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크롬웰과 전두환
2011년 전두환의 수족 노릇을 하던 안현태 전 경호실장이 5월단체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립묘지에 기습안장을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얼렁뚱땅 비밀리에 12.12 및 5.18 학살 관련자인
백운택 (전71방위사단장),
유학성 (전국방부군수차관보),
정도영 (전보안사보안처장),
정동호 (전청와대경호실장대리),
진종채 (전2군사령관),
소준열 (전전투교육사령관) 등, 총 7명이 국립묘지에 안장되어 있다고 하는군요.
마치 영국의 군부 독재자 "올리버 클롬웰'과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국판으로 보는 느낌이 드는 건 저만의 생각일까요? 여러분 중에는 살인마 전두환을 “역사가 심판한다”며 비겁한 역사타령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을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말입니다. 사람인 우리가 살인마 전두환을 심판하고 그것이 기록되는 것이 역사이어야지요.
과거 독재아래 혹자들이 위안삼아 자조하던 “역사가 심판한다”라는 말을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라는 어떤 절대자가 구름을 타고 나타나 살인마 전두환에게 벼락을 내리친다는 걸 믿는거나 마찬가지일겁니다. 과거 잉글랜드의 헨리8세가 왕으로 있을 때 카톨릭 수도원을 해체하면서 개신교도인 칼뱅주의자 중에는 그 수도원들을 헐값에 불하받아 상당한 재산을 축적한 사람들이 생겨 납니다.
1599년 4월 25일에 테어난 ‘올리버 크롬웰’의 부모가 바로 그 신흥 부동산 부자였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은 자연스럽게 카톨릭과 성공회에 반감을 가지는 삶을 살아 갑니다. 18세에 부친이 죽고 가세가 기울자 이것도 군주제의 잘못으로 받아 드리고 오랜기간 의회정치에 발을 들여 놓으며 군주제와 맞서 싸우기 시작합니다.
1641년 칼뱅주의를 부각시키는 종교개혁적 내용의 ‘대간의서’를 의회에 제출하며 그것이 통과되지 않으면 자신이 잉글랜드를 떠나 돌아오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습니다. 하지만 ‘올리버 크롬웰’은 ‘대간의서’가 부결되자 잉글랜드를 떠나는 대신, 1642년 ‘청교도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영국내란’의 선봉에 섭니다.
1643년 의회군을 조직하여 높은 급료를 주어 가며 충성을 강조한 정예군을 만들어 무장을 합니다. 1644년엔 스스로 대령에서 중장으로 진급하며 총사령관인 맨체스터백작에게 항명하고 또 스스로 부사령관에 취임합니다.
‘올리버 크롬웰’은 스스로 잉글랜드와 스코트랜드 양쪽 왕국의 의회의원이자 의회군 부사령관을 겸직하며 무시무시한 군부 독제를 펼칩니다. 1647년 ‘올리버 크롬웰’의 폭정에 겁을 먹은 찰스1세가 스코트랜드로 야반도주를 합니다.
무력으로 잉글랜드-스코트랜드-아일랜드를 평정한 ‘올리버 크롬웰’은 찰스1세를 처형합니다. ‘올리버 크롬웰’은 자신의 잘못을 희석시키고자 수많은 귀족들을 자신의 정치에 끌어 들이고 줄줄이 높은 자리에 앉힙니다. 그사이 1650년 스코트랜드에서는 찰스2세를 왕으로 승인합니다.
1653년에는 의원들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자신의 군대를 동원해 해산하고 자신이 지명한 사람들을 의원으로 만들어 새로운 의회를 구성합니다. 그 꼭두각시 의회에서 ‘올리버 크롬웰’ 자신은 잉글랜드-스코트랜드-아일랜드를 통치하는 ‘호국경(Protectorate)’에 취임합니다.
입법-사법-행정권의 장악만으로 성이 차지 않아 하다 못해 옥스포드대학의 총장까지 겸임을 합니다. 자신은 옥스포드대학 시드니분교 1학년을 다닌 학력이 전부인데 말이지요.
어마 어마한 독제자가 된거지요.
전두환과 비슷하다 할수 있을 겁니다.
1654년부터는 경제난 타개를 부르짖으며 식민지 전쟁에 뛰어 듭니다. 그때가 동인도 척식회사(East India Company)를 통해 인도의 착취가 극에 달했던 시기이기도 하지요. 1655년엔 자신이 지목한 의원들의 꼭두각시 의회마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산을 시킵니다.
‘올리버 크롬웰’의 말로가 다가옴을 예견하게 만들지요. 1658년에도 같은 이유로 또 의회를 해산합니다. 그리고 그해 8월 자신의 딸이 암으로 죽고 ‘올리버 크롬웰’도 말라리아에 걸려 9월 3일 3시에 화이트홀에서 59세의 나이로 죽습니다.
1658년 11월 10일 ‘올리버 크롬웰’의 마지막 추종자들에 의해 웨스트 민스터 묘지에 비밀리에 묻히고 13일 뒤에 국장이 치루어 집니다. 이때에 스코트랜드에서는 이미 1650년부터 왕으로 인정된 찰스2세가 돌아와 왕정이 복원하고 있었습니다.
‘올리버 크롬웰’은 죽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그자의 추종자들이 생전의 ‘올리버 크롬웰’의 치적을 문서로 만들고 기를 쓰고 죽은 독재자를 미화하며 방어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미화작업은 역부족이었습니다.
3년뒤 1661년 성난 주민들이 웨스트 민스터 묘지로 몰려가 ‘올리버 크롬웰’의 묘지를 파 헤치고 그의 시신을 꺼내 교수대에서 목을 벱니다.
시신의 몸둥이는 교수대 아래에 묻고 머리부분은 웨스트 민스터 홀 맨꼭대기에 찰스2세 집권 말까지 내걸렸답니다.
죽은자의 시신을 그자의 살아 생전의 죄값을 물어 처형하는 것을 ‘부관참시’라고 합니다.
서구인들에게 배울 점 하나가 그들 스스로 역사를 쓰는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도 살인마 전두환에 대한 처형을 확실히 하여야 합니다.
‘역사’가 살인마 전두환을 심판하는게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들이 살인마 전두환을 처형하여 ‘역사’에 기록하여 후세에 본이 되게 하여야 하는 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래서 한국의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께 호소합니다.
국립묘지에 기습안장된 12.12 및 5.18 학살 관련자 7명을 이장하여야 합니다.
얼렁뚱땅 기습안장한 12.12반란 5.18학살 관련자 7명을 이장하여야 합니다.
1. 백운택-71방위사단장-서울 현충원
2. 유학성-국방부군수차관보-대전 현충원
3. 정도영-보안사보안처장-대전 현충원
4. 정동호-청와대경호실장대리-대전 현충원
5. 진종채-2군사령관-대전 현충원
6. 소준열-전투교육사령관-대전 현충원
7. 안현태-청와대경호실장-대전 현충원
5.18 학살의 주모자들을 국립묘지에 안장하겠다는 건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고 일본이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것만큼이나 후안무치한 행위입니다.
감사합니다.
http://cafe.daum.net/80518 노란장미 드림
반응형
'0. 韓山李氏 > _082_五.一八'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한권의 책: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나와 너(Ich und Du)] (0) | 2013.11.04 |
---|---|
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나와 너(Ich und Du)> (0) | 2013.02.15 |
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와 오징어 땅콩 (0) | 2012.03.21 |
크롬웰과 전두환 (0) | 2011.10.11 |
광주에 온 5ㆍ18 카페 '80518' 설립자 美 거주 이상원 씨 (0) | 2010.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