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4_해월의딸용담할미

해월의 딸 용담할미(4회) - 속이 깊은 아이 윤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8. 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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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미인 고은광순 선생님은 소설가로 우리 앞에 등장했습니다. 읽어보니 흥미진진 합니다. 어쩌면 토지나 혼불에 버금가는 대하소설이 되는건 아닌지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하여 고은광순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그분의 소설을 연재합니다. 활자화된 책으로 나올때 까지 이곳에서나마 갈증을 풀어보기 바랍니다. [퍼와 편집한 이 주]





(관의 추적을 피해 떠도는 삶속에서도 성장하는 아이들. 아버지의 첫째 부인을 만나게 되고...)

송두둑은 해월이 입도 후 가장 오래, 가장 평화롭게 살았던 곳이었다. 꺼져 가는 동학의 불꽃을 살려낼 수 있었던 고마운 동네였다. 그러나 수상한 눈길이 잦아진 이상, 이제는 더 이상 미련을 둘 곳이 못 되었다. 해월은 바로 보따리를 챙겨 송두둑의 집을 사위가 된 연국에게 부탁하고 날이 어두워지자  혼자 집을 떠났다. 전라도 익산의 사자암으로 들어간 해월은 수 개월간 암자에 머물며 관가의 경계를 피했다. 초겨울에는 손병희 등과 충청도 공주의 가섭사에서 기도를 하며 이제는 손수 일일이 챙길 수 없게 커져 버린 각처의 도인들을 지도하고 연락 체제에 대해 궁리해 보았다. 송두둑 가족의 피신에 대해서는 얼마 전 제자들에게 부탁해 두었으니 염려 없으리라.


3.

김 씨는 며칠 전부터 말린 나물이며 곡식이며 옷가지들을 챙기느라 부산했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자 해월이 보낸 제자들을 따라 아이들을 재촉하여 길을 떠났다. 남자들은 등짐을 지고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보름을 앞둔 달빛에 의지해서 산길을 걸었다. 지난 10년간 김 씨는 송두둑에서 두 아이를 낳았고, 몸은 고돼도 마음은 아주 평온한 삶을 살았다. 남편이 충주, 청풍, 괴산, 연풍, 진천, 목천, 청주, 공주를 다니며 포덕을 하며 보람된 나날을 보낸 곳도 송두둑이었다.


남편은 스승으로부터 위 아래로 나뉘어 있는 수직의 세상을 옆으로 터진 수평의 세상으로 바꾸라는 숙제를 받았다. 서로의 가슴에서 한울을 발견하고, 이 땅 위의 모든 존재가 존귀하고 가치 있는 존재임을 알아 벅찬 기쁨을 안고 살게 되는 세상을 만들라는 과제다. 성심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남편은 진심으로 존경스러운 존재였다.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는 날에는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했다. 풍족하지 않아도 감사한 날들이었다. 데리고 온 자식 연화를 자기자식처럼 귀히 여기고 사랑해 주었으며 어린 솔봉과 윤에게 한 번도 큰소리를 내어 꾸짖거나 매를 든 적이 없었다. 밖에서 돌아올 땐 꽃과 나무에 관심이 많은 윤을 위해 솔나리며 쑥부쟁이 꽃도 따다 주었고 조그만 채송화를 뿌리째 얻어다 주기도 했다.


올 봄에 윤은 채송화며 쇠비름을 뜯어서 나누어 심어보고 그것도 죽지 않고 뿌리를 내려 살아 나더라며 얼마나 좋아했던가. 심지어 채송화는 잘라 심은 다음 날에도 꽃이 피더라며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자기가 확인한 생명의 경이로움을 전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제 작년에 뿌려 꽤 퍼졌던 돌나물도, 채송화도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다.

해가 뜨면 인적이 드문 양지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밀개떡으로 요기를 하고는 인적을 피해가며 300리 가까운 거리를 걸어 도착한 곳은 상주 화서 봉촌리 앞재. 집은 초가 3칸으로 작았지만 우선 지붕이 있고 부엌이 있는 집에 도착했다는 것이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등짐을 내려놓은 박 씨는 손 씨 부인이 있는 보은이 여기서 서쪽으로 60리라고 말해 주었다.

날이 밝은 뒤에 보니 근처에는 작은 저수지가 있고 바로 뒤에는 꽤 높은 원통봉이라는 봉우리가 있었다. 김 씨는 부지런히 집 안팎을 손보았다. 덕기는 동네친구를 찾아본다고 뛰어나갔는데 언젠가부터 꼬마 윤이 보이지 않았다. 놀란 가슴으로 손에 걸레를 쥐고 집을 한 바퀴 돌던 김 씨는 그만 그 자리에 서 버리고 말았다. 윤이는 뒤뜰 양지 바른 곳의 돌무더기들을 한쪽으로 치워 놓고는 어느 틈에 챙겨왔는지 주머니 이쪽저쪽에서 뿌리와 씨앗들을 꺼내어 여기저기 심고 뿌리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게 뭐냐?”

