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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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의 딸 용담할미(1회) - 어마 돌나물이 신기하네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8. 1.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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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미인 고은광순 선생님은 소설가로 우리 앞에 등장했습니다. 읽어보니 흥미진진 합니다. 어쩌면 토지나 혼불에 버금가는 대하소설이 되는건 아닌지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하여 고은광순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그분의 소설을 연재합니다. 활자화된 책으로 나올때 까지 이곳에서나마 갈증을 풀어보기 바랍니다. [퍼와 편집한 이 주]


1. 어마돌나물이 신기하네 

 

여섯 살 윤이

겨우 휘몰아던 칼바람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더니 북쪽의 흰봉산과 도솔봉에 더 많은 햇살이 머무르고 높은 하늘에서 새소리가 살아나기 시작했다집 뒤의 삿갓봉에서는 다다다다닥 부지런한 딱따구리가 새 집을 장만하는 모양이다.

나뭇가지에 물이 올라 연두색으로 변해가고 지난 가을부터 가지 위에 쌀알만 하게 달려있던 눈이 커지기 시작했다봉오리의 노랑 빛이 진해지더니 개나리가 피었고 분홍빛이 진해지더니 진달래가 폈다.

날씨가 따듯해지자 윤이는 부쩍 밖에 나와 노는 시간이 많아졌는데 김 씨는 마당 한쪽의 흙을 손가락으로 헤치며 윤에게 와서 보라고 했다김 씨가 흙을 헤친 곳에는 연두색 싹이 뾰족이 드러났다.

아아...”

윤이는 그 뿐입을 벌리고는 동그란 눈으로 김 씨를 쳐다보았다

?”

얼마 전까지도 여기에 눈이 있었는데...”

빨래터 큰 바위 옆 소나무도 이렇게 조그맣게 시작했단다.”

어엉저 큰 나무들도 이렇게 작게 시작했던 거라구요?”

그럼!”

아웅... 세상에... 그렇구나!”

 

그러고 보니 울타리 밖 양지바른 곳에도 이미 흙 위로 돋아난 싹들이 지천이었다.

내일이라도 윤이랑 나물을 뜯으러 성지골이나 구지막골로 가 볼까 봐요.”

연화가 파를 다듬다가 일어나 치마폭의 흙을 털며 말했다.

그래 배나무골이랑 생양재에도 참나물취나물고사리 따위가 많이 난다더라.”

엄니그런데 윤이는 다른 애들이랑 참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연화는 열네 살이나 어린 동생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너 닮지 않았느냐?”

 

김 씨는 연화를 보고 미소 짓다가 가는 한숨을 내쉬었다.

배연화최덕기(아명 솔봉묘비명 봉주), 최윤...

모두 자기가 낳은 자식이다김 씨는 연화 아버지 배 서방과 살던 때를 떠올렸다.

배 서방은 부모 때부터 영월 윤진사의 노비였다.

김 씨는 농민의 딸이었지만 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져 농사를 못 짓게 되자 경신년(1860)봄에

딸이라도 굶지 말라며 윤진사네 노비 배 서방에게 인연을 맺어주었다.

배 서방은 외거노비로 살 수 있도록 청을 넣어 가까운 곳에 나가 살게 되었다.

삼년 동안 아이 소식이 없더니 4년째에 아기가 들어섰고

갑자년 (1864) 정월에 드디어 딸아이가 태어났다.

배 서방은 기다리던 아이여서 그랬는지 시도때도 없이 들여다보며 예뻐하였다.

아기 우는 소리가 들리면 하던 일을 제쳐놓고 뛰어와 아기를 안고 나갔는데

여름에 연꽃이 만발한 연못으로 데리고 나가면 아기는 울음을 멈추고 깔깔대고 웃었다.

아기 이름을 연화로 지은 까닭이다.

몇 해 전 윤진사는 중국에 다녀오는 역관에게서

뜨거운 여름에도 덩굴을 따라 꽃을 피운다는 귀한 나무를 선물 받았다.

능소화나무라고 했다.

몇 년은 잎을 피워 덩굴을 올리더니 3년쯤 되자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봄꽃들이 우르르 폈다가 다 지고 푸른 나뭇잎조차 축늘어지는 뜨거운 여름이 되었는데

과연 능소화는 제 철을 만난 듯이 꽤 커다란 주홍색 꽃을 탐스럽게 피우던 것이다.

윤진사는 집을 찾는 손님들에게 중국 황족들이 즐기는 꽃이라며 거들먹거렸다.

연화의 재롱이 점점 늘어날 때쯤,

배 서방은 꽃을 좋아하는 딸을 위해 봄에 능소화 줄기 하나를 베어다가

울타리 밑에 심어 두었다.

줄기가 점점 자라나 연화가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꽃이 피기 시작하더니

이듬해에는 울타리를 쑥 넘어올라 꽃이 피었다.

연화는 아침에 눈을 뜨면 문을 열어 꽃부터 보려들었고

딸의 웃음에 배 서방의 입은 귀에 걸렸다.


어느 날 윤진사가 말을 타고 시회에 다녀오다가

배서방네 울타리 위로 핀 능소화를 보게 되었다.

그는 말머리를 관아로 돌렸다.

연화를 나무 그늘에 앉혀놓고 김을 매던 배 서방 내외는

멀리서 육모방망이를 들고 달려오는 포졸들을 기이하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점점 자기들을 향해 오고 있는 게 아닌가.

육모방망이패들은 다짜고짜 배 서방을 포승줄로 꽁꽁 묶어 관아로 끌고 갔다.

