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본문화는 받아드려라! - 좋은걸 알려면 철저하게 공부를 하여야 한다. 나에게도 훌륭한 일본 선생님이 한분있다. 미국식으로 아예 친구를 만들어 버렸지만, 얼렁뚱땅 구렁이 담넘어 가는 요령을 부리던 나를 곤죽을 만들어 박사학위를 받도록 기초를 쌓아준 분이다. 내가 사는 팔로알토에도 일본절이 있다. 1년내내 조용하게, 쉬지 않고 일본문화를 알리는 행사를 하고 있고 미국인들이 늘 붑빈다. 솔직히 미국이나 한국이나 일식집은 대부분 한국사람이 운영하며 머리에 수건두루고 기모노입고 일본요리사 흉내, 아니 일본인 인척 하며 돈을 벌지 않는가? 워낙 감정에 받쳐 어거지 쌩때를 부리며 친일박멸 타령을 하는데 언제고 한번은 잔잔한 반일타령하는 한국인의 호수에 짱돌하나 던지고 싶었다. 그 짱돌을 University of Virginia에서 불교철학을 연구하고 있는 페친 지혜경(Hyekyung Jee)박사가 아래처럼 던졌다. 한번 진지하게들 생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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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본 일본, 영국에서 만난 일본은 한국에서 알던 일본과 달랐다. 한국에서 알던 일본은 우리가 문물을 전해주었던 나라였으나 조선을 식민지화시킨 나쁜 존재였다. 미국에서 목격한 일본은 전쟁직후 자신들의 불리한 상황을 문화전략으로 반전시킨 영리한 존재였다. 미국에 있으면서 '세계에서 한국사람만 미국을 무시한다' 라는 말에 담긴 의미를 체감하기 시작했었는데, 영국에 와서 나를 포함한 많은 한국인들이 얼마나 일본을 모르면서 일본을 무시하고 있는건지 그냥 깨닫게 되었다. 미술에 문외한인 나는 코톨드 갤러리에 가서야 반 고흐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이 일본 미술작품에 매료되었다는 것을 알았고, 빅토리아와 알버트 박물관에 가서야 19세기 영국에 일본풍이 유행하던 시기가 있었고, 일본 문화가 영국인의 삶과 디자인에 영향을 주었었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이 서구에서 중국만큼의 인지도를 갖게된 데는 다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지만, 특히 일본에 대해 정말 많이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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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주르! 이정아의 미술박물관 | 등록일 | 2010.03.26 | 조회수 | 10,004 |
. 글칼럼니스트 이정아이정아의 시선으로 전해주는 아름다운 예술작품의 세계는 한 마디로 '쉽다'. 러시아어가 전공인 그녀는 러시아에서 노문학을 공부하던 중 그림에 매료되었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지금은 인도, 유럽, 동남아 등 발길이 닿는 곳으로 여행중이다 |
자포니즘(japonism), 일본의 영향을 받은 19세기 화가들
프랑스 인상주의를 이끈 빛의 화가 끌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 그는 미술사상 최대 혁명이었던 19세기 인상주의 미술의 거장입니다. 인상주의는 당시 프랑스 미술사에 뿌리 깊에 박혀 있던 신고전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색채의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색채나 색조의 순간적 효과를 이용하여 눈에 보이는 빛의 변화를 표현, 전통적인 서구 회화에 대 변혁을 일으켰지요. 그리고 이 거대한 미술 혁명의 중심에 모네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말년에 대가로 프랑스 화단의 인정과 대중들의 찬사를 받기 전까지 모네는 거의 평생을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습니다. 물감을 살 돈은 커녕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울 정도였지요. 하지만 그의 곁에는 언제나 자신을 응원해주고 사랑해주는 아내 까미유가 있었습니다. 각종 살롱전에서 떨어지고 비평가들과 대중의 외면에 힘들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 모네의 유일한 생명력였던 아내. 1865년 25세였던 모네는 18세였던 까미유를 만났습니다. 화가와 모델로 만났지만 둘은 곧 사랑에 빠졌고 2년 뒤 까미유는 큰 아들 장을 임신합니다. 그러나 당시 모델은 창녀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던 천한 직업이었고 모네의 가족은 둘의 결혼은 무척 반대했습니다. 결국 가족을 떠나 까미유를 선택한 모네, 하지만 1879년 그녀는 가난으로 인해 제대로 약 한번 써보지 못한 채 서른 두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네는 까미유를 주인공으로 수많은 작품을 그렸습니다. <La Japonaise>는 까미유가 죽기 3년 전인 1876년에 그린 작품으로 당시 모네와 까미유는 파리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모네는 이 작품을 제 2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하기 위해 그렸는데요, 실제 사람 크기로 그렸죠. 그림 속에서 까미유는 화려한 일본 의상인 기모노를 입고 붉은 빛이 감도는 금발 가발을 쓰고 있습니다. 그녀는 한 손으로 일본 부채를 든 채로 춤을 추며 수줍게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데요, 이것은 모네가 일본 그림을 모방한 것으로 당시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서 불었던 일본 판화의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17세 때부터 일본 판화를 수집했던 모네는 작품 소재로 일본의 전통 의상이나 일본풍 배경을 즐겨 그린 것은 물론이고 자신의 집 벽을 일본 판화로 장식하였으며, 말년에는 파리 교외 지베르니에 일본풍의 정원을 만들었을 정도로 일본 예술에 빠져있었습니다
19세기 중반, 유럽은 일본예술의 매력에 빠져들었습니다.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일본은 자국 문화를 알리기 위해 대규모 공예품과 미술품 전시회를 열었는데, 당시 일본 도자기가 유럽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이지요.
