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우주교통에서 25여년간 시내버스를 몰고있는 김분임은 나와 뜻을 같이하는 동지이자 친구다. 한 남자의 부인으로 또 한아이의 엄마로 한국사회에서 그것도 보수적이라는 대구에서 여자로서 대형버스를 운전하고 살아왔을 삶의 무게가 남다르다. 까칠하고 비판적인 성격은 대중교통정책을 변화시켰고 책도 4권이나 발간했다. TV프로에도 여러번 출연했다. 나는 대중교통 전문가 김분임을 2014년 내가 만들고 결성한 글로벌 한인 전문가 모임의 창림멤버로 참여시켰고 한국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키는데 일조를 했고 앞으로도 아름다운 한국을 만드는데 앞장설 것이다. 나는 김분임을 더 많이 알고 싶어 살아온 이야기를 물었다. 보통 답하고 알려준 이야기는 내가 소화시켜 내 블로그에도 올리고 더러는 오마이뉴스에도 소개하고 또 이런저런 매체에 기고도 한다. 난 김분임의 이야기는 편집하지 않은체 소개하려고 한다. 김분임의 삶 이야기를 각색되지 않은 본인의 이야기로 그대로 전해야 할것 같아서이다. 오늘은 대중교통 버스기사를 스스로 가마꾼이라 칭하며 열심히 살고 있는 나의 사랑스런 동지 김분임을 여러분에게 소개한다. (편집자주)
1. 어린시절 이야기를 해주세요.
1960년 8월 15일 추석날 경북 고령군 인안리(지금의 달성보 건너)의 선산(일선) 김씨 집성촌의 가난한 집안에 아버지는 언어 장애인이시고 2남 3녀 중 셋째로 (태어나) 내 뜻대로 나온 것도 아니고 내 마음 대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어릴 적부터 죽어라고 일만 시키는 팥 쥐 엄마 같은 엄마에 왜 나만 일을 시키느냐고 말대꾸하고 대들다가 뒈지도록 매타작하는 천덕꾸러기였지요.
저는 어릴 적부터 아니면 따지는 천성을 타고 났나봅니다. 위로 오빠는 장남이라서 맏이 언니는 살림밑천이라서 아래 여동생은 여 막내라고 막내아들은 막둥이라고 오냐오냐(하고) 가운데인 저는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치며 생존본능의 경쟁을 집안에서부터 배우며 자란 미운오리새끼였습니다.
일곱 살부터 소몰이에 풀 바구니 들고 들판을 헤매고 살았으며 일머리가 좋다고 10살에 보리타작 모내기에 동네사람들이 서로 데려가려고 하였고 동네 갓난쟁이 애기들 업어준다고 뙤약볕에 익어서 얼굴은 발간 가재처럼 등에는 아이들 오줌똥 마를 사이 없었으며 집안의 천덕꾸러기는 이렇게 바깥으로 나돌며 동네일꾼으로 밥을 얻어먹었으며 동네사람들에게는 일이 있으면 아무나 아무 일이나 데려다 쓰는 심부름꾼의 칭찬동이로 살았습니다.
지금 와서 보니 이런 어린 시절 처절함의 경험들이 체질적 내면화가 되어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행동할 수 있는 저의 힘이 되고 오늘 날 내가 살아가는 가장 큰 유산이 되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2. 학창시절 이야기와 대구에 나오게된 동기, 그리고 대구에서 만든 삶의 반전은.
가난한 집안 형편으로 배울 시간이 없으니 학창시절이라고 할 것은 없고요. 초등학교 때 육상을 잘했어 4학년에 6학년을 뛰어넘어서 육상선수 선배들에게 엄청 미움을 받았고요.
학교 대표로 수시로 육상경기에 나갔으며 화려한 수상에 450여명 전교뿐만 아니라 군, 면, 동 등 학동댁 셋째 딸 김분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요.
