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7_芳園(李盛粲)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 소평전(小評傳)

忍齋 黃薔 李相遠 2018. 4. 24. 20:40
반응형

27년생인 작고하신 부친과 아직 생존하신 32년생이신 모친은 세월만큼이나 이런저런 훈장을 달고 사셨고 사십니다. 모친은 심장박동이 약하여 심장박동기를 단체 신경통으로 보행이 불편하시지만 다행히 정신이 맑으셔서 거동이 불편하셨던 부친을 작고하실 때까지 24시간 보살피셨습니다. 영어학원을 운영하며 바쁘게 살며 자신의 집도 2체씩 있는 여동생이 기특하게도 부모님과 함께 살아주어 부친의 마지막 길을 편하게 해 주었고 홀로 남으신 모친을 위해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니 여간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이제 모든 삶의 희로애락을 뒤로하시고 동작동 현충원에 영면하신 제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의 모습을 자손들을 위해 돌아보고자 합니다. 이런 노력이 하늘에 닿아 업 겁 윤회의 고리를 끊고 해탈의 경지에서 후손들에게 복을 베풀고 바르게 인도하는 한산이문(韓山李門)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님이길 간절히 구합니다. (不孝子 李相遠 拜上).] 

 

고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산이씨 호장공의 28세로 목은 이색 선생의 21대손이며 인재공 이종학(목은 3남 중 차남) 선생의 20대손입니다. 또 인재공의 6남 1녀 중 장남인 광목공 이숙야 선생의 19대손이고 직재공 이유청 선생의 16대손이며 상주영장를 지낸 이사목 선생의 8대 종손입니다.

 

그리고 구한말과 일제 초, 죽음으로 친일파와 일제에 저항했던 이명직 선생(탁지부 주사, 내장원경, 규장각직학사, 궁내부특진관 칙임관1등 역임 1915년 친일파에 암살당함)과 이철규 선생(금광국 기수, 평안북도 희천군 동면장, 충북 충주 노은금광경영하다 고종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 1919년 일제에 주살 당함)의 증손이며 손자입니다.  

방원(芳園) 선생은 1927년 종로구 계동 13번지에서 이성구(李成求, 1908~1981) 선생의 외동아들로 출생합니다. 일본강점기에 수원 농림을 나와 만주국(滿洲國) 농림국(農林局) 미곡검사관(米穀檢査官)을 지내던 부친 이성구 선생을 따라 만주에서 소학교를 다니다 경성의 봉래공립고등소학교(蓬萊公立高等小學校)로 유학을 나와 1942년 4월에 졸업하셨습니다.

 

해방되던 1945년 3월 방원(芳園) 선생은 경성원예학교(京城園藝學校)를 졸업하며 바로 구왕실(舊王室) 창경궁(昌慶宮) 식물원(植物園) 주임(主任)으로 근무를 시작합니다. 지금으로 치며 식물원 원장에 해당합니다. 그리고는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여 1950년 6월 27일 저녁 7시 30분 이승만 박사 부부의 피난기차 4량의 마지막 칸에 이승만 박사 부부가 아끼는 식물원의 화혜식물들을 싫고 이승만 박사 부부의 피난길을 호종하는 경무대 경찰서장 김장흥의 일원으로 피난길에 오릅니다.

 

피난기차가 대전 거처 대구까지 갔다가 너무 멀리왔다며 다시 대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충남도청관사에서 "국군이 복한군을 막아내고 있으니 서울시민은 서울에 남으라"는 방송을 하고나서 자동차로 이리로 떠나 다시 기차로 목포로 피난갈때 식물원의 식물들을 가지고 전라북도 전주 임업시험장으로 옮겨가서 피난 식물원을 꾸리고 피난 식물원이 자리를 잡던 1951년 4월까지 근무를 합니다.

