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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은미희의 마실] 지켜진 약속은 눈부시다 / 국민일보 [2011.03.30]
하지만 무어 그리 바쁜지, 지난 학기 내내 나는 수업이 끝난 후 학우들이 갖는 티타임과 같은 간단한 자리에도 동참하지 못했다. 그들은 가끔 학교 앞 음식점과 찻집에 모여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고, 논문준비와 여러 가지 정보를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냈던 모양이다.
가만 생각해 보니, 열심히 산다는 이유로 그간 나는 삶에 있어 자잘한 재미와 타인에 대한 배려 같은 것은 제대로 챙기고 살지 못했다. 차 한잔의 시간도 소중할 터인데, 그걸 하지 못한 것이다. 누군들 사는 일에 여유를 부리며 살겠는가. 한데 나만 유독 힘들다는 티를 내고 있지는 않은지, 내 자신을 돌아보았다.
어떻든 신학기가 시작된 강의실에는 새로운 얼굴이 많이 보였다. 학부과정이 아니다보니 연령대도 다양했고, 하고 있는 일도 저마다 달랐다. 수업이 끝난 후 새 얼굴도 익힐 겸, 학교 앞 음식점에서 간단히 요기하기로 했다. 그 자리에 마음먹고 나도 동행했다. 학부과정을 마치고 바로 올라온 친구도 있었고, 직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새롭게 공부를 시작한 친구도 있었다. 이유와 목표는 달라도 한자리에 모인 친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금방 친해졌다.
그 가운데 한 친구가 있었다. 지난 학기로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모두 이수하고 논문만 남겨놓고 있던 친구인데, 그냥 청강하러 나온다고 했다. 20대 후반의 그 친구는 몇 번 같은 과목을 들었던지라 얼굴이 익었다. 게다가 조교였던 그에게서 나는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소설가가 꿈인 그 친구는 소설 쓰는 솜씨도 괜찮았다. 어쨌거나 그 친구는 시골에서 자세깨나 하는 집안의 장남이자 장손이었는데 소설을 쓴다는 이유로 집에서는 경제적 보조를 끊은 모양이었다.
하여 그 친구는 힘겹게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다. 학비는 조교 생활로 충당하고, 방값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는 하루도 마음 편히 놀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 친구는 밝고 긍정적이며 힘듦을 자신의 내공으로 치환시킬 줄 아는 멋진 친구였다. 왜소한 몸피에, 순한 눈빛을 지닌 그 친구는 지나온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으면서도 남의 이야기를 하듯 그렇게 웃으며 심상하게 이야기했다. 노래방, 실내 낚시터, 오토바이 배달, 피자가게…그 친구가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였다. 한데 그 친구 말이 의외였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할 때 시골출신이라면 더 묻지 않고 일자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뭐냐고 묻는 학우의 말에 그 친구는 대답했다. 순진하기 때문이라고. 순진의 기준이 무얼까. 나는 궁금했다. 꼭 시골출신이라서 순진한 것은 아닐 터. 순진함은 천품일 수도 있을 텐데.
그는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줬다. 그러니까 노래방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데, 전임자가 주인을 속이는 법에 대해서 가르쳐줄 테니 그저 얻는 소득은 나누자고 했다고 한다. 그 친구는 단번에 거절했노라고 했다. 그 친구가 시골출신이어서 때가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원래 그 친구의 천품이 정직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마음은 서늘해졌다. 왜 우리는 약속을 쉽게 저버릴까. 주인이 그 친구를 믿고 가게를 맡겼으니 일종의 약속관계이지 않겠는가. 정직함은 더 큰 상급으로 돌아오나니 당장에 얻을 수 있는 작은 이익보다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서로가 신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할 터.
약속이 잘 지켜지는 사회는 내일에 대해 예측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살기가 쉽다. 혼돈과 무질서의 세상에서 살고 싶은 이가 누가 있을까. 그러니 자신부터 먼저 사소한 것이라도 지켜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약속을 지키는 일은 쉬우면서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 봄, 작은 이익 앞에서 단호히 싫다고 말한 그 친구의 소신 있는 신의가 더 눈부시게 다가온다.
은미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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