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김원기 박사가 동창밴드에 1987에 대한 기억을 오창석 군의 1987 보라는 게시글에 댓글로 달았다. (퍼온이주)
1987년 난 그때 대학원을 졸업하고(재수해서 81학번) 석사장교 시험 공부를 한다고 도서관을 다닐 때였지. 집에서 중앙일보를 보고 있었는데 경찰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 쇼크사라는 작은 기사가 났었다. 그리고 다음날인가 지하철에서 누군가 펼친 신문에 박종철이가 고문사했다는 기사를 어깨 넘어로 보았던 생각이 난다. 이미 경찰서 죽었다고 했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은 대부분 고문으로 죽었을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또 그냥 억울한 죽음이 하나 더 늘었구나 체념하고 넘어갔었을 일이 천주교사제단의 폭로로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6월항쟁으로 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1987년 6월항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것에 관한 영화다.
나는 1987년 3월달에 석사장교 시험을 보고 연대 교문 입구에 있는 공과대학 건물에 있는 대학원 실험실에 나와서 후배들 실험 도와주고 그랬는데 그 방에서는 교문을 사이에 두고 시위학생들과 전경들 사이의 공방전을 구경하기에 딱 좋았다. 가끔 분에 못이긴 공대 학생들이 창문으로 전경들에게 무언가를 던지면 공대 창문을 향해 최류탄을 쏘는 일이 몇번 있었고 내가 있던 방도 두번이나 유리창을 깨고 최류탄이 들어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터 한가운데서 실험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잤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한열이란 학생이 교문 앞에서 최류탄에 맞아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브란스로 실려갔는데 경찰병력들이 병원에 들어와서 이한열이를 빼가려고 하는 바람에 학생들이 병원을 점거하고 지키고 있다고 하였다. 며칠을 병원에서 농성하는 학생들, 물과 먹을 것을 반입하는데 의사와 간호사들도 나서서 도와주고 있다는 이야기들, 학교 안에 외국 특파원들이 들어와서 학생들과 인터뷰하는 모습들...
이제는 운동원 학생들만의 분노가 아니라 국민적인 분노가 되었고 결국 그때까지 관망하던 대학원 원우회에서도 항의집회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떤 교수님은 집회에 나가면 F학점 처리를 하겠다는 분도 있었지만 가장 원로교수였던 분이 당연히 나가야지, 다들 나가라고 하셔서 그분이 다시 보였다.
나도 졸업생 신분이지만 따라나갔는데 후배들이 석사장교 합격 취소되면 어떻하냐고 형은 나오지말라고 했지만 무슨 용기였는지 같이 나가서 스크럼을 짜고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양순한 대학원생들까지 시위에 나선 여파인지 얼마 후 노태우의 6 29 선언이 있었고 그리고 또 얼마 지나서 이한열이의 장례식이 연대 교정에서 열리게 되었다....
장례식 전날 대학원 연구실로 학부생 후배들이 소주를 사가지고 찾아왔다. 그냥 학교에서 밤을 새고 싶은데 어디 있을 데가 마땅치않아서 찾아왔노라고, 웬지 모르지만 내가 특별히 한 것은 없지만 승리한 기분과 이한열이, 박종철이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 등 복잡한 감정으로 같이 밤새 술을 먹었다. 학교 안 잔디밭 여기저기에도 군데군데 학생들이 모여서 밤을 새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날씨가 참 청명했다. 아침해가 뜨는 백양로를 YS가 하얀 장갑을 끼고 여러명의 가신들과 함께 걸어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잠시후엔 DJ가 탄 승용차가 백양로를 올라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백양로를 메웠다.
방송으로 문익환목사가 장준하열사부터 이한열까지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외치던 것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나는 그날 이제부터는 좋은 날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1987년 난 그때 대학원을 졸업하고(재수해서 81학번) 석사장교 시험 공부를 한다고 도서관을 다닐 때였지. 집에서 중앙일보를 보고 있었는데 경찰에서 조사받던 서울대생 쇼크사라는 작은 기사가 났었다. 그리고 다음날인가 지하철에서 누군가 펼친 신문에 박종철이가 고문사했다는 기사를 어깨 넘어로 보았던 생각이 난다. 이미 경찰서 죽었다고 했을 때 우리나라 국민들은 대부분 고문으로 죽었을거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또 그냥 억울한 죽음이 하나 더 늘었구나 체념하고 넘어갔었을 일이 천주교사제단의 폭로로 국민의 분노를 일으켰고 6월항쟁으로 가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1987년 6월항쟁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것에 관한 영화다.
나는 1987년 3월달에 석사장교 시험을 보고 연대 교문 입구에 있는 공과대학 건물에 있는 대학원 실험실에 나와서 후배들 실험 도와주고 그랬는데 그 방에서는 교문을 사이에 두고 시위학생들과 전경들 사이의 공방전을 구경하기에 딱 좋았다. 가끔 분에 못이긴 공대 학생들이 창문으로 전경들에게 무언가를 던지면 공대 창문을 향해 최류탄을 쏘는 일이 몇번 있었고 내가 있던 방도 두번이나 유리창을 깨고 최류탄이 들어왔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전쟁터 한가운데서 실험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잤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이한열이란 학생이 교문 앞에서 최류탄에 맞아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세브란스로 실려갔는데 경찰병력들이 병원에 들어와서 이한열이를 빼가려고 하는 바람에 학생들이 병원을 점거하고 지키고 있다고 하였다. 며칠을 병원에서 농성하는 학생들, 물과 먹을 것을 반입하는데 의사와 간호사들도 나서서 도와주고 있다는 이야기들, 학교 안에 외국 특파원들이 들어와서 학생들과 인터뷰하는 모습들...
이제는 운동원 학생들만의 분노가 아니라 국민적인 분노가 되었고 결국 그때까지 관망하던 대학원 원우회에서도 항의집회를 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어떤 교수님은 집회에 나가면 F학점 처리를 하겠다는 분도 있었지만 가장 원로교수였던 분이 당연히 나가야지, 다들 나가라고 하셔서 그분이 다시 보였다.
나도 졸업생 신분이지만 따라나갔는데 후배들이 석사장교 합격 취소되면 어떻하냐고 형은 나오지말라고 했지만 무슨 용기였는지 같이 나가서 스크럼을 짜고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쳤다.
양순한 대학원생들까지 시위에 나선 여파인지 얼마 후 노태우의 6 29 선언이 있었고 그리고 또 얼마 지나서 이한열이의 장례식이 연대 교정에서 열리게 되었다....
장례식 전날 대학원 연구실로 학부생 후배들이 소주를 사가지고 찾아왔다. 그냥 학교에서 밤을 새고 싶은데 어디 있을 데가 마땅치않아서 찾아왔노라고, 웬지 모르지만 내가 특별히 한 것은 없지만 승리한 기분과 이한열이, 박종철이의 죽음에 대한 안타까움 등 복잡한 감정으로 같이 밤새 술을 먹었다. 학교 안 잔디밭 여기저기에도 군데군데 학생들이 모여서 밤을 새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날씨가 참 청명했다. 아침해가 뜨는 백양로를 YS가 하얀 장갑을 끼고 여러명의 가신들과 함께 걸어올라가는 모습을 보았다. 잠시후엔 DJ가 탄 승용차가 백양로를 올라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백양로를 메웠다.
방송으로 문익환목사가 장준하열사부터 이한열까지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외치던 것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나는 그날 이제부터는 좋은 날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