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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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의 딸 용담할미(3회) - 김연국이 사위가 되고...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8. 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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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방미인 고은광순 선생님은 소설가로 우리 앞에 등장했습니다. 읽어보니 흥미진진 합니다. 어쩌면 토지나 혼불에 버금가는 대하소설이 되는건 아닌지 은근히 기대도 됩니다. 하여 고은광순 선생님의 허락을 얻어 그분의 소설을 연재합니다. 활자화된 책으로 나올때 까지 이곳에서나마 갈증을 풀어보기 바랍니다. [퍼와 편집한 이 주]




(이필제난 이후 고난을 겪는 해월가족, 둘째 아내를 얻고 김연국을 사위로 맞게 되는데...)

관군의 집요한 추적을 피해 해월은 깊은 절망을 안고 소백산 골짜기를 탔다. 굶주림에 지쳐 죽을 고비를 넘기고, 비몽사몽간에 높은 절벽에 서서 뛰어내릴 생각까지 품었으나, 고비원주(高飛遠走), 높은 뜻을 펼치고 멀리까지 도를 펴라는 스승님의 말씀이 마지막 한 걸음을 멈춰 세웠다. 스승의 인도가 있었던가, 한울님의 감응이 있었던가. 영월 직곡리 박용걸의 집에 겨우 의탁하게 되어, 몸을 추스르며 49일 기도를 드렸다.

수운 스승이 살아 계실 때 49일 기도를 여러 차례 했지만 이렇게 치열하게 기도한 것은 처음이었다.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통곡이 터져나왔다. 자기의 과오로 희생된 도인들을 생각하며, 어린 나이에 참수를 앞두고 공포에 떨었을 아들 준이를 생각하며, 보석 같은 제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생각하며 가슴을 쳤다.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는 아내와 딸들을 생각하며 여인들이 겪을 고생을 생각하니 온몸이 무너져 내렸다. 자기가 겪는 시련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다시는 이런 무모한 희생이 반복되게 하지 않으리라. 처절하게 처절하게 주문을 외우며 하늘의 가르침을 간구했다. 자기안의 하늘이, 자기안의 지혜가 커지기를, 커지기를…. 기도하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기도가 끝난 뒤 해월은 제자들에게 우묵눌(愚黙訥) 세 글자로 무저항 정신을 설했다. 우(愚), 우직하게 겸손하게…. 우공이 집 앞의 산을 옮긴 것처럼, 어리석어 보이지만 꾸준히 안으로 정진하여 내공을 다져서 공을 이루는 데로 나아가자. 黙(묵), 잠잠하게 마음속으로…. 묵묵히  낮고 깊어져서 고요한 생각의 깊이를 더하자. 訥(눌), 말을 적게, 입을 무겁게…. 말을 앞세우지 말아서 허언과 장담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태산 같은 도인들이 되자.

해를 넘겨 49일 기도가 끝나는 정월 초 닷샛날, 해월은 기도소를 마련하였던 영월 피골(稷洞) 도인 박용걸의 집에서 교조신원운동을 잘못 지도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는 제례를 올렸다. 서둘러서 해야 할 일은 피해자나 가해자나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의 지옥과 폭력의 유혹을 없애는 것이고 가슴속에 한울을 키우는 일이다. 그것이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가장 빠르고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엄청난 희생을 겪고서야 크게 깨우치게 되었다.


이필제가 어설프게 영해 관아를 친 여파는 참으로 커서 관가에서는 동학도를 극히 무도한 폭도들이라고 낙인을 찍게 되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도(邪道)의 무리로 업수이 여기며 하찮은 무지렁이로 한 수 접어서 대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중한 기찰과 닦달이 뒤따른 건 불문가지. 관은 동학의 뿌리를 없애고자 혈안이 되었다.

그들의 집요한 추적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저 멀리 강원도 인제에 피신해 살던 수운의 큰 아들 세정이 체포되었다. 그는 양양 옥에서 취조를 당하다 매질 끝에 사망했고(1872.5) 동학도인들은 관속의 추적을 피해 지경을 넘어 이주하거나 화전민 무리에 섞여들어야 해야 했다.

바로 그즈음에 해월이 인제 도인 김병내 집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 기거하던 김 도인의 조카 김연순, 김연국 형제가 해월을 흠모하여 입도하였는데 그때 김연국(용진)의 나이가 16세였다. 

