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하승운 선생님의 사회활동 경력으로는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을 엮임했으며, 생활체육 연합회 성남시 궁도연합회 회장 엮임한바 있습니다. 자격증은 '생활영어단어 지도사'와 '안전관리사 2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71년 대선 신민당 참관시 증표.
이상원 박사 귀하,
내 얘기가 얘기거리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사실 이전에는 그닥 밝히고 싶지않은 내용이였지요.
사회생활 중에도 서로 대화를 하려면 상대를 알아야 하는건지 우선 고향을 물어보던데 나는 줄곧 서울이라고만 말했고
부득이 부모님의 고향이라던지 내가 살아온 얘기는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만 말해주었을 뿐입니다.
잘 알다시피 우리세대가 지나온 시간은 아무 것도 가진것 업슨ㄴ 사람들에게 마치 훈장 같은것 학력이 최우선적으로 따져야 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오미희라던가 윤석화등이 대학학력을 속이고 상당히 많은 인사들이 미국 학력을 내세우며 자신을 드러내지만
상당수가 불법적이거나 부적절한 학력이라는 게 밝혀지고 있죠.
내가 어찌어찌 해서 영어를 좀 한다는 것 때문에 들어가게 된 미국 회사는 그런 고민이 전혀 없는 공간이엿는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자리를 잡으면서
잘난 인간들이 구역 구역 들어오면서 분위기는 많이 변해 갔지요.
나도 조금씩은 불편해지기 시작했고..그럼에도 일에 대한 열정만으로 일해 나갔죠.
그러다 지점장의 후배가 낙하산으로 입사하고 디비젼을 맡으면서 다툼이 생기기 시작했고 섬유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자가 관리를 한다고 하니 웃음거리가 된거죠.
나를 중심으로 남.녀 부서 직원들이 뭉쳐서 우리 나름대로 일을 하다 보니 대립은 커졌고 급기야는 미네아폴리스권의 타겟스토아와 센프란시스코 권의 머빈스에
할당한 국내 섬유회사의 쿼타 배분때문에 커다란 충돌이 일어나서 극동 지사장이 홍콩에서 날라와 중재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2년을 더 버티면서 일하다가
다른 에이전트로 옮겨가고 서서히 내수 쪽에 발을 들이밀게 되고 신한인터내셔날 그리고 논노를 거치게 된 것이죠.
첨부하는 내용은 나의 개인사를 대충 적은 내용입니다.
참고하시고 필요하다면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내용에 대한 사전 동의는 구해주시기를 바랍니다.
하승운 배상.
나는 사실 유복자로 태어났다. 우리 집안은 월출산으로 유명한 영암에 자리 잡은 진주 하씨 문중 일파로 내 이전 대대로 영암에서 살았고 우리 외가는 영산포에 근거를 둔 집안이다. 친가는 고조 이전까지 대가집이라 불리울만 하지만 몰락한 양반집안일 뿐 부친은 논밭 팔아 장사한다고 만주로 연해주로 다니다 다 털어먹고 나서 국군에 들어가서 동대문 외곽 용두동 소재 미군 헌병대에 근무하는 이유로 인해 우리는 서울 동대문 제기동에서 살았다.
당시 서울 동대문 밖 용두동 제기동 보문동에는 사업화 된 집단 한옥 단지가 있었고 인근의 청량리 성당에 적을 두게 된 이유도 그러하다. 부친은 휴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최대 격전지인 금화지구에서 분대 전체가 생사 확인 안되는 상태로 행불이라 결국 모두 전사처리를 하고 유품을 가지고 동작동에 모셔져 있다. 부친의 군부대 명함을 모친은 70여년을 간직하고 나에게도
알려주지 않았었다.
모친이 병원 입원할 때 신분증이 필요해서 열어 본 모친의 지갑 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나는 24살에 청상과부가 된 모친과 전사한 것으로 치부된 부친을 대신하여 부친노릇을 하며 자손을 지키려는 큰 고모와 친 할머니 이렇게 3대가 함께 살았다. 친가는 이상하리 만치 손이 귀해졌다. 할아버지 대 5형제, 아버지 대 3형제인데 모두 초년에 생을 마감하는 바람에 우리 집안은 손이 귀해졌다. 청상 3대와 외아들의 가정이란....