상급학교 진학시켜 달라고 몇날 며칠을 때를 쓰며 울어봤지만 가난한 형편에 상급학교에는 진학 할 수가 없어 학창시절이라고는 없습니다.
운동뿐만 아니라 짧은 공부 또한 곧 잘하여 우등상을 받을 만큼 했지만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으며 요즈음 같으면 체육특기생으로도 진학을 할 수가 있었겠지요.
초등졸업 후 14살에 대구에 사는 고모님 친구섬유회사에서 베를 짜는 공장에 취직을 했으며 섬유공장 일을 하는 것은 밤에는 13시간을 뜬눈으로 베틀을 돌리고 낮에는 11시간을 일을 하는 것이고 배우는 일정양성기간에는 1년 동안 임금 1원 한 푼도 없이 일을 하여야 하든 시절이었지요.
이것이 일명 공순이 생활이고 14살의 어린아이가 먹고 자는 기숙사생활은 스스로 자급자족 생활이죠.
윗목에 물을 담아놓으면 얼음이 얼었고 시골에서 가져온 김치에 된장으로 하루한번 연탄불에 냄비 밥을 해먹어야 했고 점심 저녁은 아침에 해놓은 식은 보리밥에 찬 김치에 입안에서 맴도는 얼은 밥을 먹으면서 견뎌야 했고 어린 생각에 힘이 들수록 집 생각이 더해가고 해가 서산에 넘어가면 집이 있는 쪽 하늘을 바라보며 부모님이 보고 싶어 많이 울기도 했지요.
이런 생활에 어린 것의 꿈이라면 이 지긋지긋한 생활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고 하는 일에 적응을 못하니까 친구 또한 사기지 못하였고 방황과 갈등에 철없이 부모를 원망하기도 하였지요.
19살 꽃피는 봄 어느 월급 받고 가는 날 길가에 자동자운전학원이라는 간판이 보였으며 망설임 없이 학원으로 들어가서 등록비를 물어보니 학원비가 88,000원인이라고 하였는데 손에 쥔 그 달 월급 66,000원인데 학원 측에서 후불도 가능하다고하여 그 자리에서 월급을 몽땅 털어주고 등록하게 되었으며 그 후 밤에는 베를 짜고 낮에는 학원을 다녔으며 당시에는 자동차 학원이 별로 없었고 면허시험도 1년에 4회 정도였습니다.
대구3공단에서 경산 지금의 영남대학교 부근 차를 두 번 갈아타고 3시간을 왕복하는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다행히 한 번에 면허증을 취득했지요.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는 말이 있지요.
3. 대중교통 버스기사인 가마꾼을 하게 된 동기와 시작하고 난 뒤 에로점은?
면허취득 후 79년 지긋지긋한 섬유회사를 그만두고 택시를 하다가 남편을 만나 82년에 결혼하였으며 시가집 또한 무지 가난한 집에다 장남이라는 이유로 친정집안에서 반대하자 동거부터 시작 결혼을 하였고 월세 5만원에 아무것도 없는 밥솥하나 국 냄비 하나로 맞벌이하면서 살았습니다.
결혼 후 남편의 반대로 택시를 못하고 배운 도적질의 남 줄 수도 없고 다시 섬유회사 일을 하게 되었으나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26살에 소방공무원이 되려고 대형면허를 취득하게 되었고 공무원 여성 연령제한에 때문에 시내버스를 하려고 시도 했으나 보수동네 대구버스회사들이 받아주지 않았으며 32세가 되는 92년 5월 대구시내버스를 하게 되었습니다.
가마꾼을 하게 된 동기는 경제적인 이유죠. 목구멍이 포도청이고 포도청에 풀칠은 해야 하는데 지긋지긋한 섬유회사 밤일을 하지 않고 밥을 벌어먹으려니까 공무원이 되고 싶었고 그것이 여의치 않아서 가마꾼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제가 사는 보수동네 이곳 대구에서는 여성 누구도 시내버스를 하지 않는 일이고 하려고 하지 않던 시절이죠. 우주교통의 특별배려로 입사하게 되었고 입사 첫 날 전무님의 직접교육을 시키는데 교육을 위해 버스를 끌고 도로를 나가니까 길을 가던 사람들이 모두 쳐다보고 신호등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이 다쳐다보고 손가락질을 하였을 정도였습니다.
