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 이민간 고등후배 장영필 군이 페이스북에 올리는 이야기들이 맛갈집니다. 한국에서 잡지기자를 했던 이력때문인지 이야기를 풀어가는게 심층적이고 분석력이 뛰어납니다. 오늘은 후배 친구 3명의 삶을 풀어내고 있고 그중 3번째는 저도 잘 아는 강재형 아나운서의 이야기이기도 하여 이곳에 갈무리해 보았습니다. 2017년의 마지막 자락에서 지난 삶을 돌아보고 앞날을 준비해 보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갈무리 해온 이 주)
한 해가 지나갑니다. 이곳에서 산 지 10년이 넘어가는데, 해가 지날때 마다 몇몇 친구들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그 친구들이 살아온 삶의 궤적을 생각해 보면서, “만일 그 친구들이 한국에서가 아닌 사회 시스템이 다른 외국에서 살았었다면, 어떠했을까 ?” 를 생각해 봅니다.
친구 1,
어린 시절부터 공부를 잘했습니다. 저희 영동고 수준까지는 아니었지만(?) 강북 근처 모 고교 이과에서 전교 5위 정도로 졸업했습니다. 대학 입학 고사(81년도 당시, 학력고사로 불렸나 ? 하여간, 대입 예비고사를 말함) 예상 성적이 340점 만점 시절에 300 점 정도였습니다.
시험 당일, 마지막 4교시 과학과목 답안지( 그 당시는 OMR)를 제출하면서 인생이 변하였습니다. 답안지 작성을 마친 후, 필기구 뚜껑(검은색 싸인펜)을 닫는 순간, 답안지를 걷어가는 감독 선생님이, 실수로 친구의 손을 건드리는 바람에, 답안지 한 구석에 검은색으로 선이 그어졌습니다. 이미 시험 종료 벨은 울리고,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감독 선생은 망연 자실한 친구를 위로하기는 커녕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냥 쌩까면서 교실을 떠났습니다.
결국 가장 배점이 높았던 마지막 4교시 답안지는 0점으로 나왔습니다.
SKY 대학 상위권 이공계를 당연히 갈줄 알았던 친구의 인생은 한 순간에 변했습니다.
제가 이곳에서 살면서 가끔 그 친구가 생각납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정말 뛰어난 이공계 인재였습니다. 물론 그런 사고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좋은 대학 이공계로 가서 말만 하면 다들 아는 좋은 직장에서 수십년 동안 엔지니어로 일했지만, 한국 사회에서 “학벌”의 의미는 상당한 것입니다. 만일, 그 친구가 이곳에서 그와 유사한 일을 겪었다면 ?
이래서 사회적 시스템과 약자에 대한 보호장치가 중요한 법입니다.
친구 2,
어린 시절부터 집안이 가난했다고 합니다. 고교 입학이 2년이나 늦어 저희들과 함께 고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졸업당시 영동고 문과에서 전교 5위였습니다. 전국 랭킹 100위안에 드는 성적이었습니다. (참고로, 그 당시 영동고 이과 수석이 전국 차석이자 서울대 공대 수석 입학이었습니다)
이 친구의 목표는 육군사관학교였습니다. 4년 전액 장학금에 취업까지 집안에 신세 안지고 자신의 노력으로 생활하고자 헀기 때문입니다. 물론, 체력 또한 좋았기에 군인이 되고 싶었던 이유가 제일 강했습니다.
육군 사관학교 역사상 81년도 입학 경쟁율이 제일 치열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전두환 일당이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후라, 아들의 미래를 위해(?) 선견지명있는 전국의 학부모들이(물론, 주로 그 쪽 동네 사람들이겠지요 ?) 육사 입학 사정에 달라붙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경쟁에서 탈락한 이 친구가 졸업식이 있기 며칠전, 운동장 한 구석에서 울면서, 제게 한 말이 지금도 기억 납니다.
“내가 떨어진 것은, 가난 떄문이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이유를 찾지 못하겠다.”
그 친구, 지금 모 대학에서 법대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많은 고교 동기들이 다같이 한 목소리로 칭송하는 그 친구의 인간성, 81년도 육군 사관학교 입학 사정 당시 자기들 마음대로 주물렀던 그 학부모들의 자녀들은 지금도 굳건히 휴전선을 지키고 있겠지요 ? (쓰발 놈들, 정작 군인다운 군인들은 하나도 없으면서)
친구 3,
전해 듣기로 초등 시절부터 마이크 잡기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마이크 잡는 것을 좋아하는 부류는 크게 두가지, 일명 딴따라 가수 아니면 아나운서.
고교 입학하자 마자 교내 방송국 시다부터 시작하면서, 매일 점심시간이면 교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그 친구의 재미없는 그러나 TV 아나운서같은(?) 발음을 들어야 했습니다.
전해 듣기로 대학 졸업 당시 친구들과 함께 학교앞에서 막걸리집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 친구 대학 후배의 전언에 따르면, 졸업 후 무직을 예상하던 시절이라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고 함) 이 친구가 인간성이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많은 후배들이 막걸리 집 매상을 올려주기는 했으나, 평생 국어공부만 헀던 이 친구는 “수금, 외상”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접했다고 합니다(?). 결국, 6개월만에 매상 많이 올려준 후배들이 막걸리집을 접수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부조리한 현실과 타협하지 못하던(?) 이 친구는 방송국에서 일하면서 맞닥뜨리는 상부의 불합리한 처사와도 타협하지 못하여, 마치 안기부 직원마냥 수년간 음지에서 고생하면서 한국어를 “항쿠커”로 발음하는 딴따라 가수들같은 이들을 그저 쳐다봐야만 헀습니다.
얼마전, 한국어 발음의 표준을 지키는 TV 아나운서들의 수장에 올랐습니다. 딴나라에서 딴나라 말을 들어보면, 그나마 누가 발음을 분명하게 하는 지를 구분할 수 있습니다. 제게는 아주 중요한 문제입니다.
한국어를 공부하는 외국인이 한국 TV에 나오는 제 친구의 발음과 표현에만 익숙해져 있다가, 난데없이 거래처 한국사람이 “그랑께 ! 시방 그거이 뭔 말이란가 ?” 라고 말하면, “알아먹기 졸라 힘들지 않겄어요 ? “
어린 시절부터 마이크 잡고 아나운서 흉내내던 그 친구, 지금은 한국어 발음과 표현의 스탠다드가 되었습니다. 이래서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어린 시절 적성의 조기 발견이 중요한 법입니다. 그러니 “친구따라 강남간다”고, 마치 동원 야비군 마냥, 남들이 어디 간다고 해서 기거이 사격장인지 식당인지도 모른채 아무 생각없이 따라만 가지말고, 자신의 길을 걸어갈 수있도록 다양한 경로들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가 중요하냐 ? “다양성(Diversity)”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저처럼, 전교 꼴찌였음을 부끄러워 하지 맙시다 ! 인생 살아보니, “첫끗발이 개끗발”인 경우, 많습디다. 그러니 인생 100세시대라는데, 나중에 내 묘비명에 어케 씌여질 것인가 ! 이것만 생각하고 삽시다 ! ㅎㅎ
내년 한해에도 많은 성원 바랍니다. 전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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