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11_小說家殷美姬

[문화일보 오피니언 살며 생각하며] 책이 주는 즐거움 / 2015년 05월 01일(金)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5. 1.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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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미희 / 소설가


봄볕 환한 날에 소설을 쓰는 동료들을 만났다. 지천이 꽃들인 시절, 꽃 마중하듯 친구들을 만나러 갔다. 꽃 진 자리에 돋아나는 연록의 이파리들도 꽃처럼 곱다. 그 봄볕에 아마도 내 얼굴은 도홧빛으로 달아올랐거나 내 마음은 연록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봄볕과 꽃들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나는 그렇게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이는 욕망을 꽃그늘에 부려놓은 채 그렇게 자연 속에서 한가하고 게으르게 살아도 좋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봄볕과 그 연두의 세상이 나를 평화롭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간 자리였다. 봄볕 환한 날에, 오랜만에 소설을 쓰는 동료들을 만나러 가는 길은 그렇게 봄볕이 환했고 폭죽처럼 꽃들이 피어났고, 사방이 연두로 물들어 있었다. 하긴 그 자리가 환한 자리였다. 친하게 지내는 한 소설가가 책을 냈는데, 축하해 주러 가는 자리였으니 어찌 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작가 생활 삼십일 년째. 그 작가는 한동안 여러 가지 일로 상심했었고, 더불어 심각하게 절필까지 고민했었다. 동병상련이랄까, 그 작가의 고뇌가 남의 일 같지가 않아 내내 내 마음도 아팠었다. 한데 꿋꿋하게 그동안 발표한 단편들을 모아 책으로 묶었고, 그 안에 실린 작품들에서 작가의 내공을 확인할 수 있어 마음이 저릿하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책을 읽지 않는 시절에 책을 내는 그 정성과 용기가 가상하고, 애틋하다. 게다가 삼십일 년. 사람으로 치자면 청년으로 성장하는 시기이고, 육십 년 환갑의 딱 절반에 해당하는 시간인 셈이니 참으로 대단하달 수밖에. 흔히 천형으로 비견되는 소설 쓰기의 그 고된 작업과 외로운 길을 삼십일 년 동안 걸어왔으니, 그 삶이 얼마나 아프고, 힘들고 외로웠을까. 나는 진심으로 내 일처럼 기뻐해 주었고 축하해 주었다. 나도 그이처럼 그럴 수 있을까. 삼십일 년 차 되는 해에 저렇듯 푸른 기운으로, 저렇듯 꽃 같은 환한 얼굴로 책을 세상에 내놓을 수 있을까. ‘우연한 생’, 책 제목처럼 내용도 웅숭깊다.


한데 그날 모인 동료들의 표정과 모습이 예전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이삼십 대의 열정적 시기와 청춘을 건너왔으니 그만큼 눈빛과 표정은 깊으면서도 차분하고 태도는 진중해졌을 것이다. 가만 헤아려보니 이 동료들의 얼굴을 보고 함께한 지가 벌써 이십 년 가까이 되었다. 한창때는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뜨겁게 충돌했는데 언제부턴가 화제와 관심사가 사뭇 달라지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문학에 대한 올곧은 애정은 물론이고, 본인들의 아슬아슬한 생의 모험담이 주를 이루었는데, 언제부턴가 아이들 문제로 기울더니 이제 건강 문제와 이후의 삶에 대한 걱정이 주가 되었다.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치열한 생을 살아냈고, 치열한 만큼 생의 무상함과 비의를 깨우쳤다는 방증이기도 할 터이다. 숭고하면서도 반면에 별거 없다는 그 모순의 삶 말이다. 게다가 변화는 얼굴에서도 감지되었다. 옛날에는 날 선 눈빛과 함께 이마에서 빛이 났는데, 요즘에는 얼굴 어딘가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차분해졌다. 그만큼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어딘지 풀도 조금씩 죽어 있는 듯했다.


하긴 책이 홀대받는 시대에 작가로 살아가고 있으니 신명이 날 이유가 있을까. 베스트셀러 작가건 아니건,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작가로 살아가는 것이 꼭 편치만은 않을 터이다. 그래도 예전에는 책을 읽지 않으면 스스로 부끄러워했으나 요즘에는 너무나 당당하게도 책을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힌다. 심지어 ‘책따’라는 말까지 등장했으니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참으로 민망하고 당혹스럽다. ‘책따’란 책을 읽는 직원이나 친구를 따돌린다는 신조어인데, 이제 책을 읽으려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읽어야 하는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정말 주변에 책은 넘쳐 나지만 책을 읽는 이는 없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꽃놀이하러 나온 사람으로 만원을 이루지만 서점은 한가하기만 하다. 하긴 세상에 재미있는 소일거리가 많으니 어찌 책에 시선이 갈까. 그에 못지않게 책에도 아름다운 세상이 있고, 재미있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보지 않고 읽지 않으면 절대 만날 수 없는 세상이 바로 책 속에 있는 것이다. ‘돈키호테’나 ‘햄릿’이나 ‘조르바’는 책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매력적인 인물들이다. ‘반지의 제왕’과 ‘해리포터’의 세상 역시 책 속에 들어 있는 근사하고 멋진 신세계인 것이다. 꿈으로만 간직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도, 세상을 구하는 영웅들의 모험담도 책 속에서 가슴 졸이며 볼 수 있는 것이다. 책이 주는 보물이 어디 그뿐이랴. 우리를 보다 더 지혜롭게 만들어주는 것도 책이고, 현명하게 해주는 것도 책이며, 우리를 향기롭게 만들어주는 것도 바로 책이다. 책을 통해 우리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자신을 만날 수도 있다.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을 나열하면 얼마나 될까. 멋진 상상력을 선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너머 다른 세상을 선물해주는 것도 바로 책이다.


그러니 어찌 책을 읽지 않을 수 있을까. 독자들을 매혹시키지 못한 책임감을 작가에게 묻는다면 지천에 붉은 영산홍 꽃송이 하나 입에 무는 것으로 대신할 뿐, 뭐라 변명할 수 있을까. 독자들을 매혹시킬 만한 글. 독자들을 다시 책의 세상으로 끌고 올 수 있는 그런 글. 과연 나는 그런 글을 쓸 수 있고, 독자들을 다시 책의 세상으로 불러들일 수 있을까.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안중근 의사의 책에 대한 애정이 속절없이 흘러간다. 이 봄에. 이 환한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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