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풀빵장수와 호떡장수

忍齋 黃薔 李相遠 2016. 3. 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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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학창시절에 풀빵장수와 호떡장수를 했다는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쓰자 '뻥(?)'까지 말라는 지인이 있어 내입으로 떠드느니 그 시절 동업했던 친구의 손을 빌려 뻥친게 아님을 보여주겠다. 글에서 그친구는 풀빵장수의 실패이야기를 했는데, 그건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는 원래 호떡장수를 하기로 하고 호떡장수들을 찾아다니며 영업기술과 호떡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그런데 그 두 친구는 돈이 좀 부족하다는 이유로 풀빵장수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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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망하겠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피눈물로 배우라고 함께 풀빵장수를 최선을 다해서 했고 두친구가 떨어져 나가서 나는 다시 호떡장수를 해서 여행도 가고 학비도 벌고 했던 이야기를 그 친구가 회고한거다. 참고로 우리는 육사를 가서 혁명을 하여 나라를 구하기로 했는데 난 박정희의 죽음을 보고 육사입교를 포기했고 이 친구는 아쉽게도 중령제대를 했다. 또 한 친구는 공사를 갔다가 때려치고 나왔다가 군복무를 하사관을 했고 사회생활을 하다 먼저 요단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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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과 연관되어 고문받고 감금되고 감시받고 하면서 부터 2003년 5.18민주화유공자로 명예가 회복될때까지 무려 23년간 난 친구들과도 연결되어 살지를 못했다. 그 23년의 공백이 가슴벅찬 친구들과의 추억으로 얼룩지지 못해 가슴을 터놓고 서로 맞아줄 친구의 공백이 아쉽다. 난 아직도 어릴적 친구들 근처를 맴돌며 우정을 구걸하며 살고 있다. 이게다 그 망할놈의 아니 죽일놈의 살인마 전두환 때문이다. 내 청춘 돌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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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빵 장사]
출처 : 장훈고일사회 | 글쓴이 : 신 준
고1 겨울방학이 되며 지낼곳도 없었던 소년에게 좋은 기회가 생겼다.
그당시 교과서 대금중 일부를 착복하려 했던 비리가 발각되어 납부한 대금중 일부가 학생들에게 환불되었다. 돈은 단과학원 한달 비용 정도 였다. 그돈으로 무얼할까 생각하던 중에 지난 여름방학때 무전여행을 해봤다는 한친구가 풀빵장사를 해서 돈을 벌어 여행을 가자고 제안을 해왔다. 환불받은 금액으로는 여행을 갈수 없고 한달 독서실 비용도 되지 않았기에 소년은 그친구 제안대로 그돈으로 풀빵장사에 필요한 밑천으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동업자 3명이 먼저 영등포 시장에 가서 호떡장사 하는 사람들에게 하루 수입액과 장사 준비에 얼마가 드는지를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장사밑천은 3명이 환불받은 금액으로 가능하였고 하루 수입도 생각보다 많아 소년은 돈을 벌어 여행을 갈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게 되었다.
영업장소는 친구 아버지가 하는 경기도 부천의 화원 부근이었다. 셋은 풀빵 만드는 장비를 구입하여 그곳으로 갔다. 숙소는 화원관리실로 사용했던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던 청년과 같이 지내기로 하였다. 가서는 먼저 식량과 풀빵을 만들 재료를 사와서 장사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풀빵을 만들 시설물은 화원에서 비료를 나르는 리어카에 설치하였다. 그런데 막상 풀빵에 들어갈 밀가루 반죽과 팥을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특히 밀가루 반죽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장사하는 이들에게 물어보지 않아 실패를 반복하다 우선 되는대로 만들어 장사를 나가기로 하였다. 그들에게는 식량이 며칠 먹을 분량 밖에 없었다. 돈이 없었기에 나중에 풀빵을 팔아 번돈으로 사다 먹기로 하였다.
