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생각해보라, 나와 닮은 사람들이 다른 언어를 쓰니 감정적으로 어떠했겠나"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0. 18.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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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입양아 출신 프랑스 상원의원… 장 뱅상 플라세(한국명 권오복)]

"지금도 한국 '내 나라'라 생각하지는 않아
하나의 '외국'일 뿐… 하지만 가슴 뭉클해져"

"내 삶의 후반부에는 조금 더 마음 평온하고
모든 걸 수용하는 사람 됐으면… 딸이 생기면서 마음 바뀌어"

프랑스 파리의 오후 다섯 시. 라틴 지구에 있는 상원(上院) 건물의 검색대를 통과하니 중세(中世) 궁전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황금빛 돔 천장과 대리석 기둥은 높았고 바닥에는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안내 직원들도 궁정 집사처럼 연미복 차림이었다.

회의실 입구의 상단에 부착된 CCTV에는 회의 진행 상황이 중계되고 있었다. 장 뱅상 플라세(47) 의원은 회의 중간에 나온 것 같았다. 골격(骨格)이 컸다. 뻗친 검은 머리 한가운데로 가르마를 탔고, 안경 속 눈빛이 강했다.

"먼저 사과부터 해야겠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 갑자기 생겼다. 오늘은 35분밖에 시간이 안 난다. 괜찮다면 오늘 하고 다시 약속을 잡자."

35분이라? 나는 의례적 인사말을 생략하고 질문을 시작했다.

장 뱅상 플라세 의원은 “비록 ‘외국’이라고 말했지만 한국에 갈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말했다. /파리=최보식 기자

―한때 한국의 친(親)부모는 당신을 버렸다. 그런 나라에서 '한국계 프랑스 상원의원'이라며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위선적이거나 코미디 같지 않은가?

"한국에서는 출신(出身)을 중요시하니까. 한국 입양아 출신이 성공했다고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하겠지. 그런 정서를 이해하고 존중한다. 나도 한국을 멀리하다가 36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갔으니까."

그의 한국명은 권오복(權五福). 일곱 살 때인 1975년 프랑스의 한 변호사 집안에 입양됐다. 경기도 수원의 보육원에서 입던 옷 몇 벌과 성경책이 든 가방을 들고서. 그런 그가 2011년 녹색당(Les Verts) 소속으로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다수당인 사회당과의 연정(聯政)이 성사되면 그가 환경부장관이나 총리에 입각할 것이라는 전망이 한때 있었다. 아직 성사되지는 않았다.

―일곱 살 때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라탔을 때를 기억하나? 어떤 느낌이었나?

"생생하게 기억한다. 보육원에서 차를 타고 또 비행기를 타고, 파리 공항에 도착해 프랑스 부모님 집에 올 때까지 모두를. 그때는 심리적으로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긍정적으로 바뀌었고 빨리 적응했다. 넉 달 만에 프랑스어를 할 수 있었으니까."

―프랑스에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한국말을 써왔다. 지금 당신은 전혀 못한다. 한국말을 의식적으로 지워버린 건가?

"나를 버린 나라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내가 아홉 살 때 프랑스 부모는 한국어도 배우라고 권했지만 거절했다. 지금도 한국을 '내 나라'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의 '외국'일 뿐이다."

-한국의 친부모는 무슨 이유로 당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나?

"잘 모르겠다.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만약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주고 싶나?

"나를 버린 한국 부모의 존재에 대해 관심이 없다. 내게는 '프랑스 부모'만 있을 뿐이다."

―프랑스 가정으로 입양되지 않았다면 지금 당신은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본 적 없다. 나는 프랑스 사회에 완벽하게 동화됐다. 과거를 돌아보거나 지나간 일에 대해 연연하지 않는다. 나는 늘 내 앞날에 대해서만 생각해 왔다."