“응. 돌나물 뿌리들하구 채송화 씨앗이야요.”

 

“엄니, 눈이 와요!”

아침에 모래판에 글공부를 하러 나오던 윤이 소리쳤다. 세 살 위 덕기는 공부를 하며 가끔 꾀를 부리기도 했지만 윤은 글 배우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이곳 상주 앞재에 도착한 뒤 바로 마당 한 귀퉁이 감나무 밑에 굵은 나뭇가지를 잘라 폭이 두 자, 길이가 한 자 되게 네모를 만들고 그 안에 고운 흙을 고르게 펴 담아 공부 판을 만들어 주었다.

단양 송두둑에 살 때 남편은 틈 나는 대로 연국이와 연화에게 한글을 가르쳤다. 김 씨는 어깨너머로 쉽게 한글을 깨우쳤다. 한문은 숫자 말고는 여간해서 배우기 어려웠지만 한글은 그 원리가 너무도 간단하고 분명하여 기본 글자의 소리만 익히면 금방 엮어서 소리를 만들 수 있었다.

김 씨는 호롱불 밑에 헌옷을 기우며 생각했다.

‘참으로 세종이라는 임금은 어진 분이 틀림없을 것인데, 요즘의 임금이란 분은 도무지 백성이 어떻게 사는지 도통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양반네들 횡포가 끝이 없고 관가의 패악질이 이리도 심한데 어찌 우리 남편같이 어질고 또 어진 사람이 관의 주목을 받게 된다는 말인가. 20년 전에는 남편의 하늘 같은 스승도 대구에서 참형을 당했다 하지 않던가. 어찌되었든 백성들이 깨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백성들이 글이라도 읽고 서로의 생각을 글로 멀리 널리 전하여 각자의 지혜를 모을 수 있게 된다면 이 어두운 세상도 언젠가는 밝게 되리라. 개벽 세상이 꼭 오리라.’

김 씨가 상주로 이사 와서 아이들의 글공부를 다잡았던 이유였다.


4.

해가 바뀌어 봄(1885)이 되었다. 충청 감사 심상훈이 단양 군수 최희진에게 전임 군수가 작년에 바보처럼 놓친 해월 가족을 찾으라고 닦달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단양을 떠나 상주로 떠나오기를 잘 했다 싶었지만 이제 상주도 안심할 수 없게 되었다. 해월은 상주 앞재의 집을 사위 김연국에 부탁하고 자신은 보은 장내리로 청주, 진천으로 돌아다니며 도인들을 지도했다.

어느 날 손병희의 고향을 들러 가는 길에 청주 북이면 금암리의 교도 서택순의 집에 방문했을 때였다. 방에서 베 짜는 소리가 들리는데 등에 아기를 업고 일을 하는 듯 여인은 연신 베를 짜면서도 칭얼거리는 아기를 달래고 있었다. 댓돌 위의 짚신이 다 낡은 걸 보니 야무지게 짚신을 삼아 주는 이도 없는 모양이었다. 점심을 먹는 동안에도 점심상을 물린 뒤에도 베 짜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 집 며느리의 삶이 얼마나 고될지 마음이 아파왔다.

해월이 물었다.

“베를 짜는 이가 누군가?”

“며늘앱니다.”

“며느리가 베를 짜는가, 한울님이 베를 짜는가?”

“네?”

서택순과 그 옆의 제자들은 한참만에야 스승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숙였다.

우리가 입고 있는 옷을 만들기 위해 목화를 심고, 목화를 따고, 목화 안에 들어 있는 씨앗들을 빼어내고, 실을 자아내고, 베를 짜고, 바느질을 하는 이 모든 수고로운 일들을 해 내는 사람들이 모두 한울님이라는 것을…. 바느질뿐인가? 농작물을 심고 김을 매어주고 거둬들여 갈무리하는 일, 다듬어서 삶고 데쳐 음식을 만드는 일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는 모든 일들을 하는 그들이 다 한울님인 것을….


윤이네가 떠나고 단양 송두둑에 여전히 남아 있던 많은 도인이 체포되었다고 했다. 상주 앞재도 안심할 수 없다. 해월은 이번에는 더 멀리 450리나 떨어진 경상도 포항 근처 불냇으로 가족을 이사시켰다. 역시 밤길을 이용했다. 다행히 잡혀갔던 제자들이 풀려났다는 소식이 들렸다. 지목이 가라앉자 가족들은 두 달 만에, 추석이 지나 다시 상주 앞재로 돌아왔다. 그러나 살림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말린 산채나물들도 모두 사라져 버렸다. 부엌에 걸어 두었던 솥이며 이부자리도 관에서 모두 실어갔다고 했다.

