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1. Dr. Sam Lee/14_외국이야기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국부 장개석의 격하운동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5. 3. 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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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장개석(蔣介石)과 2·28 사건(二二八事件)

1895년 4월 17일,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만주, 대만과 펑후 제도(澎湖諸島)는 일본 제국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일제는 대만 총독부를 설치하여 50년간 대만을 지배했습니다. 1945년 8월 일제가 망하고 그 해 10월 17일 장개석의 국민당군이 모택동의 공산당군을 피해 대만으로 피신함으로써 중화민국은 대만섬과 펑후 제도를 영토로 두게되었습니다. 오합지졸의 국민당군의 군사통치하의 대만은 원주민인 본성인(本省人)과 중국 대륙에서 이주한 외성인(外省人)의 극심한 분열과 대립을 겪게 됩니다. 특히, 일제가 빠져나간 관직을 대부분 외성인들이 차지하면서 정치구조의 상부를 외성인들이 독점하고 본성인들은 수적 우세를 바탕으로 지방정치체제에 참여하는 독특한 정치구조가 만들어졌습니다.

본성인들은 외성인의 절반에 불과한 월급을 받았는데, 이는 일본의 식민 통치 시대에 본성인이 일본인 월급의 60%를 조금 넘게 받았던 것보다도 더 극심한 차별이었습니다. 또한 식민지 시기 일본인 가옥들을 외성인이 대부분 차지하면서 외성인과 본성인 사이에 거주지역의 구별도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모택동의 공산당군을 피해 대만으로 도망 온 약 60만의 하층계급 국민당 군인들이 도심 주변에 거주하게 되면서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이들은 1949년 이후 대만에서 중화민국 정부를 유지시킨 장개석 국민당의 절대적 지지기반의 반공투사들이 되었습니다.

1945년 10월 25일 대만 주둔 일본군은 중화민국 소속 국민당군에 정식으로 항복하였고, 이날부터 대만은 중화민국의 영토가 되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50년간 일제의 지배와 수탈을 받던 대만 본성인들은 국민당 중화민국 정부에 대한 기대가 컸지만 그들의 통치는 본토에서와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일제의 식민통치보다 더 가혹했습니다. 1947년 2월 27일 밤, 타이베이(臺北)시 위엔환(圓環) 빌딩 안의 복도에서 정부의 전매(專賣) 독점품인 담배를 노점에서 팔던 린쟝마이(林江邁)라는 여인이 허가받지 않고 담배노점을 벌였다는 이유로 담배주류공사의 직원과 경찰에 의해 단속되었습니다. 탈세를 빌미로 담배주류공사의 단속반원이 담배를 팔던 여인을 상대로 총신으로 머리를 때리는 등 심한 구타를 가하자, 주변에 있던 시민들이 과격한 단속행태에 항의하면서 충돌이 빚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이 항의하는 군중에게 발포하였고, 경찰이 쏜 총에 학생 한 명(陳文溪)이 사망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1947년 2월 28일, 사망 소식을 듣고 분노한 군중들이 발포공무원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며 대만에 들어와 있던 중화민국 경찰과 군부대 본부를 에워싼 채 시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만 경비총사령 천이(陳儀)는 시민들의 주장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시위를 빌미로 타이베이시에 임시 계엄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급기야 경찰서에 난입, 경찰들을 구타해 경찰관이 사망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천이의 집무처로 밀려든 시위대를 향해 군(軍)이 기관총소사를 퍼부어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시위는 타이베이 시내 도처에서 파업, 폭동, 무기고 습격 등의 양상으로 확대되었고, 분노한 시위대는 방송국을 점거하고 대만 전 주민이 궐기할 것을 외쳤습니다.

이것이 이른바 '2·28사건'입니다. 2월 28일 당일에는 타이베이 시 전역에서 파업과 철시 및 데모대의 시위가 시가지를 휩쓸었고, 3월 1일 이후 시위는 타이완 전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 1년 반 동안 쌓인 민중의 분노가 폭발하여 봉기는 삽시간에 대만 전역에 퍼지고 3월 2일 타이완의 지식인들은 각지에 '2·28 처리위원회'를 구성해 담배 전매 폐지와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요구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타이베이시 참의회는 사태 해결을 위해 당일 오후 2시에 긴급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의회에서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담배 단속 살인사건 조사위원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리고 대만 성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 천이는 방송을 통해 다음 4개 사항을 공표하였습니다.

1. 계엄은 즉시 해제한다.
2. 체포된 시민은 석방한다.
3. 군인과 경찰의 발포를 금한다.
4. 참의원에서 대표를 추천하여 정부 관리와 같이 공동으로 처리위원회를 구성하여 이번 폭동 문제를 처리토록 한다.