아마 그도 질문을 해봤을지 모른다. 입양되지 않고 한국에서 자랐다면 1968년생인 자신의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를. 국내 매스컴은 해외 입양을 늘 비판해 왔다. 우리의 부끄러운 초상(肖像)이기 때문이다. 우리 고아들을 우리나라 안에서 책임지지 못한 것은 나라의 역할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아이 개인의 삶에서 보면 달라진다. 해외로 입양됨으로써 정체성 혼란 등 숱한 고통을 겪었겠지만 그의 운명이 바뀌었다. 국민 행복(幸福) 지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떤 나라·어떤 가정 속에 있느냐는 것이다.

―입양된 뒤 학교와 가정에서의 생활은 어떠했나?

"학교에서 별문제가 없었다. 원래 아이들이 훨씬 개방적이다. 집안에서 형제(3남1녀)들과도 원만했다. 프랑스의 전통과 예의를 배웠다. 좋은 부모를 만난 것은 내게 행운이었다. 아버지는 변호사, 어머니는 교사였다. 드골파(우파)였던 아버지와 정치 입장에서만 이견이 있었다(웃음)."

이날 인터뷰는 여기서 끝났다. 이틀 뒤 같은 장소에서 다시 만났다.

―어릴 때부터 역사책을 읽으면서 정치인이 되는 꿈을 꾸었다고 했다. 왜 정치인이냐?

"역사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싶었다. 사르코지 전 대통령이 '프랑스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줬다. 이제 나는 되돌려줘야 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정치인은 개인의 이익이 아닌 공공(公共)의 이익, 국가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다."

그는 대학 시절 학생조합을 이끌며 좌파 정치인들과 관계를 맺었고 그 뒤 의원 보좌관을 지냈다. 그러면서 40세 이전에 국회의원이 되는 꿈을 꾸었다. 화장실 벽에 이런 인생 계획을 걸어뒀다고 한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정치 철학을 담은 '내가 안 될 이유가 없지!(Pourquoi pas moi!)'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분명한 것은 나는 열망과 의지를 가졌고 열심히 노력했다. 당초 목표보다 3년 지나 2011년(43세) 녹색당 후보로 상원의원에 당선됐다."

―선거 때 상대 후보가 "'한국인'인 플라세는 이번 선거에서 위협을 느낄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는데?

"나는 상대 후보에게 '한 번도 나 자신을 한국인으로 생각한 적이 없고 나는 프랑스인이다'며 사과를 요구했다. 좌파 진영에서는 그런 인종차별 발언에 충격을 받았다. 수백 명의 입양아 출신으로부터 '적극 대응을 해야 한다'는 메일과 편지도 받았다."



―르몽드지(紙) 기사에는 당신을 '논쟁을 피하지 않는 공격적인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

"정치 세계에는 자신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 대부분 특정 이념에 갇혀 서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게 문제다. 그 다름을 인정하고 합의를 이루기 위해 나는 대화하고 때로는 논쟁한다. 그게 공격적으로 비칠지 모른다."

―당신은 가치보다 실리를 추구한다는 비판이 있던데?

"때때로 그렇다. 나는 환경을 중시하지만 무조건 원전(原電) 반대론자는 아니다. 국민에게 이익이 돌아가려면 일부 원전의 허용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지금 현실에서는 재생에너지·녹색에너지로만 해결되지 않는다."

―실리적인 접근 때문에 선명성이 떨어져 비판을 받지 않나?

"혁명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나는 실용적 개혁론자다. 녹색당은 너무 지나치게 좌파(左派)로 갔다. 환경정책에서는 오히려 현 올랑드 대통령(사회당)과 맞는 편이다. 이 때문에 지난여름 녹색당을 탈당했다. 나와 뜻을 같이하는 정치인들과 '환경민주당'을 만들기로 했다."

―지난번에 당신은 "한국은 하나의 외국일 뿐"이라고 했는데, 진심인가?