이미 정서적 어려움은 상정하고도 남는 것이다. 서울에서 사랑반 거점 노릇을 하는 우리 집에 시골에서 올라오는 손님은 끊이지않고 밀려들었다. 영화감독 한다는 친척...취직 준비한다는 먼 사촌들. 내가 다니던 서울 보성고등학교 유도부에 스카우트되어 전학 온 친척 놈..등등. 나중에 잘된 놈 치고 다시 들러보는 놈은 하나도 없었더라는.. 영산포 우리 외가는 광주에서 큰 삼촌 작은 삼촌 모두 경찰에 투신하여 경찰 집안이었지만 소위 경찰 대학이나 일반 대학 출신 인텔리들이 아니고 게다가 호남출신들이라 진급 승진이 모두 더디고 그나마 경찰청에 고위직이 된 먼 삼촌도 외가 삼촌을 돌보지 않더라는..
나는 서울 제기동에 살면서 종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혜화동에 자리 잡은민족 사립학교인 보성 중학교에 입학하고 중학교 때 교내 글짓기대회나 표어짓기 등에서 대상을 받기도 하는 둥 나름 모범생으로 평탄한 학생생활을 하는 보통의 우등생이었다. 라디오가 대세인 그 시절에 최동욱 이종환 임국희 피세영 등의 팝송 프로그램을들으면서 팝송을 배우고 그때 상당량의 팝송 지식을 쌓게 되었다.
당시 보성고등학교 유도부는 꽤 이름이 알려진 학교라서 중학교 특활로서는 유도부에 들어가서 유도를 배우고 겨울이면 청량리 외곽에 있는 논에 물을 대고 얼려서 만들어 놓은 스케이트장을 다니면서 학창시절을 무난하게 보냈다. 그러던 중학교 2학년인 어느 겨울날 중량교 노천의 비호 스케이트장으로 기억하는 스케이트장에서만난 여학생에게 너무 끌려 정신을 못 차리고 쫓아다녔다. 말은 붙여보지 못하고혼자 끙긍 앓기만 했다. 그러나 뒤를 쫓아가 보니 다행이 사는 곳은 우리 집에서멀지않은 같은 구역 내에 살고 있었다.
중 3이 되고 나의 학창 생활은 동네 친구들과 패거리로 몰려다니면서 조금씩 이탈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동네친구들과 어울려서 서로의 집에서 돌아가면서하는 과외를 받았지만 나의 학습태도는 점점 나빠지고 성적은 점점 곤두박질쳤다.
여름방학이 끝나면서 숭인동 가정집에서 고정 과외를 받기 시작했지만 흥미를잃었다. 그저 집에서 가라고 하니 가는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같이 수학하는여학생에게 뼈아픈 충고를 들었다. '너는 쾌활하고 재미있고 유머러스해서 좋은데 공부를 안 하니 실망이다. 다른 친구들은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하는데 과외도듣는 둥 마는 둥 밖에 나가서 담배나 피워대고..그러니 정신 차리고 공부하고 좋은 학교로 진학하고 나중에 대학가서 좋은 친구로 만나려면 공부 열심히 해라.'