해월이 김병내의 집을 떠날 때 김연국이 배웅을 나왔다. 한참을 지나 해월이 그만 돌아가라 해도 연국은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십리 길을 따라오던 김연국은 잠시 쉬는 틈에 해월에게 자기를 수행제자로 받아 주십사 무릎을 꿇고 간청했다.

“어찌 나를 따르겠다는 것이냐?”

“저희 형제는 2년 전 부모를 잃고 지금 숙부 집에 얹혀살고 있지만 더 이상 폐를 끼치고 싶지 않습니다. 더욱이 선생님의 가르침이나 행하시는 것이 제가 그간 보고 듣고 겪지 못하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우물에서 물을 얻어먹을 때나 개떡을 나누어 먹을 때도 제게 먼저 주셨습니다.”

결기가 서린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잠시 고개를 돌렸던 해월은 자리에서 일어나 연국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오던 길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선생님, 어찌….”

“네 나이가 아직 어리니 숙부에게 가서 허락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렇게 십 리 길을 되돌아갔던 해월이었다. ‘나도 사내 몫을 할 수 있다’며 이필제를 따라 나섰던 열일곱 살 양아들 준이를 비참하게 죽음의 길로 이끌었던 아비 해월은 그렇게 자기를 아비처럼 따르는 연국을 얻었다.

다음 해 갈래사 적조암에서 49일기도를 마쳤을 때 주지 철수좌 스님은 소백산맥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이어지는 도솔봉 아래 절골이 한동안 평온하게 살 수 있는 터전이라며 주선해 주었다. 해를 넘긴 몇 달 뒤 철수좌 스님은 입적하셨는데 임종 후 장사를 지내고 지목이 뜸해지자 해월은 다시 기도와 설법과 포접으로 연일 바쁜 날들을 보내게 되었다. 많은 희생이 있었으니 다시 재건에 박차를 가해야 했다. 


바쁘게 돌아치는 해월을 보필하며, 제자들은 3년이나 부인 손 씨와 딸들의 행방을 찾았으나 종적을 알 수 없다며 철수좌 스님 말대로 단양 도솔봉 아래 거처를 정하고 새로운 사람을 얻으셔야 한다고 강력히 재가를 권했다. 영월의 김 씨 부인을 만나게 된 사연이다.

그 무렵 연국의 숙부 김병내도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으므로 도솔봉 아래 송두둑에서는 여러 도인들이 어울려 살게 되었다. 해월의 제자들과 교인들의 사는 방식은 대개 이러했다.

해월의 거처를 더 안쪽으로 정하고 인근에 몇 채를 얻어 몇 가구가 살았다. 해월을 찾아 무수한 손님들이 들락거리는데 그들은 일단 될 수 있으면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인근 교도들의 거처에 묵고 날이 어두워 인적이 끊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해월의 집을 찾았다. 밤새 이야기를 나눈 그들은 다시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집을 나섰다. 

길에서 얻은, 아들과 다름없는 김연국은 그 후로 해월이 살아 있는 동안은 거의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을해년(1875) 솔봉이 태어나고 3년 뒤인 무인년(1878) 윤이 태어나자 연화 연국과 더불어 넷은 모두 오누이처럼 지내게 되었다. 연국은 늘 출타가 잦은 해월을 따라다니느라 집에 붙어 있을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함께 있을 때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사이좋은 4남매인 줄 알았다. 해월이 집에 머무는 날은 아이들은 한데 얼려 나물을 뜯고 열매를 따러 다녔다. 물가에서 놀고 논 위 얼음판에서 놀았다. 그런데 11살로 단양을 찾았던 연화가 점점 나이가 차고 처녀티가 나면서 청춘남녀에게는 다른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연국은 스물이 넘어서도 선생님을 모시고 다녀야 한다며 장가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들어오는 중신도 화를 내며 뿌리치곤 했다. 재작년 그러니까 연화가 18세가 되자 연화의 혼처를 알아보아야 했는데 해월은 웬일인지 크게 관심을 갖지 않아 김 씨는 해월과 살게 된 이후 처음으로 섭섭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연화의 혼처에 무관심한 것 같던 해월이 어느 날 불쑥 물었다.

“연국이 사윗감으로 어떻소?”

“사람이야 그만이지만 꺼려집니다.”

“둘이는 서로 좋아하는 눈치 아닙니까?”

