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창호군은 그의 쌍둥이형 오창익군과 더불어 내 고등학교 시절 전교생이 기억하는 명사였다. 풍체도 좋은 쌍동이 형제가 교련검열 훈련때면 위풍당당하게 교련복을 착용하고 앞자리에서 교련사열을 인도하던 모습을 동창들은 나처럼 기억한다. 두 형제는 나란히 인하대학교로 진학했고 또 나란히 유학나오기 힘들던 시절 미국유학을 감행했다. 그시절 유학이란 미국대학에 입학허가서를 받았다해도 문교부시행 유학시험도 치루어 붙어야하고 무엇보다도 소지하고 나갈수있는 달러의 한계가 있어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유학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가시밭길이었던 시절이었다. 아무튼 이 두형제는 유학에 성공했고 형 오창익군은 카이로프랙틱 닥터가 되었고 동생 오창호군은 컴퓨터 사이언스 학위를 받아 마이크로소프트사를 거처 지금은 스타벅스 전산실에 엔지니어로 근무하며 워싱톤주 시에틀인근에 정착을 했다. 그동안 부모님도 모셔오고 가정도 꾸리고 자녀들도 훌륭하고 번듯하게 키워냈다. 신앙심도 돈독하여 가끔 페이스북에는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성숙한 글들도 올라온다. 또한 질풍노도와 갔던 우리의 20대의 추억의 공유도 피해갈수 없는 부분이다. 여기 오창호군의 각시 김정완이 격은 1987의 진한 기억을 공유한다. (퍼온이주)
드디어 내일 영화 1987년이 시애틀 지역에 개봉되는 첫날,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딸아이에게 아빠와 엄마가 겪은 역사, 특히 더 엄마에게 특별한 1987년을 보여주려고 함께 간다.
아래는 아내 Kim J Oh(김정완)가 겪은 1987년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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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기억속의 1987년 ]
나는 1986년 연세대학교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신촌 연세의료원 신경외과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내 기억속의 1987년의 일상의 일부는 출퇴근길에 늘상 만나던 빈번한 데모와 지워지지 않는 매케한 최루탄 냄새였다.
어느 날 출근을해보니 이한열 연세대학교 후배가 데모 중 중상을 당해 내가 일하고 있던 신경외과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다. 침대 9개가 있던 중환실의 9 번째 침대에 누워 있었던 것같다.
이날부터 출근할 때는 병원 입구 멀리부터 전경들이 양쪽으로 진을 치고 있었고 병원 내 신경외과 중환자실 앞에는 이한열 환자의 가족 그리고 많은 연세대 재학생들이 밤낮으로 복도 양쪽을 가득 채우고 앉아 지키고 있었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하루에 두번 짧게 주어지는 면회시간에 이한열 환자의 어머니께서 하얀 면회 가운으로 갈아입고 들어오셔서 건장한 몸이지만 혼수상태였던 아들의 얼굴과 몸을 울면서 쓰다듬으시던 애처러운 모습은 아직도 마음을 아릿하게 하는 기억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뒤에서 같이 일하던 간호사들과 함께 눈시울을 적시곤했다.
이한열 환자 나이 또래의 자녀를 둔 간호조무사분들은 자기 일처럼 마음 아파하며 ‘어서 일어나야지’ 같은 격려의 말씀을 하며 정성스레 씻기고 돌보아주셨다. 그리고 치료를 직접 담당한 의사들, 수련의 그리고 간호사들도 환자와 가족에 대한 애처로움과 사건이 벌어진 시국을 향한 안타까움으로 더 열심히 진심으로 환자의 소생을 위해 최선을 다했었던 것 같다.
이한열 환자가 세상을 떠난후 얼마 되지않아 연세의료원에 항상 들어오던 잡지사로부터 이열사의 간호 수기를 써달라는 의뢰가 수간호사님을 통해 들어와서 그를 간호했던 한사람으로써 글을 써서 제출하고 전혀 기대치도 않았단 원고료까지 받아 병동 스태프 점심값에 보탰었는데 무슨 이유였는지 그 이후로 그 잡지는 우리병원에 들어오지 않았고 나 역시 내가 쓴 그 글이 실린 잡지를 읽어보지도 못했다.
88년에 유학생이던 남편과 결혼해 미국에오고 시애틀에서 정착하여 이민자로 살아오면서 오랜동안 한국의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 2016 촛불시위 현장 중계와 국정농단 청문회를 남편과 밤을 새워가며 시청하던 중 어느날 세월호 참사 희생자 부모님들을 위로하며 철저한 조사를 촉구하는 이한열 열사 어머니의 진심어린 호소를 티브이를 통해 들으며 나는 기억 속에 묻혀 있던 1987년 그 때를 다시 생각했었다. 그리고 사회정의나 정치에 애써 무관심하려 했던 나의 젊은 날을 아쉬워하며 시애틀에서 있었던 국정농단 규탄 촛불시위와 세월호 1000일 추모 집회에 미국에서 출생한 고등학생 막내딸까지 데리고 남편과 같이 참여하게 되었다.
1987년 영화가 개봉되고 언론에 회자되니 사회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그저 주어진 일상을 따르고 다수의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적응하며 살아갔던 평범한 젊은이로, 직장인으로써 거대한 움직임의 단초가 되는 사건의 중심부에 있었지만 당시의 현실을 얼마나 알고 살았을까 싶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 격동의 시대를 살았지만 파편적으로 듣고 경험했던 정의를 향한 몸부림을 영화를 통해 처음으로 체감해 볼 수 있을까 상상해본다. 작년에 본 택시운전사 영화로 말로만 조각 조각 들었던 광주항쟁의 현실을 처음 몸으로 느껴본 것처럼... 그리고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를 만난다면 1987년에 병실에서는 못했지만 꼬옥 안아드리고 싶다.
'1. Dr. Sam Lee > 15_80년5월18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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