면 무얼하겠느냐며, 두부장수는 아직 제 자리를 잡지 못한 자식들 때문이라도 새벽장사를 그만둘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에 나는 내심 안심을 했다. 수지타산 맞추어가며, 영악스럽게 삶을 재편성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남자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직 나도 이 세상에 남아있어도 된다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었다. 세상의 변화에 맞춰 재빠르게 직업을 바꾸지 못하는 두부 장수의 우직성을 높이 사야 할지 아니면, 현실부적합자라고 해야 할지 나는 판단을 보류했다.

 

 주변을 유심히 둘러보면 우리도 모르게 사라져 간 것들이 많다.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나는 타자기와 워드 프로세서로 글을 썼지만 이제는 찾아보기조차 어렵다. 채널변환장치가 달린 텔레비전. 워크맨. 가끔 그것들이 복고라는 미명아래 등장해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요긴하게 쓰이지는 않는다.

 

한때 우리의 삶을 치장해주고 빛나게 해주던 것들은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사용 용도가 복잡해 도무지 편하게 쓸 수없는 첨단발명품들이 우리를 당혹하게 만든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우리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탄생된 것들이지만, 정말 그게 우리를 위한 것일까? 우리의 일터를 좀먹고, 인간의 가치와 존재를 위협하는 것들. 언젠가는 그것들에게 밀려나 하는 일없이 세상을 떠도는 날이 오지 않을까.

 

두부만 봐도 그렇다. 이제는 콩만 씻어 앉혀놓으면 아침에 따끈따끈한 두부가 만들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부장수역시 그 첨단 기기에 밀려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다른 것은 할지 몰라요. 나도 할 수만 있다면 다른 일을 찾아보고 싶긴 한데.”

 

 별거 다 묻는다는 듯 두부장수의 어투가 사뭇 투박스러웠다. 그리 열심히 일해도 뜨듯한 방 아랫목에 허리붙이고 편한 잠 한번 자지 못하게 하는 삶에 투정을 부렸을까.

 

 옛말에 한우물만 파라는 속담이 있다. 하지만 요즘에는 카멜레온처럼 재빠르게 시대의 조류에 자신의 몸 색깔을 맞추지 않으면 도태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어느 순간 오래 묵은 것들이 더 빛나게 다가오는 때도 있다. 나는 늘 서성거리며 살아온 듯 했다. 어느 한 가지 일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고 안절부절 하지 못한 채 불안함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이다.

 

이일은 나에게 맞을까, 실패하면 어떨까. 과연 내가 잘해나갈 수 있을는지. 내 안의 두려움은 깊이를 알 수 없었다. 평생을 두부 만드는 일에 헌신해왔다는, 두부밖에 모른다는 두부장수는 나에게 두부 한 모를 건네고 멀어져갔다.

 

그의 작은 트럭 뒤로 푸르스름한 새벽의 기운도 따라갔다. 새벽을 몰고 가는 두부장수처럼 주변 돌아보는 일 없이, 내재해있는 자신안의 두려움에 함몰되는 일없이, 그렇게 뚜벅뚜벅 삶의 길을 걸어가야 하지 않을까.

 

 

VADOSE DOT NET


반응형

'0. 韓山李氏 > 11_小說家殷美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불어 사는 사회   (0) 2010.07.19
인간에 대한 예의   (0) 2010.07.19
당신의 새해소망은 무엇입니까   (0) 2010.07.19
발바리는 어디로 갔을까   (0) 2010.07.19
아름다운 얼굴   (0) 2010.0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