“그러니 빨리 연화의 혼처를 알아보자니까요. 나는 연화가 조용히 농사나 짓는 남편을 만나 오순도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연국이야 늘상 당신을 모시고 다녀야 하고 언제 위험이 닥칠지도 몰라서….”

“그럼 그만두지요.”

이렇게 또 한 해가 갔다.

묘적재 넘어 풍기 총각을 넌지시 물어보았지만 연화 역시 심히 도리질을 쳤다. 그러다가 이렇게 연화는 20살이 되어 농익은 꽃이 되어 버리고 말았고 김 씨는 바느질을 하다가도, 윤이 머리를 땋아주다가도 가는 한숨이 새어나왔다.


쫒기는 나날들(1884~)

빗소리는 새벽에 그쳤다. 마당으로 나갔던 윤이 소리를 질렀다.

“엄니, 엄니, 언니, 이것 보우. 어마… 돌나물 찌끄레기 던졌던 데에 돌나물이 파랗게 자라났어요. 아이구우 신기해라.”

다른 것도 이리 되려나? 생명이란 것이 모두 이렇게 기특한 것일까? 윤이는 쪼그려 앉아 조그만 손바닥을 펴 돌나물 위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아이의 콧방울이 발름거렸다.

   

“성님, 이번엔 어디어디 다녀왔수? 무슨 일이 있었수? 뭘 봤수?”

연국이가 돌아오면 덕기와 윤은 양쪽 팔에 매달려 쉴 새 없이 물었다. 무엇보다 아버지 해월과 무슨 일을 하고 다녔는지 궁금해 졸라대었다. 그러면 연국은 주머니에서 종이에 싼 엿가락 같은 것을 꺼내어 조금씩이라도 두 동생에게 나누어 주었다. 어떤 때는 너무나 맛있는 약과를 쪼개주며 같이 마냥 행복해하기도 했다. 그런데 요즈음 연국은 통 얼굴을 펴지 않았다. 해월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완연했다.


목천과 공주에서 경전을 찍어내고 49일 기도 대신 시행하는 인등제가 자리를 잡아가면서 교인들은 날로 늘어갔다. 도인들의 무리를 지어 왕래하는 일이 잦아지자 밤을 기다리고 새벽을 기다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자 불길한 소식이 들려왔다. 단양 관아에서 송두둑을 주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해월은 제자들의 출입을 금했다.

그런 어느 날 연국이 김 씨에게 새삼 큰절을 했다.

“제가 벌써 스물여덟이 되었습니다. 연화는 스물하나가 되었지요. 둘 다 못 미더울 나이는 아닙니다만 제 형편이 못 미더우실 겁니다. 그러나 연화가 이미 다른 남정네가 눈에 들지 않듯이 저도 다른 처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남남이 될 수 없는 운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고생스러워도 우리 두 사람 세파를 헤쳐 나가겠습니다.”

해월도 이전과는 달리 아내를 설득해서 연국과 연화의 혼인을 서둘렀다. 둘이는 이미 오래전부터 서로의 마음을 알고 있었으므로 김 씨만 마음을 돌리면 되는 일이었다. 평소와 다른 남편의 결연한 태도에 마침내 김 씨 부인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본인들이 저리 좋아하는 것을…. 해월은 다음날 아침이라도 혼례를 올리자고 했다. 예물이 필요하랴, 혼수가 필요하랴. 햇볕은 화창했고 높은 하늘에서는 새가 노래를 불러주었다. 근방에 사는 연국의 형 연순과 숙부가 참석했다. 소문을 내지 않고 급히 치르는 조촐한 혼인이었다. 청수를 떠 놓고 둘이는 부부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벌써 맺어졌어야 할 인연이었다.

며칠 뒤 개울 너머에 화승총을 멘 사냥꾼 차림의 두 사내가 이쪽을 쳐다보며 뭔가 쑥덕이는 것이 보였다. 그들은 도솔봉 쪽을 향해 올라가는 듯싶더니 해질 무렵 그중 하나가 집 뒤의 삿갓봉 쪽에서 내려오는 게 아닌가. 그의 손에는 토끼도 꿩도 들려 있지 않았다.

(우리 역사상 최장기 수배자 해월, 가족의 본격적인 도피생활이 시작됩니다. 다음 해월의 딸 용담할미(4회) - 속이 깊은 아이 윤 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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