"사실에 근거하면 한국은 내가 태어난 나라다. 입양된 뒤로 많은 과정을 거쳤고 인간적으로 성장했다. 이미 그 페이지를 넘겼다. 지금은 프랑스 사람으로서 평온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솔직하게 말하면…, 내게 일어난 큰 변화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매년 한두 번 한국에 가고 친구도 생겼다. 여기 프랑스에서는 내가 한국 음식의 홍보대사다. 내 프랑스 친구들을 한국 음식점으로 초대한다. 이들에게 김치가 어떤 음식인지 내가 설명하고 있다니, 그런 나 자신에 놀란다."

―입양된 뒤로 한국 음식을 언제 처음 먹어봤나?

"상원의원에 당선됐을 때만 해도 한국에 대한 감정이 냉담했다. 당시 박흥신 주불 대사의 관저로 초대받았다. 코스 요리로 한국 음식이 나왔다.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대사께서 '소주 한 병을 다 마시면 우정이 영원히 간다' '두 손으로 소주를 따라야 한다'는 말도 해줬다. 인간적 신뢰와 따뜻함이 전해졌다. 그 자리가 한국에 대한 내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문득 한국 음식이 먹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나?

"그렇다. 입양 가정에서는 아무도 매운 음식을 안 먹었다. 나만 이상하게 겨자 같은 진한 매운맛을 좋아했다. 가족들이 그런 내 모습에 놀랄 정도로 말이다."

―처음 한국을 방문한 때는?

"2011년 초 제주도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그때는 이틀간 호텔에서 프랑스 사람들끼리만 있었다. 진짜 한국을 가게 된 것은 그해 11월이다."

―그때 한국에 대한 인상은?

"생각해보라. 나와 똑같이 생긴 사람들이 곁에서 다른 말을 했다. 감정적으로 어떠했겠나."

―방문하기 전에는 한국이 어떨 것이라고 생각했나?

"한국에 대한 기억은 보육원밖에 없었다. 그러니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방한 전에 주불 대사를 통해 한국 얘기도 듣고 책도 봤다. 막상 도착했을 때 한국이 그렇게 발전한 나라라는 사실에 놀랐다. 사실 한국에 갈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내가 비록 '외국'이라고 말했지만. 지금껏 여섯 번 다녀왔다. 오는 11월 4일에는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과 함께 방문한다."

―여섯 번 방문했으면 한국 사회의 결점은 안 보였나?

"아직은 못 봤다. 국민의 결속과 애국심에 놀랐다. 프랑스인이 개인주의적이고 분열적인 데 비해 그건 정말 놀라웠다."

대화 중간에 그는 자신의 휴대폰에 저장된 색동한복을 입은 딸 사진을 보여줬다.

"작년에 돌을 맞아 찍은 거다. 당시 이혜민 주불 대사가 서울에 연락해 한복을 공수해 왔다. 사진 촬영을 약속한 날 프랑스 총리가 내게 처음으로 면담을 요청했지만 '오늘만은 안 된다'고 거절했다. 내년부터 딸을 한국문화원에서 하는 한국어 강좌에 보낼 예정이다."

―본인은 한국어를 배울 의사는 없나?

"딸이 배우면 나도 함께 배울 것이다. 내 삶의 후반부에는 좀 더 마음이 평온하고 모든 것을 수용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딸이 태어나면서 내 마음이 바뀐 것이다. 딸은 프랑스 가정에서 프랑스 아이로 태어났지만 본인이 원하면 자신의 뿌리를 찾는 걸 돕고 싶다. 자신의 뿌리가 한국이라는 걸 알 때 아마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다."

―딸이 당신의 친부모인 친조부모를 찾게 되는 경우도 상정해봤나?

"딸이 그런 결정을 하면 도와줄 것이다."

헤어진 뒤 그가 말하지 않은 말들을 생각하며 한참 걸었다.


[출처: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05/2015100500369.html?pmlett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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