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나도 조갑제만큼 미쳐본 적이 있었나?”

忍齋 黃薔 李相遠 2015. 10. 28. 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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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준 | 2015.10.07

북한 기자단 대표 "스파이 50명보다 조갑제 한 명이 더 나아"

1987년 12월, 민주화 이후 첫 대선을 앞두고 대한항공(KAL) 858 여객기가 공중 폭발해 탑승자 280여 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듬해 2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첨예한 남북대결이 시작됐다. 뉴욕에 있던 나는 직접 현장을 가 취재했다. 다행히 우리는 북한공작원 김현희를 체포해 북한 소행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북한의 박길연 유엔대사는 한 해 전(1987년) 일어난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등 수많은 민주화 탄압사례를 거론하면서 우리 측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얼마 전 남조선 스파이집단 두목을 지낸 이후락(전 중앙정보부장)이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1973년 박정희의 지시로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폭로했다….”

1980년대 군부독재 정권의 내막을 파헤치며 명성을 날리던 조갑제 기자의 월간조선 편집국 시절 모습. /조갑제닷컴 제공


내용이 왜곡된 ‘이후락 증언’의 충격파는 컸다. 서방국 대표단들의 표정도 곤혹스럽게 변했다. 마침내 박길연의 주장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여러분, 그 김대중을 죽이려던 괴수 박정희는 또 어떻게 됐나? 자기 부인은 동족의 손에 잃었고, 자신도 자기 오른 팔인 김재규 중정 두목 손에 암살되지 않았는가….”

하도 한국 쪽의 아픈 데만 건드리는 통에, 어느새 사건의 본질은 희석되고 말았다. 사실 북한 박길연이 인용한 월간조선의 이후락 인터뷰는 조갑제가 아니라 오효진 기자가 한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 측이 이를 조갑제 기자로 안 것은 당시 월간조선의 특종이나 폭로기사 상당 부분이 조갑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절 최고의 취재력을 과시하던 대한민국 ‘대표’ 기자였다. 박정희의 유신은 물론 5공 군부독재 정권의 실상을 집요하게 파헤쳤다. ‘히로뽕-코리언 커넥션’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부마사태와 10·26 사건의 내막’ ‘국가안전기획부’ ‘한국 내 미 CIA의 내막’ ‘주한 유엔군 사령부’ ‘전두환의 금맥과 인맥’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등등….

뉴욕에서 돌아온 이듬해(1989년) 국방부를 담당하게 된 나는 판문점 군사정전 회담을 취재하러 갔다. 북한 기자단 대표인 민주조선 김상현 기자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는 1960년대부터 판문점을 출입해 한국 사정을 훤히 꿰고 있었다. 예컨대 내 집이 “개포동”이라고 했더니 “땅값 좀 올랐겠구먼”이라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때 북한 기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남조선 사람이 바로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였다. 북한 기자들은 그와 같은 신문사에 근무하는 나를 볼 때마다 우르르 몰려와 근황에 대해 물었다(지금 생각해 봐도 웃음이 나오는 진풍경이다).

“조갑제 어떤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기사 쓸 수 있지?”
“거 ‘남산’(지금의 국정원이며 당시는 국가안전기획부) 아이들이 가만 놔두나?”
“미 8군이니 CIA니 다 까발렸던데 양키들이 항의 안 해?”

내가 “우리 이제 민주화되고 있잖아. 남산이 함부로 하던 시절은 지나갔어”라고 말해주면 북한 기자들은 부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당부했다.
“조갑제 최고야. 안부 좀 전해줘….”
북한 기자의 ‘큰 형님’격인 김상현은 나를 따로 불러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함 기자, 스파이(남파 간첩) 50명보다 조갑제 한 명이 더 나아….”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기자가 된 사연

공산권 붕괴 후엔 처참한 북한 주목

1989년 동구권 붕괴 이후 가난한 중국 옌볜 동포들이 우리나라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북한의 처참한 생활상이 속속 전해지기 시작했다. 조갑제 기자는 이들 보따리 장수의 북한 여행기를 다룬 ‘목탄차로 달리는 공화국’(월간조선 1990년 12월호)을 기획하면서 그 실상에 놀라고 분노했다. 당시 월간조선에서 함께 근무하던 나는 그의 분노가 ‘반공’이라는 이념의 틀이 아니라 휴머니즘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느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자주와 이데올로기를 들먹이며 호의호식하는 권력층 밑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는 북한 동포들의 현실에 분노한 것이었다.