'너나 잘하세요' 라고 콧방귀도 안 뀌었지만 사실 이 여인네의 충고가 그나마 공부를 할 수 있는 동기 부여가 됐고 3학년 남은 몇 개월을 열심히 공부해서 뒤처진공부를 채워 넣으면서 그간의 내 모습을 잘 아는 담임은 공고나 가라며 써주지않는 고등학교 원서를 받아 쥐고 보성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 이 여인네는 연대 기악과를 졸업했고 밤이면 유선 상으로 재즈 피아노 연주를 멋지게 해주며 전화기를 통해 마음을 나누기도 했지만 그러나 그냥 친구로만 남게 된 여인네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다시 찾은 스케이트장에서 작년에 쫓아다니며 속내 한번 풀어내지 못한 여학생을 다시 만났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나도 변죽이 늘어서 거리낌 없이 말을 붙이고 신설동으로 을지로로 종로 등의 빵집에서 만나고 마음을 다져갔다. 이제 새 학기가 되면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는 건데 이 여학생은 나보다 나이가 많은 이미 고2이였고 새 학기에는 고3이 되는 누나로 지금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조숙한 여인네였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고 숨기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고 더 큰 문제는유도부 선배와 만나고 있는 사이였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다가 가끔 만나가도 했는데 어느 날 그녀와 애기하고 있는 내 등을누가 치면서 앞으로는 만나지 마라..약간의 충돌이 있었고 나는 그 패거리들에게주어 박혔다. 그러나 이런 사건 이후에도 나는 계속 그녀를 만났고 그녀 또한 선배와 나와의 관계를 알면서도 나와의 만남을 거절하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유도부 도장에 가보니 그는 유도부 선배였고 선택 대련 중에 고의적으로 강한 조르기를 당하고 풀어주지 않아 실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 여인네를 포기하지 않았다. 너무 예뻤고 나한테 잘해주었기 때문에..어느 날 선배에게 불려가서 운동장 한 켠에 있는 수도간 뒤 좁은 공터에서 구타
를 당하면서 걸레자루로 뒤꿈치를 수십 차례 가격 당해 오른 쪽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상해를 입고 결심을 했다. 받은 만큼 되갚아준다고...
동네 친구들과 작당을 하고 어느 날 낙원상가 골목에서 집단으로 보복하고 나는호신을 위해 책가방에 책 대신 철공구들을 가지고 다녔다. 그러는 와중에도 그녀를 지속적으로 만났다. 대성리로 캠핑을 가기도 하고...그때 친구 아버지가 대성리 역장이라 공자열차를 이용하면서 춘천 가도 허술한 유원지 대성리를 최초 개발한 건 우리 패거리였을 거라는...무용을 전공했던 그녀는 아마 지금 어쩌면 유명인이 된 그녀이리라..
내가 고등학교 2학년 즈음에 학업을 등한시하고 담인 선생과 충돌을 갖게 된 동기와 이유들은 모두 다 거기에 있었다.
주먹을 불끈 쥐고 담임에게 내가 먼저 자퇴하겠노라고 자퇴서를 내고 같은 길을걷는 친구 놈들과 종로로 을지로로 퇴계로로 들쑤시고 다니면서 1년을 허비하고있었다.
그러다가 경기고등학교 다니다 퇴학당하고 같이 쏘다니던 친구 놈이 검정고시를보고 대학을 간다기에 며칠을 고민하다가 고등학교 졸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한 때는 공고나 실고 등 특히 돈만 주면 들어가는 남산공전에 편입하려고도했지만 날이 새면 싸움으로 지새는 당시에는 깡패양성소 같은 학교 분위기 때문에 접고 수소문해서 광주시에 다소 영향력이 있는 외삼촌들의 힘을 빌려 광주시에 있는 숭의고등학교 야간부에 적을 두고 졸업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나는 고등학교 졸업자가 되고 정말 나를 사랑해주었던 연대 기악과 친구를 여러 차례 만났으나 그녀가 티를 낸 것도 아니지만 뭔가 알지 못하는 그러나 이미 서로 간에인지되는 차이를 느꼈다. 휘경동이 집인 그녀를 면목동 집까지 데려와 두런두런하룻밤의 추억을 남기고 가벼운 입맞춤과 안타까운 포옹을 마지막으로 그녀를떠나 보냈다.
대학을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면서 예비고사에 대한 준비를 하지만 워낙 격차가많이 벌어진 내 실력으로 당장에 뭘 해볼 수는 없었다. 홍익대 조소과와 서양화과에 입학한 친구 놈 두 놈들에게 데생과 구성을 배우면서 실기를 준비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놈들 때문에 서교동 홍익대 문턱을 들락거리면서 여자 미대생들을만나고 알게 되고 신촌바닥을 오가는 그런 사이 나는 나도 모르게 홍대 미대생이되었다.