 

이어 식물원의 급료가 끊겨 호구지책 겸 후학을 양성할 작정으로 1951년 4월 부터 같은해 11월까지 전주농림중학교(全州農林中學校) 원예학과(園藝學科)에서 전임강사(專任講師)로 원예를 가르칩니다. 하지만 6.25 전쟁으로 전세가 악화되자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1951년 11월 자진하여 육군제6보병사단(陸軍第六步兵師團)에 이병(二兵)으로 입대합니다.

 

입대하자마자 방원(芳園) 선생은 1951년 11월 17일과 18일 양일간 전개된 강원도 김화군 임남면 949고지 전투에 6사단 제7연대에 투입되었습니다. 장도영 장군이 이끄는 6사단은 임남면 동남쪽으로부터 8사단 제21연대와 6사단예하 19연대, 7연대 및 2연대 등 4개 연대 병진으로 1951년 11월 17일 05:00시에 공격을 개시하여 지대 내의 적인 중공군 202사단 605연대, 204사단 612연대, 35사단 104연대를 격파하고 공격2일째인 11월18일 예하 전 연대가 목표선을 모두 장악하여 전투를 승리로 매듭지었습니다.

 

방원(芳園) 선생이 배속된 6사단 7연대는 Gary선인 1220고지-석화동-903고지-949고지-용호리-교암산을 연하는 선을 공격하여 이를 확보하고 목표선을 모두 장악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방원(芳園) 선생은 이 전투에서 퇴각하던 중공군의 수류탄 투척으로 전신에 파편상(좌복부 파편창과 좌배부 맹관 파편창)을 입고 폐가 손상되는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부산통합병원까지 3일간에 걸쳐 후송되었습니다.

 

하늘이 8대 종손이자 이성구 선생의 외동아들인 방원(芳園)을 목숨을 지켜 주셨습니다. 방원(芳園) 선생은 폐를 관통하는 엄청난 수류탄 부상 속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합니다. 마침 덴마크 상선이 병원선으로 개조하여 참전한 바로 그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 호에서 군종병 지학순 (후일 주교로 선종)과 함께 재생의 환우 시간을 보냈습니다.

 

폐에서 파편을 빼내고 기적적으로 상처가 아물어 1953년 4월 퇴원하며 상등병(上等兵)으로 명예제대(名譽除隊)를 하셨습니다. 6·25 전쟁 부상으로 인한 상이용사(傷痍勇士)로 명예제대를 함과 동시에 방원(芳園) 선생은 한시의 여유도 가지지 않고 바로 삭막한 전후 사회를 밝게 바꾸겠다고 일거리를 사방팔방으로 찾았습니다.

 

퇴원하고 명예제대한 직후, 1953년 4월 전주(全州) 중앙국민학교(中央國民學校) 온실(溫室) 원예촉탁(園藝囑託)으로 1954년 5월까지 근무하면서 학생들의 국화전시회를 개최하여 원하던바 전쟁으로 삭막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국화 향기와 국화꽃 같은 넉넉함이 묻어나게 하였습니다. 1954년 5월에는 국립원예기술원(國立園藝技術院) 서울 정량리 분원을 맡아 촉탁(囑託)으로 근무합니다.

 

부산에 본원이 있던 국립원예기술원은 우장춘(禹長春, 1898~1959) 박사가 원장으로 있었고 자신을 도와 육종기술을 보급하고 통역을 담당할 인재를 찾던 중 나의 부친 방원(芳園) 선생이 발탁되어 청량리에 있던 국립원예기술원에 근무하며 우장춘 박사의 서울업무를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이승만 대통령 부부가 피난길에 자신과 부인이 좋아하던 창경궁 식물원의 꽃과 식물들을 무사히 전주까지 옮겨주었던 인연으로 1957년 4월 경무대(景武臺) 온실장(溫室)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그 바람에 한국말을 못 하던 우장춘 박사의 통역을 도맡아 하며 한국 원예육종발전을 도우며 우장춘 박사에게 향하는 이런저런 견제의 바람막이 일을 못 하게 되어 그 여파로 1959년 8월 10일 우장춘 박사님이 돌아가신 것이 아닌지 늘 미안해하셨습니다.

