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조총련 제1부의장을 역임한 이진규(李珍珪)

忍齋 黃薔 李相遠 2017. 12. 13.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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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군 동탄면 석우리 한산이씨로 서울 필운동으로 이주한 한산이씨 중에 이진규(李珍珪)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1917년 동탄 석우리에서 외아들로 출생하여 조카벌 되는 수원농림을 나오고 만주국 농림국 미곡검사관을 하던 이성구의 도움으로 22살 때인 1939년 일본 오사카로 이주한 이진규는 주경야독하며 대학을 졸업하고 교사로 재직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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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규는 임영준, 박준송, 이은직, 임광철, 윤기선 등을 이끌고 1946년 9월에 오사카에 조선학교 교원 양성소를 설립하고 '인민 한글 교본'을 제작하여 조선어 교원을 양성합니다. 그리고 일본 도쿄 아라카와에 최초의 조선학교인 '조선 제1초중급학교'를 세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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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에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남한의 모습에 좌절하여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남은 조선인들을 위해 민족교육의 길에 나서게 됩니다. 그리고 친일파를 완전하게 소탕한 북한을 순수하게 독립한 국가로 인정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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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에 일어나 1972년에 종결된 '김병식 사건'으로 이진규의 재일 조선인 교육사업에 많은 비판과 비방이 있었고 조직이 많이 와해가 되기도 했지만 이진규는 한사람 한사람 만나 오해를 풀고자 노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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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출신 한덕수, 서만술, 허종만 등을 규합하여 재일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를 결성을 주도하여 일본 전역에 조선인 대학교 1곳(조선대), 조선인 고등학교 12곳, 조선인 중학교 56곳, 조선인 초등학교 83곳, 그리고 유치원 66곳을 설립합니다. 그 공로로 1960년 8월에는 북한의 국기훈장 3급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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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조총련 중앙위원회 의장에 선출됩니다. 1961년 5월과 1967년 11월에는 조선대학교 부학장을 역임하고 1968년 4월에는 학장에 취임합니다. 그 사이 1963년 9월에 북한 국기훈장 2급을 받습니다. 그리고 1967년 11월에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4기 대의원에 선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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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1월에는 북한 국기훈장 1급을 수여 받고 그해 12월에 또다시 북한 최고 회의 5기 대의원에 선출됩니다. 민족교육에 헌신하려는 이진규의 뜻과는 달리 북한 정권의 신뢰를 확보하려는 한덕수를 비롯한 조총련 지도자들의 의도에 의하여 1973년 1월 조총련 중앙위원회 부의장에 선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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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연속하여 1977년 1월 북한 최고 회의 6기 대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1982년 2월 북한 최고 회의 7기 원산지역 대의원으로 선출됩니다. 그해 3월에는 김일성 훈장을 수여 받습니다. 그 여세를 몰아 그해 12월에는 평양에서 개최된 '사회주의 헌법'발표기념 중앙대회에 참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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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6월에는 조총련을 1인 지배 체재로 구축한 한덕수 의장에 의해 20명의 부의장 중에 제1 부의장에 선출이 됩니다. 1984년 4월에는 김일성 주석 생일 축하 조총련 단장으로 평양을 방문합니다. 1986년 11월에는 북한 최고 회의 8기 서흥지역 대의원으로 선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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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9월에도 조총련 제1 부의장에 연임합니다. 1990년 4월에도 북한 최고 회의 9기 내문지역 대의원으로 선출됩니다. 1990년 8월에는 조국통일상을 받습니다. 1992년 5월에도 조총련 제1 부의장에 연임합니다. 그리고 그해 12월 북한의 최고명예인 '노력 영웅' 칭호를 수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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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4월에는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 82회 생일 기념 중앙보고 대회에서 연설을 합니다. 1995년 7월 5일에는 김일성 주석 사망 1주기 행사에 참석합니다. 1995년 9월 제17차 조총련 전체 대회에서 제1 부의장으로 재선출됩니다. 그리고 그달 21일 77세를 일기로 타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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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9월 22일 북한은 중앙인민위원회와 조국 전선 공동명의로 '이진규 사망에 관한 부고'를 발표하며 국가 차원의 애도를 표합니다. 그리고 고위급 인사로 구성된 이진규 봉환 위원회가 이진규의 시신을 공수해 오도록 하여 1995년 10월 13일 평양 형제산구역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최고의 예우를 다하여 안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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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안장식에는 양형섭(楊亨燮) 최고인민회의 의장, 김용순(金容淳) 당 중앙위원회 비서, 장철(張澈) 부총리, 김수익 해외동포영접총국장 등이 참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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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련을 1인 독재화했던 한덕수는 이진규라는 방패막이 없어지자 북한과 척이지고 북한의 소환령을 거부하다 숙청된 후 일본에서 작고했습니다. 또 북한을 맹종하는 허종만 체재의 조총련은 재일 조선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조총련은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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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총련이 정치적인 부침에 따라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이진규가 조선인 교육을 위해 설립한 조선대학교와 조선학교들은 건재하고 있고 건재해 갈겁니다. 재일 조선학교에 서린 이진규의 민족사랑과 그 정신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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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규는 조총련을 설립했고 일본 전역에 218개에 달하는 민족학교를 설립했으며 조선대학교를 설립하여 일본 내의 민족교육의 반석을 만든 북한의 노력 영웅 이었습니다. 이제는 민족적인 인사에 대해서는 남과 북을 떠나 바로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시절이 도래하지 않았나 여겨져서 한산이씨 이진규 전 일본 조선대학교 학장이자 전 조총련 제1 부의장 이진규 선생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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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로서 이진규 선생


조총련 제1부의장이었지만 오로지 민족교육에만 헌신한 이진규 선생. 왼쪽에서 두번째.


조선어 교재 편집회를 주관하는 이진규 선생.


이진규 선생의 손길을 거친 초중고 조선어 교재


조선인 교원양성에 헌신한 이진규 선생.


수십만 재일 조선인 제자를 양성한 이진규 선생.

   


한산이씨 인재공파 족보상에 보이는 이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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