이 후 정식기사가 되어 운전을 하는데 승객들이 버스를 타면 운전기사 얼굴 한 번 더 보겠다고 특히 할머니 승객들은 누구 집 딸이냐 누구 집 며느리냐 얼굴한번 더 보자 하면서 어깨를 툭 툭 치고 내렸으며 초보운전자라서 일을 서툰데 내릴 사람들이 앞문으로 내리니까 승하차 시간이 길어서 더 힘들었으며 남자승객들은 "와~아 기분 좋다. 여자버스 기사다. 오늘 주택복권사야겠다."고 하면서 내리기도 했으며 출근길에 통권버스가 지나가면 창문가로 바라보면서 손가락질을 하지요.
들리지는 않지만 뜻은 머 "여자가 대단하다."라는 것이겠지만 동물원 원숭이가 된 기분이라서 안 좋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보수동네 척박한 동네에서 제가 열심히 일을 하므로 서 시내버스 여성 기사들이 늘어나고 요즈음에는 그래서 일반 시민의 눈에는 여성도 무엇이나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하였으며 시내버스 여성 기사들의 모습이 보통으로 보여 지는 오늘을 보면서 저의 작은 노력이 거름이 되었다는 직업적 자부심도 가지고 있습니다.
4. 대중교통 버스기사인 가마꾼을 하며 이룬 성취감중에 많이 알려진 한국 최초의 버스노선 안내사이트와 참여했던 대중교통개혁팀에서 느낀 점은 어떤것이 있는지요?
누구나 처음 하는 일은 서툴지요. 많은 사람을 수송하는 시내버스기사라는 것도 참 힘든 일이지만 남자들 속에서 여자가 혼자 버틴다는 것이 힘이 들고 피가(초밥 신호등의 초를 나누면 밥 먹고 산다는 뜻) 튄다고 할 정도로 힘든 시간과의 싸움이 힘든 일지요.
길을 묻는 대부분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이고 시골서 오시는 분들이고 이런 분들에게 정확하게 빨리 대답을 할 수 있는 것은 지명을 많이 익히고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길을 묻는 사람들에게 빨리 대답을 할 수가 있으면 시간을 줄일 수가 있다는 생각이 계기가 되어 운전을 하는 날이며 매일 지명을 기록하였으며 오늘 날까지 핸들을 잡으면 기록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이것이 대구시내의 지명들을 촘촘히 기록된 정보가 되는 초등학교에서 대학 동사무소 위치까지 기록한 정확한 정보가 되었습니다.
1998~2000년 한참 동안 9시 메인 뉴스가 주요 멘트가 정보화시대 인터넷 되었으며 그래서 저 또한 이런 기록들을 정보화 시키겠다는 생각에 우리나라 최초의 버스노선 안내사이트를 만들게 되었으며 4대 메이저 방송의 뉴스가 되었으며 컴퓨터 학원에서는 정보교육의 소재로 쓰인다고 하였으며 또 여러 언론에서 기사화 하고 방송에 출연도 하게 되었으며 이것이 저를 쉬지 못하게 하고 끌고 온 오늘날의 고삐가 되었습니다.
정보는 살아있을 때만이 가치가 될 수가 있고 새로운 정보를 항상 빠르게 보완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기록을 계속하다 보니 2005년 시내버스준공영제 준비과정의 대구광역시 대중교통개혁팀에서 일을 하게 되었으며 교통전문가라는 대구경북연구원 지역 여러 대학의 교수들이 1년 6개월간의 작업한 문제점을 제 손으로 가려내고 수정하는 일을 하므로 서 교통문제의 본질적인 문제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관료주의 갇힌 행정의 문제점과 이론지식의 문제점등 우리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5. 그 밖에 그 동안 이룬 성취와 그로인해 조절했던 이야기는?