홍익대 중앙대에 지원한 미대 시험은 당연한 결과로 다 떨어졌고 마지막 선택은서교동에 남기 위해 당시의 홍익미술초급대학을 선택해서 가야했다. 합격을 하고 학교를 다녔지만 여전히 수업은 귀찮기만 했다. 또 학사행정에 문제가 생기고..1학기를 마치고 미련 없이 군에 가기로 하고 알아보니 나는 전사자 부친과 외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보충역으로 방위근무 1년만 하면 되는 것이라 수색 30사단에 입소하고 3주 훈련을 마치고 동사무소 방위로 근무를 마치고 2년 뒤에 복학하여 보니 예전 입학 동기 내 짝지 여자애가 조교를 하면서 나름 보살펴 주고 교수도 우호적으로 도와주었다.
다시 학교에 다니면서 서울 3대 명문 서울 공대, 농대 그리고 연대에 다니는 어릴적 친구 놈들 3명이 회원으로 다니는 미문화원 대학생 영어 회화클럽에 끌려가게 되고 얼떨결에 계속 다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쪽팔림이 어마무시하게 다가왔다. 말할 것 없이 기초소양이 부족하고 학업이 원만하지 못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더 이상 생각 없이 다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그만 두려하는 그때 즈음초 장발에 가끔 기타치고 노래하는 딴따라 같은 내 행색에 관심을 가졌던 여인네가 다가오면서 접지 못하고 대신 노력해보자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때 다른 전문대 학우들처럼 열심히 수학하면서 홍대 미대에 편입하는 걸 구상했어야 했는지도 모르는데 나는 이 땅을 떠나기로 하고 미국행을 준비했다. 장학금을 받을 능력이 되지 않으니 자비로 수학해야 하는데 얼마간의 돈은 가져가겠지만 현지에서도 돈을 벌려면 우선 언어에 익숙해져야겠다는 생각에 종로등지에있는 미인 회화반에 들어가 수업을 했지만 이게 헛일이라는 걸 알고 이태원으로선생을 헌팅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흑인 천지인 미8군에는 마땅한 선생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태원 바닥에서 마주친 백인에게 어쭙잖은 영어로 '미국의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우고 싶다. 학원에 다녔지만 한국여인과 동거하는 흑인들은 브로큰 잉글리쉬 알아듣고 제 말만 하고 만다. 이런 데 다니느라 헛돈 들이고 3개월시간 낭비했다. 도와줄 선생을 구한다.'
커피 한잔을 마시고 난 후 그는 내 말에 동의한다고 말하고 지금은 없어진 남산하이얏트 호텔 앞 외인 아파트로 오라고 했다. 교재는 일본에서 선풍적 인기를끌던 로버트 윌리암스 의 스포큰 잉글리시였다. 나는 기초 입문 중급 고급 모두 4권을 사고 기초부터 열심히 읽어보고 그의 아파트로 갔다. 그러나 나의 예상을깨고 고급편을 펼치라고 하고 수업을 시작했다.
먼저 수업할 때마다 문장을 읽으며 듣고 받아쓰기를 5번씩을 반복했다. 처음에는 다섯 단어 정도를 알아들었지만 횟수를 거듭할수록 단어 수는 늘어났다. 어쨌든 당시 나는 한 과를 수업하기 위해서 무려 꼬박 3일을 매달려야 할 만큼 저질학습자였다. 나는 당시 큰돈이 들어가는 소니의 휴대용 녹음기를 사서 내 발음을녹음하고 듣고 녹음하고 듣고를 반복하고 선생의 수업을 3개월 동안 열심히 들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그는 미국으로 다시 이동해야 하는 미8군 영내의 메디칼 닥터로 대령이었고 나한테 일체의 돈을 받지 않았다. 나는 가끔 비싸지 않은선물을 사들고 갔다. 그의 이름은 로버트 마이어인가 그랬다. 유태계였다.