 

1957년 11월, 우연한 자리에서 한국일보(韓國日報) 백상(百想) 장기영(張基榮) 사장이 함께 한남동에 현대식 원예식물원을 차리자는 제안을 받아드려 경무대 온실장 자리를 사직하였습니다.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을 만난 덕분에 4·19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하게 었습니다. 아무튼 방원(芳園) 선생은 1957년 11월 백상 장기영 사장과 의기투합하여 한국 최초의 서구식 원예식물원을 한남동에 시설하여 1967년까지 서울의 명소가 되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1961년에 태어났습니다.

 

방원(芳園) 선생은 수많은 사회활동과 봉사를 아끼지 않은 삶이었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활동 중의 하나는 1962년 3월 7일 국제친선(國際親善) 꽃씨협회 주최로 한국 최초로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꽃씨 날리기 행사를 주도적으로 개최한 것이었습니다. 이 행사는 5천여 명의 어린이들과 학생들이 맨드라미, 나팔꽃, 코스모스 씨 등을 담은 오색풍선 10개씩을 날리고 그 풍선이 하늘 높이 올라가고, 그 풍선이 올라가다 터지면 꽃씨가 퍼져서 꽃이 피게 되는 그런 행사였습니다.

 

1967년 방원(芳園) 선생님은 나라가 부강해지려면 가난한 농촌이 잘살아야 한다는 강한 신념과 믿음으로 쌀 채소 농사에만 의존하던 한국 농촌에 부가가치가 높은 화훼원예(花卉園藝) 기술을 보급하겠다는 일념으로 근교농업의 붐을 일으키기 위해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199-2번지 3천 평에 방원식물원(http://blog.daum.net/enature/15853024)을 시설하여 부천군(富川郡) 원예협동조합(園藝協同組合) 창립을 주도하고 분재전시회를 열고 의욕적으로 화훼원예 기술을 보급하기 시작했습니다.

 

1980년 부천군이 부천시로 서울의 메트로폴리탄에 흡수되어 농장을 정리할 때까지 한국의 화훼원예 기술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나의 부친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목은 이색 선생의 후손으로 구한말 애국지사 궁내부특진관 칙임관1등 이명직 선생의 증손이고 일제의 금광수탈을 최일선에서 막아내던 대한제국 금광국 기수였고 충북 충주 노은금광 주인 이철규 선생의 손자이며 11세 어린 나이에 조부와 부친을 여의고 혈혈단신 만주국의 관리로 살아가며 독립군의 군자금을 대던 이성구 미곡검사관의 아드님이었습니다.  

 

방원(芳園) 선생은 해방 후 창경궁(昌慶宮) 식물원(植物園)의 책임자로서 본분을 다했고, 자신의 몸을 던져 공산군에 맞서 싸운 6.25 참전 상이용사인 전쟁영웅(戰爭英雄)이었고, 국화전시회를 통해 전후 삭막한 한국인의 마음에 희망을 심어주었고, 우장춘 박사님을 도와 한국의 육종분야 발전에 이바지했으며, 한국 최초의 꽃씨 날리기를 주도하여 국토를 아름다운 꽃 강산으로 만들었으며, 한국의 근교농업발전을 주도적으로 시작했던 선각자(先覺者)였습니다.

 

더하여, 6.25부상치료후 명예제대를 하였지만 2005년까지 상의군인등록도 안하고 사셨습니다. 이유는 6.25후 상이군인들이 이곳저곳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또 상이군인혜택 받자고 전쟁을 치루고 부상을 당한게 아니라 공산군으로 부터 나라를 구하기위해 참전한거라며 상이군인등록도 안하고 살아 오셨습니다. 상이군인 혜택을 받았다면 우리 형제자매는 월사금이나 학비걱정으로 마음조리며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는데 말입니다. 고지식한 방원 선생이셨습니다.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은 한국시간 2018년 4월 13일 20시 11분 6.25동란중 수류탄폭발로 인한 파편상(좌복부 파편창과 좌배부 맹관 파편창)과 외상성폐손상이 악화되어 흡인성폐렴으로 인하대학병원 11층 2호실에서 사망하셨습니다. 빈소는 서울 혜화동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2호실에서 젊은시절 창경궁(昌慶宮) 식물원(植物園)의 주임(主任)으로 근무하셨던 경궁 식물원이 바라보이는 곳에 모셔서 5일장으로 조문객을 맞았습니다.