수령은 영문을 모르고 무릎을 꿇린 채 안절부절못하는 배 서방을 향해 호령했다.

 

네가 윤진사댁 머슴놈 배가냐?”

... 그런뎁쇼.”

"네가 윤진사댁 귀물을 훔쳤다는 게 사실이렷다!”

무슨 말씀을... 도무지 그런 일은 없사옵니다.”

그럼 네 놈 집 담장 위로 솟았다는 능소화는 어찌된 것이냐?”

... 그건 우리 딸이 꽃을 하도 좋아해서

몇 년 전에 작은 가지 하나를 베어다가 꽂아 둔 것이 그리 큰 것이올시다.”

이놈아그 꽃이 무슨 꽃인 줄 아느냐그 꽃이 양반 꽃이니라.

너 같은 천한 상것들 보라고 피는 꽃이 아니란 말이다.

네놈들 즐기라고 윤진사가 중국에서 어렵사리 모셔왔겠느냐 말이야!

당장 저놈 볼기를 쳐라!”

형리들은 형틀 위에 묶인 배 서방의 바지를 벗기고

양쪽에서 볼기와 넓적다리에 곤장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하나요.”

둘이요.”

셋이요.”

넷이요.”

 

엉겁결에 벌어진 일에 아야 소리 하느라 잠시 정신줄을 놓았던 배서방이

서너 대 매질을 당하고서야 이러다 죽겠다 싶어 겨우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놓다.  

 

잠깐만요나으리나무를 뿌리째 뽑아간 것도 아니고

가지 하나 잘라다가 심어 키운 것이 무어 그리 큰 죄라고 이러십니까요나으리

 

어허... 저놈 주둥이질 좀 보게.

아니 조선의 근본은 강상의 도에서 시작된다는 말도 못 들어보았느냐?

하기사 너 같은 놈들이 삼강을 알겠느냐오륜을 알겠느냐쯧쯧...

가끔 상놈들이 양반 흉내를 내느라

쥐새끼처럼 숨어서 몰래 족보를 만드네 제사를 지내네 하는 놈들이 있더라만

발각이 나는 순간 관에서 잡아다가 죽도록 물고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줄 아느냐?

양반과 상놈은 그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늘이 인간을 내실 때 양반이 시키면 아랫것들은 받자와 시키는 대로 하도록

애초에 그렇게 이치가 지어졌느니.

뱁새가 황새 흉내를 내려다가는 가랑이가 찢어지고 마는 것이다.

모름지기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사는 것이 하늘의 정한 이치이며

그렇게 각자 하늘이 정해준 이치대로 자기 본분을 지키면서 사는 것을 가리켜

강상의 도라 하는 것이다이놈아!”

 

곤장 몇 대에 피가 맺히더니

곧 살점들이 터져나갔다.

뒤따라 온 김 씨는 비명을 지르다가 혼절했고

연화는 눈물콧물 범벅이 되어 울면서 쓰러진 어미를 흔들어대었다.

 

남편 배 씨가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간 뒤 한 동안 김 씨 모녀는 깜깜한 동굴 속에 갇힌 것 같이 살았다.

숨이 막히고 눈물만 쏟아졌다모녀는 하루 종일 몇 마디 하지 않았다.

정신을 추스린 김 씨가 연화의 마음을 돌리려 꽃을 따다 주어도

연화는 그전처럼 좋아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손에 올려놓고 이슬방울만 떨어뜨릴 뿐아버지의 목말을 타고 깔깔대던 연화도

이제 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기이하게도 배 서방이 떠난 지 얼마 뒤에

윤진사가 말을 태워준다며 안고 탔던 열 살 난 손자가

말에서 미끄러져 등이 굽어 버렸다.

또 4년이 지나고서는 마나님이 풍을 맞아 반신을 못 쓰고 자리보전을 하게 되어 버렸다.

그 집 하인들은 배 서방이 억울하게 잘못 되어 이 집에 동티가 난 것이라고 수군대었는데

그런 수군거림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필이면 윤진사는

연화 어미 김 씨를 불러다가 마나님시중을 들게 하였다.

어느 날 김 씨가 마나님을 씻기고 있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보니

어느 결에 왔는지 윤진사가 김 씨의 뒤태를 묘한 시선으로 훑고 있는 게 아닌가.

 

김 씨는 그 길로 짐을 꾸려 친정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친정붙이들에게 개가자리를 알아보아달라고 부탁했다.

동학에 입도한 친척오라비 권명하가

나이 차이는 조금 나겠지만 아주 인품이 훌륭한 분이

가족을 잃고 혼자 살고 있는데 어떻겠냐고 묻기에

어서 영월을 떴으면 좋겠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미가 서둘러 윤진사집을 떠나며 개가를 궁리하면서부터

연화는 더욱 말이 없어졌을 뿐 아니라

입술을 내밀고 볼이 부어 있었다.

 

갑술년(1874) 봄 단양으로 와서 새 아버지를 처음 만난 날,

얼굴에 수염이 시꺼먼 새 아버지라는 사람은

무릎을 땅바닥에 구부리고 앉아 연화의 손을 따듯하게 잡아주었다.

 

아가... 그 동안 고생이 많았겠구나.”

뜻밖에도 연화는 열한 살 큰애기답지 않게 그만 으아앙-’ 하고

어린 아기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어미 치마폭에 얼굴을 묻었다.

 

연화는 오랜만에 떠나간 아비의 눈빛을 다시 보았던 것이다.

그것이 벌써 년 전의 일이다.

 

(다음 회  해월의 딸, 용담할미(2회) - 평생제자 김연국을 만나게 된 사연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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