미국으로 가는 일은 당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부로 부터 장학금을 받는 게 아니면 하늘에 별 따기였다. 이래저래 시간이 흐르는 중에 원진 레이온에 잠시 잠정 취직했으나 접고 외국인 회사에 취직을 해서 나의 사회생활이 시작되고 나는섬유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업무량에 치이기는 하지만 높은 수준의 급여와 좋은대접을 받는 외국인 회사의 생활은 한국에서 사는 나에게 불편함이 없었다.
여권을 만들고 미국 비자를 받고 처음 탄 비행기는 나를 뉴욕으로 데려다 주고나는 지금은 없어진 센트럴 파크 앞의 명소인 바비존 플라자에 묵었다. 뉴욕 브로드웨이 1440 로 가면서 눈에 담은 뉴욕은 언제가 와서 살아야 할 곳이라고 생각을 가졌다. 지금은 미국에 대한 동경이랄까? 그런 심정은 많이 사그라졌지만가끔 단기로 묵었던 뉴욕이나 시카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는 한두 해는 붙박이로 살아보고 싶은 곳이다. 특히 초년생 바이어였던 백인 그녀가 있는 시카고는괜히 많이 끌렸다.
한 때 이 땅을 벗어나려고 부단하게 노력했고 내가 홍대 회화과 선배와 정이 통해 그녀가 있는 스웨덴에 가려고 필요 수속까지 다 마치고 준비하다가 마지막에포기하게 내 발목을 잡는 건 24살에 청상이 되어 늙은 시모와 성격 지랄 맞은 시누이를 모시고 짓눌려도 나 하나 만을 바라보고 사는 홀어머니 우리 모친 때문이다. 모친은 ‘너 좋으면 어디든 가라’ 고 했지만 그게 어디 본심이겠는가. 그때 그러한 불효를 하지 않아서 다행으로 여기고 산다. 아직도 효도를 다하지 못하지만.....
첨부한 사진은 나의 젊은 시절을 대변하는 사진 2장으로 한장은 반은 딴다라로 살던 때이고 또 한장은 사회에 나와서 사진 찍으려 다니던 때의 모습입니다.
명함은 우리 모친이 70년간 간직하고 말해주지않은 부친의 명함이고 돌에 새겨진 사진은 국립묘지에 상석으로 만든 부친의 실제 분대가 행불되기 전에 찍은 사진입니다.
1971년 4월 27일(신해년)
당시 나는 약관 19세의 나이로 20세미만이라 선거권이 없는 같은 나이의 친구 한명과 함께 1971년 4월 26일 오후 열차에 몸을 싣고 경북 상주로 내려가고 있었다.
나보다 나이많은 김홍일과 친한 친구가 신민당 선거 참관인으로 추천해서 사진에서 보이는 대로 제7대 대통령선거에 젊은 신민당선거참관인이 많이 모자란다는 말을 듣고 참관인으로 지원, 선거감시를 하기 위한 것이였다. 시골의 작은 여관에서 하루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경북 제22지부당부의 관할 선거장에 도착하였다.
신민당 참관인으로 내려가 감시 참관하던 중에 부정선거를 목격하고 신민당 중앙당에 유선 고발하던 중 관내 파출소의 경찰들이 투표소로 오는 바람에 함께 내려갔던 친구랑 줄행랑. 친구는 잡혀서 뒤에 들어보니 구타를 당하고 풀려났고 잡히지않은 나는 4월이 춥고 어두껌껌한 야산에 숨어있다가 늦게 하산하고 귀가하였다.
당선희망을 가졌던 김대중은 낙선하고 제7대 대통령 선거는 부재자투표부정등을 통해서 결국 95만표 정도 이긴 박정희의 승리를 끝이 났다.