 

발인은 2018년 4월 17일 9시 30분에 서울대학병원 영안실을 떠나 성남화장장에서 화장한후 명혼을 동일 16시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봉안의식을 국군의장병의 의장행사를 통 충혼당 314호실에 모셨습니다.

 

장지에서 돌아온 당일 저녁 혼란스런 영가께서 밝은 빛이 나는 곳으로 잘 가시도록 인도해드리는 초우재와 역시 손없는 날을 골라 4월 19일 저녁에 재우제를 인천 송도 신도시 평소 머무셨던 자택에서 지냈고, 4월 22일 일요일 장지인 현충원 제1제레동 2호실에서 삼우제(三虞祭)를 올려 탈상을 마쳤습니다.

 

요단강 건너가 뵈올때까지 아버님, 방원(芳園) 이성찬(李盛粲) 선생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합니다!

 

+++

http://blog.daum.net/enature/15854795

http://blog.daum.net/enature/15853024

http://blog.daum.net/enature/15850051

http://blog.daum.net/enature/15850319

http://blog.daum.net/enature/15853081

http://blog.daum.net/enature/15853561

http://blog.daum.net/enature/15853575

http://blog.daum.net/enature/15853576

http://blog.daum.net/enature/15853577

http://blog.daum.net/enature/15853578

http://blog.daum.net/enature/15854796

http://blog.daum.net/enature/15852878

+++

2018년 4월 17일 동작동 국립현충원 발인예식 1

2018년 4월 17일 동작동 국립현충원 발인예식 2

2018년 4월 17일 동작동 국립현충원 발인예식 3

2018년 4월 17일 동작동 국립현충원 발인예식 4

2018년 4월 13일, 14일, 15일, 16일 혜화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2호실 장례예식 1

만주시절의 방원(芳園) 선생과 부친 이성구 모친 조언례

만주시절의 방원(芳園) 선생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시절의 방원(芳園) 선생

초대 창경궁 식물원 원장시절의 방원(芳園) 선생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 호에서 구사일생 살아난 원(芳園) 선생 (윗줄 맨 오른쪽)

방원 선생은 1953년 4월 전주 중앙국민학교 온실 원예촉탁으로 근무하면서 1954년 5월까지 학생들을 지도하여 국화전시회를 개최하여 원하던바 전쟁으로 삭막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국화 향기와 국화꽃 같은 넉넉함이 묻어나게 하였습니다.

국립원예기술원 서울분원장 시절 우장춘 박사님과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님과 함께

경무대 원예 조경 담당관시절

한국 최초의 서구식 한남동 원예식물원에서

흑백사진이라 미모를 구분하기는 힘들지만 제 부친의 빛바랜 사진첩에 있는 걸로 보아 원예가이신 제 부친이 보시기에 꽃들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 꽃씨 날리기 대회에 참석한 무용가 김백봉 선생과 그분의 제자들이라는 설명을 붙여 놓으셨군요.

한국 최초의 서구식 한남동 원예식물원에서 큰아들 이태원과 함께

한국 최초의 서구식 한남동 원예식물원에서

부천군 원예협동조합 창립을 주도

부천군 최초의 화훼원예식물원인 방원식물원에서 부인 이춘연 여사와 막내딸과 함께

 

 

의복도 쪼기를 단추가 하나씩 밀리셨지만 손수 입으셨습니다. 출국전 인천송도 경복궁 한양에서 식사후.