조갑제는 나아가 자신이 북한의 실상을 폭로해 현실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다. 과거 우리 군부독재의 성역에 도전했던 그가 민주화 이후 북한이란 새로운 성역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취재력을 북한에 집중함으로써 훗날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기자가 됐다.

1995년 11월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인터뷰하는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 라빈 총리는 이 인터뷰 후 34시간 만에 암살당했다. /조갑제닷컴 제공


1990년대 언로(言路)가 뚫린 ‘좋은 세상’이 도래하자 군사정권 시절 침묵 내지 동조하던 지식인 중에서 ‘열혈’ 정의의 사도들이 등장했다. 그들 중에는 진정한 의미의 개방·진보적 인사도 있었겠지만, 사이비 인사들도 많았다. 그들은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밀착해 시대에 영합하고 여론에 아첨했다. 사건의 본질은 외면한 채 적당히 주변 여론에 호응하는가 하면 비현실적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해답인양 말했다.

그러나 조갑제는 정권과도, 시대와도 불화(不和)했다. 군부 독재 때는 군사정권을 비판했지만 민주화된 후에는 민주화 정권을 비판했다. 1993년 김영삼 정권이 등장하자 그들의 섣부른 대북접근 정책을 비판해 미움을 샀고, 햇볕정책을 추진했던 김대중·노무현 정권과는 아예 처음부터 담을 쌓았다. 이후 조갑제는 기자로서 뿐 아니라 행동가(activist)로서 나서 좌우 이념대립 현장 한복판에서 싸워 왔다. 그래서 그런지 예전과 다르게 글이나 주장이 단정적이며, 온유함 대신 거칠고 딱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랜 투쟁에서 나오는 피로감도 엿보인다. 어떨 때는 “내가 정의요”라고 외치는 것 같다. 정의란 누구의 독점물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갑제의 치열한 삶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일신의 영달이 아닌,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사람에 쏟아 붓는 관심과 애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조갑제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씩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살아오면서 조갑제처럼 치열한 소신과 열정을 가져본 적이 있소?”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메아리쳐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비수처럼 찌른다.
“나도 조갑제만큼 미쳐본 적이 있었나?”



함영준

고려대학교 미디어학부 초빙교수, 한국문화포럼 이사장(現)
E-mail : jmedia21@naver.com

휘문고와 고려대를 거쳐 한양대 언론대학원을 졸업했다. 1983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월간조선, 경제부 기자를 거쳤고 뉴욕・워싱턴・홍콩에서 활동했다. <서진 룸살롱 살인사건>, <노무현 변호사, 하룻밤새 4번 영장 기각>, <전경환씨 뉴욕 부동산 추적> 등을 특종했고, 특파원 시절에는 동남아 지도자 연쇄인터뷰로 관훈클럽 제10회 최병우기자 기념 국제보도상(1999)을 수상했다.

2005년, 21년간 몸담았던 <조선일보>를 떠나 광야로 나와 3년 동안 글을 쓰며 살았다. 생계를 위해 시간강사, 케이블TV 진행자, 자유기고가 등 다양한 삶의 경험을 축적했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청와대에 들어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등 2011년 3월까지 근무했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 부위원장을 거쳐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KOBACO) 전무이사로 재임한 후, 2015년 3월부터 고려대 미디어학부 초빙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최근 나온 <내려올 때 보인다>를 비롯 <마흔이 내게 준 선물>(2011), <나의 심장은 코리아로 벅차 오른다>(2006), <한국, 너 잘났다>(2001) 등이 있다.

[출처: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5/10/06/201510060299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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