몇년의 세월이 흘러 미대를 졸업한뒤 1977년 사회로 나온 나는 원진 레이온 광고부에 교수 추천으로 잠시 근무를 하다가 뜻한 바 있어 미국행을 결심하고 준비중 우연치 않게 면접을 통해 미국 백화점 삭스, 블루밍 데일과 대형수입상인 타겟스토아등의 수입창구인 AMC 한국지사에 취직하여 섬유수출업을 시작하였고, 결국 미국행을 뒤로 미룬 체 상당기간 근무하면서 미국내 뉴욕이나 시카고 필라델피아 보스톤 컬럼버스 그린베이 샌프란시스코등지를 돌면서 바이어들을 만나는 비지니스 트립을 하면서 나름 풍요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인 신부가 전해준 5.18의 처참한 광경을 담은 비디오 영상물을 보고 분노에 치를 떨었지만 일상에 쫓겨 세월은 그렇게 흘러갔다.
AMC를 퇴사하고 수입상이던 신한인터내쇼날로 이적하여 한국 최초로 외국 라이센스 브랜드 사업을 하면서 국내 최초로 미국 POLO를 라이센스 런칭했고 당시 획기적 매출로 선풍을 일으켰다. 그 외에도 이태리 베네통 프랑스 다니엘 에스터등 외국 브랜드를 총괄하는 상품기획 총괄이사를 하면서 성가를 얻어 국내 굴지의 토종 섬유업체인 주) 논노로 스카웃되어 해외사업부를 맡으면서 일본과 프랑스 이태리의 외국 브랜드 라이센스 사업을 전개하였으나..
3당합당에 의한 김영삼 정권이 들어섰지만 공허한 업적 쌓기로 세계화를 부르짓으며 OECD 가입등을 위한 정지작업으로 상향조정한 1달라당 700원대의 고정환율이 불러온 과도한 외화유출등 이유로 정권말기의 IMF 사태를 맞이하며 많은 섬유회사들이 부도의 늪에 빠졌고 나는 주)논노를 퇴사하고 미국 워너브라더스의 라이센스 사업을 하는 후배회사에서 일 도와주었으나 워너브라더사가 CJ와 총괄 계약을 맺으면서 100억대로 키워 놓은 사업은 끝이났고 조그만 사무실을 내고 선이 닿는 바이어들의 오다를 받아 중국에서 제조 선적하는 에이전트일을 하며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였다.
1997년 12월 19일
제 15대 대통령선거를 치룬 결과 김대중은 약 40만표를 더 득표한 김대중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1년에 내가 지지했던 김대중의 당선으로 나는 이제 대한민국의 민주화는 확고하게 앞으로 나아갈 줄알았으나 나의 판단과 가치기준으로는 참담한 결과였다.
나는 섬유제조처를 베트남으로 옮겨 에이전트일을 하면서 한국과 베트남을 왕래하면서 나름 사업을 그러나 조금은 느슨하게 진행하였고 이때에 비로서 나는 생활정치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 김원웅 의원이 주도한 개혁당에 당원으로 정당에 참여하였고 노사모 활동을 하면서 노무현의 당선으로 새로 창당하는 열린 우리당원이 되어 당원 활동을 거칠게 하였다.
노무현 탄핵으로 인해 소위 탄돌이가 탄생하면서 152석의 거대 여당이 되면서 개혁정치는 이제 이루어졌다고 믿었으나 허사였다. 바로 40여명의 이탈자가 생겨났다. 소위 박창달 체포동의안이 부결되면서 개혁에 대한 기대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유재건을 필두로하는 안개모(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모임)이 생겨나면서 개혁의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고 나는 바로 그동안 모임을 갖던 당원조직을 확대하여 중개련(중단없는 개혁을 위한 당원연대)을 만들어서 국회의원들과 대립적 관계를 만들어 나가고 헌정 사상 최초로 평당원들이 원내에 진출한 국회의원들에게 질의서를 보내 무기명 투표에 의한 찬.반의사를 물어 답변서를 받아내었고, 이후 400에서 500여명을 동원하는 전국 당원 대회를 다섯차례나 치뤄내면서 대결 구도로 열린우리당의 개혁의지를 압박하였고 4대악법(언론법, 사학법, 과거사법, 보안법)의 개혁적 입법을 위한 강렬한 투쟁을 엄동설한에 여의도에 천막을 치고 민가협 어르신들과 함께 전개하였고 년말에는 국회본회의장의 당시 원내대표이던 천정배의 대표실을 점거하고 4개악법 처리를 요구하고 천대표는 년내 처리를 약속하였으나 결국 누더기 악법을 만들고 개혁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후로 결국 100년 정당, 당원이 주인인 정당이라는 캐치플레이를 외치던 열린우리당은 4년만에 침몰하고 노무현의 죽음과 유시민 따위의 망언과 이어진 정권 재창출 실패로 정치 혐오는 더욱 깊어졌다.
