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부버(Martin Buber)의 <나와 너(Ich und Du)>
철나던 시절, 대학시절 처음 접했을 때의 그 감동이 이제는 남아 있지 않치만, 내게 “인간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인가를 성찰 시킨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독일의 (정확히 말하면 이스라엘의) 철학자, 마르틴 부버 (Martin Buber) 가 쓴 Ich und Du (나와 너) 라는 책입니다. 지금은 작고하고 계시지 않치만, 독일과 불란서에서 공부하셨던 박도식 신부님이 독일어로 된 원서를 주셔서 읽었는데 비교적 쉽고 이해하기 좋았던 책입니다.
나중에 한국말로된 번역서를 읽어보니 너무 어려워 오히려 한글 번역서를 보았다면 나는 그 책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체 살아가고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나에겐 “위대한 나”와 “비참한 나”가 있다는 이야기인데 명쾌하게 인간을 이해 할 수 있었답니다.
이 책은 내게 인간이 무엇이고 인생이 무엇인가로 고민할 시간을 줄여준 책이었고, 보다 일직 접했다면 좀더 멋진 삶을 살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책입니다.
일독을 권하면서, 더 나이 들어 그 감흥이 다 사라지기 전에 잠시 나의 20대로 돌아가 다시 정리 할 겸, 미리 내가 읽고 접 했던 인간과 인생에 대해 설명하고자 합니다.
<마르틴 부버의 삶>
1878년에 오스트리아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마르틴 부버는 독일에서 성장하며 학교를 다녔고, 그 후 나치당에 의해 추방 당한 뒤 이스라엘에 정착하여 대학교수로서 후학들을 가르치며 일생을 보냈습니다. 미국 등 UN이 이스라엘을 승인하자 유태인들은 팔레스타인들을 몰아내고 팔레스타인들이 살던 집을 접수하여 살기 시작했지요.
공교롭게도 마르틴 부버가 접수하여 산 집이 '에드워드 사이드 (Edward Said)' 의 집입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늘 기회 있을 때 마다 유태인의 팔레스타인 탄압의 예로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1935년 예루살램에서 태어나 2003년에 사망하기 까지 프린스턴 대학을 나온 영문학자로서, 문학평론가로서, 그리고 어린 시절 이스라엘 병사에게 돌을 던지는 팔레스타인 전사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분이지요. 1978년 제국주의적 서양 위주의 사고방식을 비판한 '오리엔탈리즘'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던 분이기도 하고요.
마루틴 부버는 이스라엘에서 대학교수로 1965년 생을 마감하면서 아랍인들에 대한 반성으로 아랍계학생 장학금을 만들도록 유언을 남기기도 했답니다.
<나와 너>
인간과 인생에 대한 냉철한 이해를 <나와 나>, <나와 너>, <나와 그것>으로 대비하여 설명 함으로써 인간과 인생의 접근을 용이하게 만들었지요. 그 덕에 천주교, 개신교, 유대교 하다못해 불교에서 까지 마르틴 부버의 <나와 너>를 인용하여 교리를 설명하곤 합니다. 하여 많은 천주교신자는 마르틴 부버가 신부님인 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개신교에서는 마르틴 부버가 목사님인 줄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더군요.
나는 많은 사람들이 이해했던 <나와 너>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이해하였기에 많은 부분 다른 이해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말하고 넘어갑니다.
<나와 나>
나에겐 <위대한 모습의 나> 그리고 <비참한 모습의 나>의 모습이 있습니다.
<위대한 나>
우선, 세상에서 나만 가장 잘난 고귀한 모습으로 탄생한 필연적인 나의 위대한 모습이 있습니다. 때론 태몽으로 주위의 온갖 축복 속에 태어나 세상에 나의 존재를 큰 울음으로 알린 고귀한 존재이지요.
그리고 삶의 주인공으로서 고귀한 나만의 색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걸음 한걸음 조차도 내 삶이라는 거대한 휴먼드라마의 주인공으로서 기품 있게 걸어가려고 스스로 마임을 정하기도 합니다.
또 세상이라는 극장 속에서 나 이외의 삶을 처다 보는 유일한 관객이기도 하지요. 나의 논평과 나의 인지만이 유일한 세상극장의 평가 물일 뿐이지요.