6.25부상치료후 의병제대를 하였지만 2005년까지 상의군인등록도 안하고 사셨습니다. 이유는 6.25후 상이군인들이 이곳저곳에서 행패를 부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그리고 상의군인혜택 받자고 전쟁을 치루고 부상을 당한게 아니라 공산군으로 부터 나라를 구하기위해 참전한거라고. 상의군인 혜택을 받았다면 나는 월사금 학비걱정으로 마음조리며 학창시절을 보내지 않아도 되었는데. 고지식한 방원 선생님.

2004년 6.25참전군인들에게 나라에서 일괄 몇만원씩 나누어 주느라 이증을 주면서 나의 부친 방원 선생이 6.25참전 부상 상이용사인데도 상이용사등록도 안하고 혜택도 받지 않았다고 2005년 뒤늦게 상이용사 유공자증을 이증보다 1년 뒤에 받게 됩니다. 

6.25 전쟁으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자진 참전하여 1950년 6·25전쟁 당시 화천전투에서 6사단의 일원으로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 소속 연대가 전멸하는 와중에 수류탄이 옆에서 폭발하여 전신에 파편상(좌복부 파편창과 좌배부 맹관 파편창)을 입고 폐가 손상되는 죽음을 넘나드는 상황에서 화천에서 부산통합병원까지 3일간에 걸쳐 후송

상의용사인데도 혜택받을 생각도 안해서 준건지 아니면 다 준건지 모르지만 '호국영웅기장'을 받으신 방원 선생.

 

살아생전 남아있던 전쟁의 상흔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폐에서 쇠소리가 들렸습니다.

 

청량리 국립원예기술원 서울 분원

청량리 국립원예기술원 서울 분원장 시절

 

청량리 국립원예기술원 서울 분원장 시절 - 나의 부친 방원 선생이 김백봉 선생이 키우다 지겨워진 카나리아 등 새들을 받아다 키우시는 바람에 우리 형제들이 새털 알러지로 고생을 많이 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청량리 국립원예기술원 서울 분원장 시절

부천군 소사읍 조종리 방원식물원에서

1980년대의 방원

유명한 사진작가가 찍었다고 하는데 그 사진을 내 셀폰으로 찍었으니 ...

절친이셨던 신구대학을 만든 이종학 선생의 인연으로 신구대 원예과 국화전시화 자문을 하셨습니다.

 

 

 

동양화가 옥산 김옥진 화백과 함께

진도 출신의 옥산 김옥진 화백은 의제 허백련 화백의 수제자입니다. 의제 허백련 화백이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의 절친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동갑인 두분이 오랜세월 절친의 연을 함께 하십니다. 2015년 현재 다행하게도 두분다 생존해 계십니다. 

1980년대 찍은 증명사진

동남갈포 장인 임흥순 선생과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과 함께

 

 

 

 

 

 

1990년대의 방원 선생. 올랜도 플로리다 디즈니월드를 방문중에.

미국에 있는 막내아들네만 빼고 다 모였을때

결혼직후 찍은 사진 방원 이성찬 선생과 이춘연 여사. 1950년 창경궁 식물원이 전주로 피난갔고 전주농림에서 원예를 가르쳣고 이춘연 여사는 전주여고를 나와 소학교 훈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립지사 지운 김철수 선생이 독립자금을 조달받던 양가 어른들이 인연이 되어 두분을 소개하여 결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청량리 원예연구소 서울분소장 시절이거나 경무대 조경담당관 시절 둘째?와 함께

80년대 두분의 강가 나들이

80년대 막내 아들녀석이 감옥에 잡혀가는 바람에 신경쓰느라 갑상선이 발병하여 이춘연 여사의 목이 부어있다.

80년대 막내 아들녀석이 학생운동으로 감옥에 잡혀가는 바람에 신경쓰느라 갑상선이 발병하여 이춘연 여사의 목이 부어있습니다.

결혼기념일 사진

부부 설악산 나드리

부부 올랜도 디즈니월드 나드리

2015년 1월 막내아들 미국돌아가기전 식사자리에서 (송도 경복궁)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