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平和小論

忍齋 黃薔 李相遠 2013. 4. 17.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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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和小論


 이 상 원 (요셉 사무엘)


언제나 자신을 앞세우려는 사람, 자기 욕망에 사로 잡혀서 살려는 사람, 자기만을 혹은 자기가정이나 파벌만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사람이나 자기것만을 찾으려는 사람을 볼때, 다른이로 부터 악의에 찬말, 증오, 부정, 무관심, 학대나 욕설을 들을때, 그리고 자기자신을 남에게 솔직히 터 놓을 수 없다고 느낄때는 한없는 분노와 고독감으로 마음이 흐트러지게 된다. 

 

또한 거듭 거듭 노력해도 끝내는 실패로 돌아가 기대가 완전히 어긋난 데서 오는 고통을 느꼈을때, 해야할 일을 끝맺지 못해서 우울감을 느꼈을때, 학문적인 탐구가 막다른 상황에 부닥쳤거나 몇년동안의 노력이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 애석함을 느꼈을 때도 마음의 안정은 가차없이 무너지고 만다.  더구나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스스로 꾸며낸, 대자연에서부터 떨어진 인공적 세계에서는 안이함을 누리고 감각마저도 정보의 홍수로 인하여 많은 자극과 심한 압박을 받아, 바쁜 생활로 여유를 상실하고, 될수 있는 한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자연의 아름다움까지도 사진기로 찍어서 사진첩에 챙기고 감미로운 음악마저도 녹음기에 담아서 보관상자에 보관함으로써 정서적인 것조차 소유물로 축적하여 마음마저 메마르고 차갑게된다.  결국 현대인이라 지칭되는 이 시대를 사는 많은 수의 사람들은 환각제나 성과 폭력, 조작된 위기감으로부터 파생되는 주위의 무수한 슬픔과 고통, 모순등 극도의 권태감으로 ‘존재에는 의미가 없다’라는 식의 착각까지 들게 된다.

 

결국 이러한 것들이 작게는 마음의 평화를, 크게는 사람들간의 모든 평화를 위협하고 혼란과 갈등 속으로 몰아가고 심지어는 참 평화를 추구하는 신앙인에게 - 조미료를 남용한 음식에 익숙한 사람이 순수한 음식은 맛이 없어 먹을 수 없듯이, 음의 양이나 리듬의 과도한 자극때문에 보다 깊은 데서 울려주는 음악에 대한 감수성을 상실해 버리듯이 - 하느님과의 일치가 진정한 평화임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우려의 관점에서 평화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것은 가치있는 것이고, 신앙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세이다. 


평화는 히브리어로 ‘샬롬’이다.  이는 최고의 행복을 뜻하는 것으로 대자연과의 조화이며 사회와의 조화, 마음의 안정, 더 나아가 하느님과의 깊은 일치를 의미한다.  성서에서 제시하는 평화에 대한 메시지들을 들어보면 그 의미는 더욱 확실해진다. 

 

미사전례에서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주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주는 것이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르다. 걱정하거나 두려워 하지말라. (요한 14:27)’라든가,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기를 바랍니다.  그러하려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된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골 3:15)’, ‘태평천하일세, 태평천하일세, 멀리도 가까이도 태평천하일세. (이사 15:19)’,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에게 평화.’,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 ‘모든 나라 백성에게 평화를 알린다. (즈가리야 9:10)’등은 평화의 중요성을 웅변해 주고 있고 하느님이 ‘평화의 계약 (에페 34:25)’을 맺으시는 것이나 구세주가 ‘평화의 임금 (이사야 9:5)’이라 칭하는 것, ‘그는 평화이다. (미가 5:4)’라고 단정짓는 것을 볼때 진정한 참 평화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하느님과의 일치에서만 구할수 있고, 그분이 약속하신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평화는 그리스도교의 진수로서 하느님을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 (고린 13:11)’이라 지칭하며 예수님의 활동을 ‘평화의 복음 (사도 10:36)’이라 한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화였다. (에페 2:14)’를 그리스어 원문으로 직역하면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가 된다. 

 

모짜르트의 미사곡 ‘야뉴스데이’란 말로 시작되는 ‘평화의 찬가’ 첫부분에는 ‘세상의 죄를 없애신 천주의 어린양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라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여 죄책감에 억눌린 사람의 슬픔을 나타내고 끝부분에는 ‘우리에게 평화를 주소서’하면서 곡의 리듬이 갑자기 밝아지며 안단데에서 알레그로로, 단조에서 장조로 변하며 아이들이 기뻐 뛰놀며 부르는 대합창처럼 평화를 찬미하고 있다.