눈에 보이는 저 개인의 작은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목적 없이 그 날 그 날 하는 일에 충실하면서 기록한 일상들을 모으니까 글이 되고 책이 되어(최근의 왕만 사는 나라) 네 권의 책을 쓴 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저를 "계몽주의 사상가다" 또 "철학자 같다" 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실제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이분들이 스쳐가는 이야기를 기록하다보니 결과를 보는 것이 아니라 과정을 돌아보게 되고 그래서 항상 과정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습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논리적인 까칠함이 되어 사람들이 칭하길 "까칠한 김여사"가 되었으며 제도권의 갇혀진 교육이 아니라 일상에서 만나는 이분들이야 말로 저를 살아있는 가르침을 준 선생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성취라면 손에 쥔 것은 아무것도 없고요, 제도권 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 밖에 못나온 제가 교통학자들과 논쟁했어도 논리적으로 제압할 수 있다는 저의 당당함이 있고 제가 가지고 있는 대구시라는 도시의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포만감이 있죠.
좌절이라면 가난 때문에 첫돌 지난 첫아이 실패를 하고 크게 좌절한 때가 있었지요. 이것 또한 가난 때문에 저를 아픈 상처를 뒤돌아보지 않기 위하여 저를 미친 듯이 혹사시킨 것이 사회적 가치에 몰입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6. 앞으로 전망과 스스로에 대한 조언은?
우리사회의 당면한 과제를 저는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제도가 없는 경쟁주의 소수가 독점하는 승자독식주의 자본주의는 이제 한계가 왔다고 봅니다.
효율성만 강조하는 경쟁력이라는 거품으로 과잉생산을 만들고 자본이라는 생명이 없는 수단이 누구나의 목적이 되어 인간적 본성이 파괴 되고 더불어 살아갈 자연환경이 파괴되는 사람이 없고 주인이 없는 우리사회를 보면서 결국 우리사회가 나갈 방향은 경쟁을 제한할 제도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 제도주의 출발점이 이동권 즉 "대중교통에 있다"라는 확신을 저는 하고 있습니다.
집을 나서는 순간 우리가 살아갈 사회가 되고 사회라는 공존의 가치는 서로의 경계가 되는 제도를 만들고 지키는 일이고 그것은 바로 대중교통을 제도화 시키는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제도와 시간과 비용은 삼위일체입니다. 그래서 대중교통을 기반 시설에 의한 제도적 시스템을 구축하여 개인주의 자가용을 억제하고 인적기반시설로서 누구나 스스로 자발적 선 공여를 하는 주인 의식을 만들어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공익공유제 공익인센티브제 같은 제도를 도입하여 국민 각자의 주체와 객체를 명확히 하는 제도주의 사회 공리주의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좀 거창하죠. 그러나 저는 확신을 합니다. 환경문제(미세먼지)노령화문제와 국민건강권 내수경제문제 제도주의기반까지 대중교통문제만 해결하면 다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정책이 되는 것입니다.
7. 가족이야기와 꼭 남기고 픈 이야기?
남편에게 아들에게는 늘 미안하지요. 말이 아내이고 말이 엄마이지 여느 집 아내 엄마처럼 해줄 수 없는 것이 미안하고 세 살 배기 아들을 혼자 어린이 집을 보내야만 하는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리지요.
오지랖이 넓어서 아무데나 아니며 따지고 설치니 집에 일은 두 번째 일일 될 수밖에 없지요. 살면서 의미 있었던 순간은 "KBS 강연 100도"에 출연했던 일과 페이스북이 영남일보 전면 판에 소개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최근에 제주 4.3사건 역사기행을 했던 일이 기억에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