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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외롭지 않은 소녀상 / 문화일보 [2012-01-12]

忍齋 黃薔 李相遠 2012. 2. 8.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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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광장>
외롭지 않은 소녀상

문화일보 [2012-01-12] 

 은미희/소설가

 

한복차림의 단발머리 소녀. 한겨울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한곳만 바라보고 있는 그 소녀의 눈망울이 순하기 그지없다. 그 소녀는 바로 서울의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일본 군대위안부 평화비다. 그 소녀를 볼 때마다 학창 시절, 학교 교문이나 운동장 화단에 있던 독서하는 소녀상이 생각난다.

 

그 소녀는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책을 펴든 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그 석고 소녀상이 한참 꿈이 많던 시절의 내게 알 수 없는 동경을 안겨주었다면 일본 대사관 앞의 소녀상은 애틋함이나 연민, 알싸한 분노를 안겨준다. 정말, 위안부 할머니들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다. 꽃 같고, 티 하나 없던 소녀 시절! 한데 그들의 소녀 시절은 어디 가서 보상받아야 할까. 소녀 시절뿐일까. 생애가 분절되고 와해됐는데, 지금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99엔의 조롱과 무관심과, 회한과, 분노뿐이다.

 

주한 일본대사는 대사관을 드나들며 이 소녀를 볼 때마다 무슨 생각이 들까. 그게 궁금하다. 그저 불쾌하고 짜증날까? 하긴 불쾌감을 드러내며 노골적으로 철거를 요구했으니 편치만은 않을 터이다. 그런데 누군가 이 소녀의 주머니에 돈을 넣어주고, 발을 따듯하게 감싸주었다. 또 누군가는 모자를 씌워주고 목도리를 감아주었다. 그 모양에 가슴이 뭉클해지며 명치 부근이 뻐근해졌다. 그래, 세상은 아직 따듯함이 남아 있구나…, 새삼 우리 사회가 자랑스러워졌다. 저들의 손길이 있는 한 저들의 따듯함이 있는 한 우리에게 밝은 내일이 있겠구나…, 믿음직스러웠다. 더불어, 봐라! 우리는 이렇다, 드나들며 매일 그 소녀를 대면해야 할 일본대사에게 소리 없이 으스댔다.

 

그런데 그 소녀가 보는 앞에서 불 붙은 화염병이 일본 대사관으로 날아들었다. 그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다. 평화비인데, 기껏 소녀에게 목도리를 감아주고 발을 감싸주는 것으로 우리의 의사를 전했는데 화염병이라니. 화염병을 던진 이가 내국인이 아니어서 한시름 놓긴 했지만 그 역시도 위안부 할머니를 둔 우리의 피붙이였다. 그는 일본이 사과를 하지 않아서 화염병을 던졌다고 했다. 어찌 그 마음을 이해 못할까마는 소녀상에 모아진 그 따듯한 마음과 손길들은 대사관으로 날아든 화염병보다 몇 배 더 큰 힘과 울림을 지니고 있지 않던가.

 

일본대사는 대사관을 드나들 때마다 애써 그 소녀를 외면할 것이다. 누군들 자신의 부끄러움과 잘못을 매일매일 들여다보며 상처가 덧나도록 뜯적이고 싶을까…. 요시다 고조라는 일본인 목사는 평화비 철거를 요구하는 일본대사에게 양심이 있느냐며 호통쳤다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일 터. 그런 사람만 있다면 세상의 평화는 당연한 것이다. 한데 내가 아는 한 일본인이 말하길 일본에는 전통적으로 사과 문화가 발달되지 않았다고 했다. 사무라이 정신이 기저에 깔려 있는 나라라 사과는 곧 변명이 되고, 변명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 사과 대신 할복(割腹)으로 자신의 명예를 지키고 싶어한다고 했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다.

 

가나야마 마사히데라는 일본 외교관이 있다. 그는 1966∼1972년 주한 일본대사를 지냈다. 그는 늘 한국에 미안해했다. 3·1절 기념식에는 일본대사가 참석하지 않았는데, 그는 전례를 깨고 일본대사 자격으로 기념식에 참석했다. 당시 정일권 총리는 일본을 성토하다가 기념식이 끝난 뒤 그 자리에 있는 가나야마 대사를 보고는 일본대사 때문에 더 심한 욕을 하지 못했다며 웃었다고 한다. 그게 외교다. 가나야마 대사는 죽을 때 자신의 뼈 절반은 한국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 죽어서도 한국에 사과하고 싶다고. 지금 그의 유해 절반은 파주에 있는 가톨릭 묘지에 있다.

 

지금은 왜 그런 대사가 없는 것일까. 개개인의 불편한 감정을 무마시키는데도 사과는 필수적이다. 하물며 국가일수록 그런 유연한 태도는 꼭 필요하다. 아무리 숨기고 외면한다 해도 이건 엄연한 역사적 진실이고, 사실이며, 그걸 아니라고 부정한다 해서 과거가 달라질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 이 시점에 가나야마 마사히데라는 인물이 그립다.
 
 



Samuel Sangwon Lee | Create Your Ba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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