마지막으로 신이 있다면 그 신이 나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이자 가장 큰 실수이기도 한 것이 나의 자유로운 사고입니다. 나는 내 스스로 그 어떤 사고를 하여도 되는 유일한 절대자입니다. 나는 내 사고 속에서 그 누구를 범하여도 되고 차마 입으로 표현 못할 상상을 하여도 됩니다. 정말 위대하고 고귀한 나 않인가요?
<비참한 나>
허나 즐거워 할 수 만은 없군요.
우선, 나는 어쩌면 나의 부모들의 일순간 동물적인 성적 환락의 부산물일수도 있습니다. 나는 어쩌면 기대되지 않은 예기치 못한 존재일수도 있습니다. 살면서 '저게 왜 태어나서 ......' 내지는 '이럴 라면 왜 날 만들었냐 ......' 라는 식의 비참한 말들을 쏟아 냈을 수도 있는,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아주 우연적인 비참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하긴 내가 한 순간에 없어진다 해도 세상은 변함없이 돌아갈 것이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열심히들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삶의 주인공인줄 알았던 나는 피동적이고 눈치를 보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비참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며칠만 호젓하게 사라져도 내 주위의 사람들은 분명 가출신고를 낼 것이고, 직장에서는 무단 근무지이탈 등으로 엄청난 재제조치가 가해질 겁니다. 80518 회원 여러분들만 하여도 이제는 이 노란 장미에게서도 자유롭지 못하시지요^^
또 수많은 눈들로 인하여 나는 제약 받고 절제되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자유롭고 싶다고 나체가 되어 길거리에서 날뛰면 분명히 정신병원이든 파출소든 격리조치가 취해지겠지요. 그리고 철저히 다른 주인공들을 위해 나는 죽어라 처절한 조연만 연출하여야 하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는 나의 사고와 그 표현조차도 구속 받고 있는 비참한 존재입니다. 나는 그리스 신화를 들먹이며 나의 위험천만한 사고를 오이디프스 컴프랙스나 엑랙트라 컴프랙스로 위장하여 거창한 기만을 떨지 않고서는 금단의 선을 사고에서 조차 넘을 수 없는 비참한 존재라는 겁니다.
<인생>
우리 인간은 거창한 태몽을 가지고 태어났어야만 했던 필연적인 존재이며 언제나 돋보이고 주목 받는 주인공이며 나의 평가가 언제나 무한히 미치는 아주 자유로운 사고를 지닌 모습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늘 ‘내가 왜 태어나서?’를 읍 조리는 우연적 태생의 존재로 피동적으로 이곳 저곳 눈치를 보며, 늘 들러리 서듯 조연으로 살아가며, 함부로 생각조차 하지 못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는 이 삶 자체가 인생이지요.
<나와 너>
위대한 나의 요소들을 인식할 때 위대한 너가 있음을 느끼게 되고 위대한 나를 구하듯 위대한 너를 받아드리는 것이 인간인 내가 또 다른 인간인 너와의 대비된 관계 속에서 조화롭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겠지요.
<나와 그것>
나만이 오직 그 위대한 필연적인 존재성을 가져야 하고
나만이 오직 그 위대한 주체적 삶의 주인공이어야 하고
나만이 오직 그 위대한 평가를 남발할 수 있는 유일한 세상 관객이어야 하고
나만이 오직 그 위대한 자유로운 사고를 얼마든지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런 나에게 있어 너는 존재할 수 없고
오직 보잘것없는 그것만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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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80년 한국에서,
전두환에게 <나와 너>의 관계가 있었다면 5.18의 학살은 없었을 겁니다.
전두환에게는 자신만이 위대하고 싶었던 <나와 그것>의 관계만 있었기에
금남로 에는 창자가 터지고
둔부가 날아가 뇌수가 흐르는
<그것>들의 시체가 널 부러져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한국에서
우리 모두는 무슨 무슨 사고로 한두 명쯤 죽었다는 소리쯤에는
눈 하나 꿈쩍 않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전염병처럼 번지고 말았지요.
<나와 너>의 관계가 회복되어
인간이 인간답게
서로의 위대한 모습을 존중하며
온전한 인생을 구가하는
그런
한국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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