당시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은 실로 엄청나서 여자들은 긴 기모노를 입고 다녔고 일본의 병풍과 부채로 집안을 꾸몄습니다. 당시 빛의 화가들이라 불린 인상파 화가들은 일본이 도자기를 포장하는 데 쓰였던 종이에 프린트 된 일본 에도 시대의 판화 <우키요에(浮世繪)>를 보고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특히 우물 뒤로 언뜻 보이는 후지 산의 정경이라든지 판화 속 인물들의 인체가 화면에서 일부분 잘려나가있는 등 우연적이고도 파격적인 모습은 유럽 회화의 기본적인 규칙인 원근법과 인체가 잘리지 않도록 하는 구성을 과감하게 무시했다는 면에서 당시 화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게다가 광택있는 평면과 강렬한 색채, 과감하게 단순화된 외곽선과 평면적인 디자인은 이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했죠. 이러한 일본 풍속화를 보며 화가들은 새로운 화풍을 전개했습니다. 바로 19세기 후반 서양 미술에 나타난 일본 미술의 영향, 즉 ’자포니즘(Japonisme)’은 이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주로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미국미술과 유럽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했던 화가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 역시 일본 판화를 수집하며 일본 미술에서 평면적인 색채 효과를 배웠습니다. 그의 그림 <도자기 왕국에서 온 공주> 속 모델 역시 일본의 기모노를 입고 일본식 부채를 들고 있는데요, 마치 일본 판화 속 여인을 연상시키는 모습이죠. 휘슬러 역시 일본 문화의 열광을 했던 화가로 그는 이 작품을 그릴 때 그림에 어울리도록 기모노와 일본의 금빛 병풍 등을 직접 만들 정도 였다고 합니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 역시 우키요에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주로 ’구도’에 있어서였습니다. 회화뿐만 아니라 조각 소묘 등에도 능했던 드가는 인상주의 그룹에 속하면서도 또 나름대로 그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정립했던 화가였죠. 인상주의가 빛과 색의 자유를 추구했다면 드가는 공간 혹은 구도의 자유를 추구했던, 말하자면 구도의 미학의 소유자였습니다.
<경마들의 행진>은 드가가 추구했던 이러한 예술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훌륭한 걸작이라 할 수 있는데요, 드가는 1860년경 이후부터 당시 귀족들에게 인기 있는 스포츠였던 경마를 주제로 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요, 주로 중요하지 않은 순간, 즉 경기가 시작하기 전이나 후의 모습을 그렸죠. 이 작품은 경마를 시작하기 전 기수들의 흥분된 서성거림을 마치 힐끗 바라본 순간을 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그 구도가 파격적입니다.
중앙은 비어있고 관중은 왼쪽에 몰려 있으며, 정작 주인공이라 양편 가장자리에 배치되어있어 마치 그림의 주제가 필드를 가득 메운 그림자들인 듯한 착각이 들 지경입니다. 잘린 것 같은 우연적인 효과는 마치 스냅사진을 보는 듯 느껴지는대요, 드가가 시도한 이러한 구도는 우끼요에의 구도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죠.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유명한 화가로 불꽃같은 삶을 살다 간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 역시 방 안을 우키요에로 가득 채울 정도로 일본 판화에 빠져있었습니다. 고흐의 우키요에에 대한 사랑은 남달랐는데요, 수많은 작품에 우키요에를 그려 넣었고, 심지어 우키요에에 거의 표절에 가까운 작품들을 만들어내기도 했습니다.
1887년 파리, 고흐는 동생 테오의 소개로 알게 된 화방 주인인 쥴리앙 탕기 영감으로부터 건네받은 일본 목판화의 새로운 세계에 매료됐습니다. 캔버스나 서양의 두툼한 화지와는 사뭇 다른 얇은 일본종이에 인쇄된 다색목판화인 우키요에는 당시 새로운 예술을 갈구했던 고흐에게 새로운 영감의 원천으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1년 뒤, 고흐는 <탕기 영감의 초상>이라는 작품을 그립니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히로시케의 후지산 그림과 1886년 파리 신문의 표지였던 일본 궁녀 등 우키요에에서 모티브를 딴 이미지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흐는 우키요예의 특징인 연속적인 평면 구상과 단순화된 모티브, 색채의 대비 효과를 통해 자신만의 개성적인 화풍과 붓놀림, 화려한 색채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19세기 화가들의 작품 속에서 나타나 있는 기존의 전통을 깨는 혁신적인 요소들은 우키요에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열풍을 일으켰던 우키요에가 사실 일본에서는 서민층이 즐기던 풍속화로 천대시 받고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그림들이 파리는 물론 전 유럽의 미술 세계를 휩쓴 ’자포니즘’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전시된 프랑스 파리의 오르세 미술관과 고흐의 그림이 전시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미술관에 일본인들이 그렇게 몰려드는 것이 이해가 되면서도, 만약 모네나 고흐와 같은 거장들이 한국의 김홍도, 신윤복의 산수화와 풍속화를 보았더라면 어땠을까 궁금해지네요.
출처: bookd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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