무차별 발포를 한 군·경을 대신하여 학생과 청년들로 조직된 치안 봉사대가 치안을 유지하고 처리위원회의 공정한 조사가 진행되면서, 3월 4일 이후 사태는 서서히 진정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처리위원회에 대한 대만 주민들의 지지가 더해지면서 그 권위가 높아지자, 처리위원회는 2·28 사건에 대한 수습을 넘어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요구하면서 이를 타이완의 자치와 인권보장을 요구하는 '32개조 요구'로 구체화시켰습니다.

그러나 대만 내의 병력만으로는 시위의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한 천이는 주민들을 상대로는 타협적인 제스처를 보이며 시간을 벌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장개석에게 대륙에 있는 국민당군의 조속한 증파를 요청했습니다. 국공내전 중이었음에도 장개석은 폭동이 정부 전복 시도로 이어지고 있다는 천이의 보고에 따라 3월 8일 증원군을 대만에 파견했습니다.

국민당군의 증원군이 도착한 1947년 3월 8일부터 대만에서는 대대적인 유혈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당일 새벽 두 시에 대만 북부에 투입된 국민당 군 21사단은 곧바로 타이베이시에 진입해 시위대 진압을 개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본성인 사상자가 속출하고 본성인 출신 지식인과 2.28 사건을 수습하고자 모였던 주민대표자들 상당수가 살해, 체포 또는 실종되었고 일부는 도망쳤습니다.

진압은 10여 일간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고, 본성인 약 3만 명이 살해, 실종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3월 8일 가오슝(高雄), 3월 11일 지룽(基隆), 타이난(臺南), 3월 12일 자이(嘉義) 등에 진입한 국민당의 경찰과 계엄군은 대만 본성인에 대한 무차별적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이러한 대규모 살육과 약탈은 3월 17일 국방부장 바이충시(白崇禧)가 대만에 도착하여 조율에 나선 후 3월 21일이 되어서야 진정되었습니다. 진압과정에서의 학살과 약탈로 인해 타이완은 섬 전체가 초토화되었고, 장개석은 '2.28 사건 처리 위원회' 인사들의 체포를 명령하고 위원회의 구성원 상당수를 처형했습니다. 5월 16일 장개석이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함으로써 2.28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40년 동안 대만에서 2·28 사건은 언급하는 것 자체가 최대의 금기처럼 여겨졌습니다. 국공 내전에서 패퇴한 중국 국민당은 1949년 12월에 국민당 중화민국 정부를 타이베이로 옮겨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내전의 패색이 짙던 1949년 5월 1일 타이완 섬 전체에 걸쳐 총호구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같은 달 21일에는 계엄령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해 말부터 위험 분자로 간주된 이들이 대거 체포됐습니다. '타이완을 보위하고 대륙(중국 대륙)을 공격한다'(反攻大陸)는 총 구호하에서 내전을 반대하거나 국공 평화 회담을 주장하거나 평화 건설과 민생 문제를 개선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이나 언론은 무조건 중국 공산당의 간첩, 파괴 분자, 음모 분자로 간주되었습니다.

1949년 5월 21일 타이완 전역에 발포된 계엄령은 38년 동안 계속되다가 1987년 7월 15일이 되어서야 장경국(蔣經國) 총통의 명령으로 해제되었습니다. 계엄령이 지속되면서 금기 중의 금기가 되어버린 이 사건은 1988년 타이완 출신인 리덩후이(李登輝)가 총통에 취임하면서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랜 논란을 거쳐 1995년 리덩후이 총통이 국가차원에서 희생자 가족에게 사과하였고, 사건 발생 50주년인 1997년에는 중화민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타이베이에 기념공원이 세워졌습니다.

아직도 2.28 사건 사망자의 정확한 숫자는 알 수가 없습니다. 1991년 리덩후이 총통의 지시로, 이듬해 행정원이 발표한 「2·28 사건 연구 보고」에 따르면 2·28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3만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될 뿐입니다.

이 사건은 '국부(國父)'격인 장개석이 직, 간접적으로 연루된 사건이라 논쟁이 끊이질 않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건 발생 60주년인 2007년에는 장제스가 이 사건의 학살을 지시했다는 연구 결과까지 나왔습니다. 대만에서 진보성향이거나 민주진보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장개석을 기념하는 기념관인 중정기념당을 폐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건 발생 70주년인 2017년 들어 대만 전역에 산재한 장개석의 동상은 파괴되어 손상되어 80%이상의 동상이 자진 철거되었고 남아 있는 동상들 조차 완벽하게 보존된 것들이 없습니다.

반공을 국시로 장기 철권통치를 이어온 국민당 중화민국 정부는 이제 중화민국을 국민당이 독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코메디처럼 장기 철권통치에 이용했던 반공을 버리고 중국 공산당과 형제당을 자처하며 하나의 중국타령에 나서고 있습니다.

(참고: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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