결국 성서는 평화를 하느님께 청원하는, 구원에 버금가는 기도를 내용으로 하고 예수의 제자들은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마태 5:9)’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욕망과 교만, 몰이해, 노여움 등으로 가중되는 예수님의 눈물과 슬픔 앞에 참회의 기도를 통해서 평화를 구하고 계속되는 평화를 통해서 구원 받아야 한다. 

 

그러나 평화를 구하기가 생각처럼 쉬운 것은 아니며 현학적인 신앙으로는 더우기 누릴 수 없게 된다.  모짜르트가 죽기 전날에 완성시킨 최후의 작품인 죽은이를 위한 미사곡 ‘레뀌엘’ 에서 노래하듯, 그는 평화를 갈구하여 만족치 못함은 ‘죄지은 사람이 심판을 받으러 어둠속에서 부활하는 그날이야 말로 눈물의 날’ 이기 때문이라고 피력한다. 

 

그럼, 평화를 구하려는 기본자세는 무엇인가?  친한 친구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나, 서로 터 놓고 믿을 수 있는 깊은 우정, 자기를 소중히 아껴주는 사람을 갖는다는 기쁜 체험은 우리로 하여금 무척 평온한 마음을 갖게 해준다.  바로 그런 마음이 평화스러움의 첫단계이고 성급함이나 불쾌감을 버릴 수 있는 바탕이 된다. 

 

평화롭게 됨으로서, 오직 자신을 뛰어 넘는 위대한 자만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인간다운 인간을 형성케 해주는 그 움직임을 몸에 내 맡길 수 있게 되고, 서둘러서 일하면 그일이 잘되기란 극히 드물기에 언제나 조심성 있게 평화와 친절로서 행동해야 된다.


1500년전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세속적인 쾌락을 체험하기 전에는 한사코 그것을 바라지만, 체험한 뒤에는 그것이 허무하기 짝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영적인 기쁨은 체험하기 전에는 볼품없는 것으로 느끼나 체험한 사람은 그것을 열심히 추구하게된다.’며 참평화의 가치를 설파했다. 

 

요한 바오로 1세도 신문기자들에게 행한 최초의 알현시에 ‘정의와 평화와 사랑의 세계를 이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올바른 보도로 인해서 사람들이 서로 가까와지고, 정의, 평화, 형제애에 대한 서로간에 사람들이 나누는 정신을 갖고 서로 이해하며 연대감을 갖는데는 신문기자들이 큰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하므로서 평화를 지향하는 신앙적 차원 뿐만 아니라 이해관계가 얼키고 설킨 속세적 영역조차도 평화가 다른 지상명제들과 더불어 중요함을 피력했다.

 

평화속에서 주위 사람들을 모두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느꼈다는 그 자체야 말로 인간관계를 잘 조정하는 비결이며 사람을 사랑하시는 평화의 하느님 눈으로 보는 것이다.  끝으로 참 평화의 의미를 잘 음미해 볼 수 있는 ‘평화’라는 시 한편을 소개하면서 천주교에서 보편적으로 주장하는 평화에 대한 작은 논의를 마무리 한다.


평화


불가사의한 조화 속에서

온갖 질서에도

한 집안끼리 팽팽히 맛서 싸우는 긴장

마음 속의 깊은 확신을 나는 알고 있누나.

산다는 것은 이토록 놀라운 일!

슬프게 하는 온갓 것도 필요한 것임을 ...

참된 행복은 하느님앞에 나아가는 것

그러기에 죽음도 아름다운 것임을 ...

평화란 이 모든 것을 아는 것

이것을 알게 하는 위대한 것은

바로 하느님 말씀을 찾는 것

밖에 심한 폭풍이 휘몰아 치더라도

무수한 폭탄이 작열하더라도

결코 헤매는 일 없으리다.

마음의 고요

이것이 평화의 시작임을 ...

마음의 고요

아!

하느님 당신만이

참된 평화를 주시는 분이어라.

주여! 

과거의 나를 용서하시고

현재의 나를 거룩케 하시며

미래의 나를 평화로이 이끌어 주소서.

아멘.  

 †


http://blog.daum.net/enature/15851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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