왕복 900리의 이삿길에 어린 것들과 김 씨는 모두 지쳐 버렸다.  제자들도 너나 없이 도피 생활을 하느라 여력이 없었다. 엄동설한이 시작되는 때에 제자들이 가 보니 온 식구가 여름옷을 입고 떨고 있었다. 멀리서 이 소식을 듣고 제자 이치흥이 무명 서너 필을 가져다주었다. 겨울옷을 지을 솜이 있을 리 없으니 덕기, 윤이까지 모두 산과 들로 나가 억새풀과 갈대에서 풀솜을 훑어 왔다. 풀솜을 넣어 윤이와 덕기의 옷을 짓고 해월의 옷을 지었다. 김 씨의 옷을 지을 때 아침부터 보이지 않던 윤이는 어머니 옷에 넣을 솜이 제일 적다며 저수지 가로 가서 억새풀 씨를 소쿠리에 꼭꼭 눌러 담느라 얼굴과 손이 모두 빨갛게 얼어 돌아왔다.

설이 지나면 아홉 살이 된다지만 윤이는 아직 어린아이 아닌가.

“아이고. 우리 꼬마애기씨가 이렇게 큰일을 했네.”

“꼬마애기씨라고? 내가 작년에 여기 처음 이사 왔을 때 뒤뜰에 검은 돌덩이가 여간 들기 힘들지 않았거든? 그런데 이번에 들어 올리는데 쑤욱 들려지던 걸. 그러니까 나 이제 꼬마애기씨 아녀요. 나, 크고 있다구. 맞지?”


“여보. 우리 윤이는 참 남다른 아이에요.”

밤에 자리에 누운 김 씨는 호롱 밑에 짚신을 삼기 위해 왕골을 다듬는 해월에게 말했다.

“그럼, 속이 깊은 아이지요.”

해월은 집에 머물고 있는 시간이 적어도 아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아이가 무인(1878)생 아닙니까. 계집애가 호랑이 띠면 팔자가 사납다고 하지 않아요?”

“강하면 좋지요. 쓰러지지 않을 겁니다. 그랬대두 금방 털고 일어나겠지요.”

해월은 그저 평안한 얼굴로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감사한 일이네요. 그런데 당신은 언제 주무십니까? 난 당신 주무시는 거 한 번도 못 봤네요. 그리고 일은 왜 그렇게 하세요? 좀 쉬엄쉬엄 하십시오.”

“하늘이 노는 것 보았소? 놀고 있으면 하늘님이 싫어하신다오. 당신은 하루 종일 일했으니 피곤할 게요.”

해월은 빠져나온 아내의 발을 만져보고는 차갑다며 이불을 끌어내려 덮어주었다.


상주 앞재에서 두 번째 설을 맞았다. 해월은 여전히 포덕에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가까운 뒷산에 진달래가 한창일 무렵 김 씨는 간단한 여장을 꾸려 아침 일찍 두 아이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이미 먼 길을 다녀 본 아이들이라 60리 길은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덕기는 이제 12살. 제법 총각 티가 나고 있었다. 어른 걸음으로야 아침 먹고 출발해도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것이지만 아이들과 함께 가자니 동이 트자마자 출발해야 했다.


“누구네 집에 가나요?”

“우리끼리 짐도 없이 가는 거 보니 또 이사하는 건 아니지요?”

“다시 상주 집으로 돌아올 거지요?”

“낮에 가는 거 보니 도망은 아니고만….”

이들의 재잘거림에 김 씨도 크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새 아이들은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약아져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은 모처럼 쫓기는 본새가 아닌 나들이가 반가웠는지 재잘대었지만 시간이 흐르자 힘이 드는지 말이 없어졌다.

“덕기야. 너는 손 씨 큰어머니 생각나느냐?”

“손 씨 큰 엄니? 모르겠는 걸요.”

“그래, 애기 때 뵙고 못 보았으니 생각이 날 리가 없지. 네가 돌 지나고 반년이나 지났을 때 송두둑에 있던 우리 집에 잠깐 계셨느니라. 윤이는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니 더욱이 알 리가 없고….”

해가 어느 틈에 이마를 비추고 있었다. 지는 태양이라 낮게 떠서 눈이 심하게 부시지는 않았다. 모퉁이를 돌면 또 나타나고 모퉁이를 돌면 또 나타났다. 예쁜 해와 숨바꼭질을 하다가 해가 서산으로 꼴깍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야 보은 장내리에 도착했다.

“이게 누구여? 야가 솔봉이? 그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뛰던 그 아가? 쿨럭, 아이고 야가 동생이구먼. 어서 오거라. 아이고 어린 것들 데리고 오느라 자네도 고생했네, 쿨럭.”

“큰 어머님께 인사드려라. 아버지의 첫째 부인이셔.”

 

(다음주 금요일,  2장이 시작됩니다. 어머니, 큰 어머니, 새 어머니- 해월의 세 아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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