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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농부의 마음으로 / 문화일보 [2011-03-31]

忍齋 黃薔 李相遠 2011. 4. 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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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농부의 마음으로 / 문화일보 [2011-03-31] 

 

 


은미희 소설가


흉흉한 소식들 가운데서도 어김없이 꽃들은 피어나고 있다. 매화, 산수유, 개나리, 목련…. 남도에서부터 올라오는 꽃소식에 마음부터 먼저 들썩여진다. 아직 지난 겨울의 두툼한 옷들을 벗어버리지도 못했는데, 나무들은 큼큼, 대기 속에 퍼져 있는 봄의 기운들을 맡고 부지런히 물관으로 생의 기운들을 실어 나르고 있는가 보다. 누가 가르쳐 주거나 깨워 주지 않아도 저 스스로 시간과 때를 깨닫고 나아가거나 물러날 줄 아는 자연이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정말, 지금 섬진강변 마을에는 매화가 한창일 것이다. 청매화, 홍매화가 꽃눈처럼 날려서는 붉고 하얗게 황토를 뒤덮고 있을 것이다. 그러고보니 꽃 마중을 떠나본 지도 오래다. 하긴 굳이 꽃놀이가 아니더라도 뒤늦게 시작한 공부 탓에 한 곳에 진득하게 있지 못하고 많은 시간을 길 위에서 보낸다. 학교가 지방에 있기 때문에 1주일에 이틀은 길 위에서 보낼 수밖에 없다.


지인들은 그런 나를 이해할 수 없는 모양이다. 이제 벌여 놓은 일도 마무리지어야 할 시기인데, 새삼스럽게 웬 고생이냐는 것이다. 그들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무엇 하나 제대로 해놓은 게 없으니, 새로 시작하는 것보다 이제부터라도 하고 있던 일에 더 마음을 쏟고,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도록 진력하는 일이 더 나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철이 덜 들어서 그런지 자꾸만 새로운 것에 마음이 간다. 좋게 말하면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이라 할 것이요, 나쁘게 말하면 사나운 욕심일 것이다. 욕심과 도전. 그 경계가 모호한 탓에 가끔 나 자신 역시 새로운 시작 앞에서 머뭇거릴 때가 있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고 하지만, 때와 일의 성격에 따라서는 도전이라기보다는 사나운 욕심으로 비칠 수도 있는 법이다.


뒤늦은 공부를 하느라 차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나는 그 시간들을 알뜰히 내 것으로 쓰지 못한다. 이상하게 길 위에 있으면 머릿속에는 잡념들만 억세게 뿌리를 내리는 탓이다.


그날도 그랬다. 무언가 강퍅한 생각에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선은 밖을 향하고 있으면서도 여유롭게 감상에 빠져들지 못했다. 머릿속에서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잡념들이 넝쿨을 치고 있었고, 몸은 여기저기 결리고 쑤시는 것으로 장거리 이동에 저항하고 있었다. 게다가 간간이 나의 시선을 붙잡아가는 차 안의 텔레비전 화면은 죽음의 기운들로 가득했다. 일본의 대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방사성 물질 누출 공포와 리비아 사태가 헤드라인으로 보도되고 있었고, 구제역으로 인한 지하수 오염까지…. 곳곳에 드리워져 있는 죽음의 공포가 마음을 더욱 어수선하게 만들었다.


왜 그때 한 스님의 말이 생각났을까. 3년 묵언 끝에 막 세상으로 나왔다는 스님에게 한 친구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묵언으로 무얼 얻었느냐고. 그 스님은 친구의 우문에 얻는 것이 아니라 비운다고 답했다. 그 말의 울림이 컸다. 나 같은 범인이야 삶이 비운다고 해서 비워지고,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지만 그래도 적어도 분수를 알고 욕심을 버린다면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은 조용해지지 않을까.


신은 도전의 대상이 아니며, 자연 또한 극복의 대상이 아니고, 인간은 경쟁의 대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러지 못하다. 그러니 세상사, 인간사가 시끄럽고 복잡하지 않은가. 조금은 불편하고 부족하겠지만 소박한 삶을 살 각오만 있다면 훨씬 더 행복할지도 모른다.


다시 시선을 차창 밖으로 던져 놓는데, 문득 밭갈이를 하고 있는 농부가 눈에 들어왔다. 환한 봄 햇살 속에서 그는 묵묵히 춘니로 녹아드는 밭을 갈고 있었다. 그 농부의 작은 밭뿐이 아니었다. 인근의 과수원과 다른 밭들도 새로운 시작으로 분주했다. 천기와 일기를 모르면 한해 농사는 망치기 마련이다. 마음에 사심이 가득하면 자칫 실기를 하거나 천기를 잃을 수도 있는 법.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인생을 경영하면 어떨까. 물러날 때와 나아갈 때를 아는 것. 도전과 탐욕의 구분을 아는 것. 이 봄, 농부의 심정으로 그런 분별심을 길러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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