밑바닥으로 부터 존재하는 정치적 리더를 만들어내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 여러가지로 매진하고 있으며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이 시대의 사명이라고 믿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다.
어디 내어놓아도 그 누구에게도 빠지지않는 역사의식 민족의식에 있어 투철한 평소 존경하는 김원웅 전 통외통위원장의 옹립을 한때 주도하기도 하였으나 상호간 역부족이였고 뻐국이 둥지가 되버린 민주당의 궤멸을 보면서 친문이 아닌 반문이거나 비문 중에서 다음 정치적 리더를 선택하여 싸우지않으면 안된다는 신념을 가지고 이재명이나 박원순에 대한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기는 하나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그들 중 누구던 고비를 쥐고 있지 않으면 조정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상기하고자 한다.
이상 간략하게 내 개인 정치적 이력만을 피력하였고 (학력은 따로 알리고 싶지 않음..약간은 후회스럽기도 하고....보성중을 마치고 보성고등하교 재학 중 담임과의 격한 충돌로 인해 1학년이후 학교생활이 원만치 못했으며 2군데 지방 학교를 전전한 후 겨우 졸업장을 취득하였지만 수업을 등한시해서 수학능력이 현저히 떨어져 예비고사를 치를 만한 상태가 아니라 평소 취미로 하던 미술을 근거로 홍익대 미대를 지원했지만 따로 입시준비를 전혀 안한 탓에 결국은 홍익대라는 이름을 걸 수있는 홍익미술초대를 선택 간신히 입학하고 수학하였고 교수가 특별하게 애정을 가져주어서 졸업 후 원진레이온 광고부에 추천받았지만 흥미를 잃어 곧 퇴사하고...학교 생활 중 펑탄하게 잘 공부해서 서울대 연대.고대 다니는 부랄 친구들 때문에 광화문 소재 미문화원 USIS에 있는 서울 4대문 안의 서울대. 연.고대 이대 숙대 5개 대학생들만 모인 대학생 영어 회화 클럽을 끌려 나가게 되면서 어쩌다 연을 튼 이대생한테 쪽 팔려 열심히 영어를 공부한 결과로 앞서 말한 미국 회사에 취직함.) 우리 선친은 논밭 팔아 만주로 연해주로 장사하러 다녔으나 사업이 원만하지 못해 돈 다들어 먹고 집안에 면목이 없어 군에 들어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미군 207헌병대에 특무상사로 근무하던 중 6.25때 전사하여 동작동 현충원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현재는 후배와 함께 중국을 겨냥한 쇼핑몰을 구성하고 있으며 협동조합을 구성 운영 중에 있고 일주일 두번씩 유아원 아이들과 노인을 위한 영어수업 자원봉사하고 있고, 오래 전 미술을 할 때 불어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사실 문화적 허영일 수도..뜻한 바 있어 방통대 불문과에 편입하였으나 마무리 못한 공부를 지금 다시 시작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우리 상고사에 대한 특히 고조선과 그 후예들의 강역에 대한 지대한 관심으로 인해 강단사학이 아닌 재야 사학자들의 저서를 탐독하고 있고 절판을 피해 미리 사들였으나 미처 읽지 못하고 앞으로 읽어야 할 책들이 대략 500여권은 됨직합니다. 자랑질이네요..
71년 대선 신민당 참관시 증표.
열린우리당 때의 기록은 좀 뒤져 찾아서 보내죠.
사회활동 경력은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사무처장 엮임. 생활체육 연합회 성남시 궁도연합회 회장 엮임.
생활영어단어 지도사. 안전관리사 2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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