처음 장사를 나갔던 곳은 어느 극장앞이었다. 지금은 번화가가 되었지만 당시는 허허벌판에 극장 건물만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영화보러 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기본 매출은 되리라 기대했었다. 저녁 5시부터 영업을 시작했는데 3시간이 지나서야 손님 두명이 와서 풀빵 한개를 먹고는 한개 값만 치르고 가버린 후, 두시간이 지나 두명이 왔는데 또 한개씩만 먹고는 가버렸다. 결국 그날 밤 11시까지 총 매출액은 풀빵 4개값 80원 이었다. 영등포 호떡장사 아저씨가 말한 하루 매출액의 0.2%밖에 안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왜 사람들이 와서는 풀빵을 한개씩만 먹고 갔을까 하며 자신들이 먹어보고는 손님들이 그냥 가버린 이유를 알게 되었다. 왜냐 하면 자기들도 그 풀빵 먹는것이 고역이었으니까.
다음날에는 좀더 반죽에 신경을 써서 만들어 장사를 나갔다. 그랬더니 전날 보다는 나은 800원 이었으나 그것 가지고는 끼니 조차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장소를 관람객이 별로 없는 극장앞 보다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마을 입구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와중에 동업자중 한명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소년은 갈곳이 없었기에 계속 남아서 장사를 하기로 했다.
마을 입구로 옮기고나니 매출액이 몇천원대로 올랐으나 소년은 여행갈 경비는 모을수 없고 그저 끼니나 해결할 정도여서 그만두겠다 하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갔다가 다시 오니 그친구는 호떡으로 메뉴를 바꿔서 장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마을 어귀의 괜찮은 목에 자리를 잡은 데다가 넉살이 좋아 마을의 젊은 여성들에게 호감있게 대하여 고정손님을 어느정도 확보할 정도로 나아져서 소년은 다시 같이 영업을 하기로 하였다. 그만 두었었기 때문에 동업자가 아닌 종업원자격으로 하게 된 것이다.
여행갈 비용은 벌지 못했지만 끼니는 밥으로 해결할수 있었고 이따금씩 간식도 사먹으면서 겨울을 보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소년에게는 여지껏 사회생활을 해본 유일한 경험이었고 장사를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배웠으며 혼자서도 삶을 살아갈수 있는 자생력을 키웠던 소중한 기간이었던 것이다.
그때는 장사가 잘 안된 이유를 몰랐으나 성인이 되어 풀빵장사 시절의 사업분석을 해보니 경영 기법을 조금은 알게 되었던 것이다.
첫째, 음식장사를 하려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메뉴로 해야 하고
둘째, 일단 맛이 있어야 하며
셋째, 맛있게 만들줄 알아야 하고
넷째,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해야 하며
다섯째, 손님들에게 호감이 가게 친절하게 대해야 또 오고
여섯째, 언제라도 들리면 먹을수 있도록 항상 정해진 시간과 장소에서
영업을 해야 단골손님을 잡을수 있으며
일곱째, 손님들의 반응을 듣고 계속해서 보완시켜 나가야 하고
여덟째, 손님을 통해서나 각종 방법등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홍보를 해야 손님이 증가하는 것이고
아홉째, 의식주는 기본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되어야 장사가 안되는 기간에 버틸수 있으며
열번째, 같이 일하는 사람들에게 명확한 목표와 수행방법, 그리고 수익에 대한 보상에 대해 이해시켜야 그들도 주인 맘과 같이 열심히 일한다는 것 등 이었다.
집이 없어 쉴곳이 없었던 시절 풀빵장사를 했던 기간에 소년은 좁은 비닐하우스에서 자며 장사를 해서 번돈으로 쌀을 사서 밥을 해먹으면서도 행복하게 보냈다. 스스로 일해서 벌어 먹었기 때문일까.
소년은 지금도 그때 맘편히 먹고 자던 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푸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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