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2. Humanities/23_생각해볼글

[한국 민주정치 역사의 산증인 하승운 선생님]

忍齋 黃薔 李相遠 2018. 7. 26.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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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민주진영에는 명문대학 출신의 독재에 항거한 많은 정치 명망가들이 구름처럼 몰려 무협지의 군웅할거와 주유천하를 방불케 하는 영웅담을 토해놓습니다. 정치는 정당을 기반으로 집권을 향한 발돋움을 합니다. 사실, 정치에서의 주인공은 영웅 같은 정치 명망가들이 아니라 당을 받들고 있는 기간 당원이라는 사실을 영웅들은 등한시하여 선거철 송사리 때처럼 정당이 만들어졌다 허물어지고 이합집산을 모래성 쌓기마냥 해오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여기 과거 열린우리당의 기간 당원으로 당원들과 뜻을 모아 '중단없는 개혁을 위한 당원연대(중개련)'를 만들어 헌정사상 최초로 평당원들이 원내에 진출한 당원들인 국회의원들에게 질의서를 보내 무기명 찬반투표로 그 개혁의 의지를 묻고 답하는 답변서를 받아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섬유 무역업으로 잔뼈가 굵은 하승운 선생님입니다.
 
전남 영암에 집성촌을 이루며 거세하던 진주 하씨 후손으로 하승운 선생님의 아버지 하남철 선생님은 국군에 입대하고 동대문 외곽 용두동에 있던 미군 207 헌병대에 차출되어 특무상사로 근무하던 중 6·25 한국전쟁이 휴전으로 향해가던 중 막바지 최대 격전지 중에 하나였던 금화 지구전투에서 분대 전체가 흔적 한 조각 남지 않고 산화했습니다. 휴전 후 전 분대원은 전사 처리되어 시신 대신 유품으로 동작동 현충원에 6.25 한국전쟁 전몰장병으로 모셔져 있습니다.
 
하승운 선생님은 6·25전쟁이 종반을 향해가던 1952년 9월 21일, 동대문구 제기동에서 하남철 특무상사의 유복자로 태어났습니다.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된 하승운 선생님의 어머니는 언제고 혹시라도 살아서 돌아올 남편 하남철 특무상사를 기다리며 하남철 특무상사의 명함과 사진을 가슴에 간직한 체 재가하지 않고 외아들 하승운 선생님을 키워냈습니다.
 
하승운 선생님은 서울 종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명문 민족사학 보성중학교에 진학했습니다. 학창시절 글짓기 표어짓기 대회에서 대상을 차지하는 등 모범적인 학창시절을 보내며 라디오의 팝송프로그램을 통해 영어 실력을 쌓아가기도 했습니다. 보성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후로 1년 연상의 여학생을 만나 좋아하면서 그 여학생의 하승운 선생보다 먼저 만난 남자친구인 같은 보성고 유도부 1년 선배와의 심한 갈등과 격한 충돌로 인해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잠시 방황의 시간을 가졌으나 심기일전하여 광주 숭의고등학교로 편입하여 졸업하였습니다.
 
1971년 4월 27일, 선거권도 없는 19살 나이에 제7대 대통령선거 경상북도 상주 신민당 선거참관인으로 참여하여 경험했던 불법 선거는 하승운 선생님에게 성실하고 진지하게 삶을 살아야 한다는 자각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 선거에서 경찰까지 합세한 불법 선거의 경험은 하승운 선생님에게 대학진학의 필요성도 일깨워주었습니다. 하승운 선생님은 경찰에게 폭행당하지 않으려고 상주 인근 산속에 숨어 있으면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선거참관인의 책무를 할 수가 없었음에 분통해 하며 박정희가 95만 표 차로 김대중에게 승리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하승운 선생님은 자신이 미술 디자인 쪽에 취미가 있음을 알고 홍익대 미대를 다니는 친구들에게 데생과 구성을 배우고 실기를 익혀 홍익미술초급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진학 후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 후에는 미국문화원 USIS 대학생 영어 회화클럽에 참여하여 영어공부에 열중했습니다. 그에 더하여 우연히 만난 미8군 군의관 로버트 마이어 대령에게 고급영어 회화를 로버트 마이어 대령이 한국을 떠날 때까지 무료로 배우며 미국유학을 준비했습니다.
 
하승운 선생님의 유학의 꿈은, 하지만 정부의 외화반출 금지와 유학시험 등으로 장학금을 받지 않고는 유학을 갈 수 없는 현실의 벽에 좌절하고 말았습니다. 용의 꼬리가 되느니 닭의 머리가 되라 했다던가요? 하승운 선생님은 비록 초급대학 출신이지만 출중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원진 레이온'과 미국계 글로벌 회사 AMC 한국지사에 연거푸 합격하여 급여와 직원복지가 좋은 AMC회사를 선택하여 섬유업 부분에 종사하며 꿈에 그리던 미국 유럽 등 세계를 누비며 근무하였습니다.
 
하승운 선생님은 뉴욕 센트럴파크 앞 바비존 플라자에 묵었던 첫 해외 출장의 감격을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유창한 영어 실력 덕분에 미국 AMC 본사 근무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수절하고 유복자인 자신을 낳아 길러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책임감에 줄곧 한국지사 근무를 자청하였습니다.
 
외국계 회사에 근무하며 잦은 해외 출장을 다니다 보니 하승운 선생님은 한국의 언론통제 심각성을 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진실에 가려진 1980년 5.18 광주 학살의 참상을 외국인 신부님의 동영상을 보고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하승운 선생님은 AMC를 퇴사하고 '신한인터내셔날에 이적하여 한국 최초로 미국 폴로 상품을 라이센스 런칭했으며 이탈리아 베네통과 프랑스의 다니엘 에스테 등 해외 브랜드를 총괄하는 이사를 지냈으며, 주식회사 논노에 스카우트되어 해외사업부를 맡아서 열정적으로 일을 하며 승승장구했습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요? IMF 사태로 많은 기업들이 무너질 때 국내 섬유업계의 양대 거인 주) 신한 인터내셔날과 주) 논노가 차례로 부도를 내며 문을 닫았고 하승운 선생님은 주) 논노 퇴사 후 섬유 쪽 바이어를 하며 중국과 베트남을 오가면서 근근이 섬유 사업 명맥을 유지하였으며 한 국가의 정치가를 잘못 뽑으면 사업은 물론이고 나라까지 부도가 난다는 걸 절감하면서 정치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생활 정치 일선에 뛰어들게 되었습니다.
 
하승운 선생님은 김대중의 집권과 그리고 연이은 노무현의 집권으로 개혁이 담보되는 줄 알았으나 결과적으로 참담했고 독립군 부부의 아들 김원웅 의원님이 주도한 개혁당 당원을 시작으로 적극적인 노사모 활동을 통해 노무현의 집권에 발맞추어 열린우리당의 열성적인 기간 당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하승운 선생님은 적폐 박창달 의원의 체포동의안 부결을 지켜보며 개혁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재건 의원이 반개혁 의원 모임 '안정적 개혁을 위한 의원모임(안개모)'을 주도하며 개혁의 걸림돌이 되는 걸 지켜보았습니다.
 
이에 하승운 선생님은 기간 당원으로서 '중단없는 개혁을 위한 당원연대(중개련)'를 만들어 헌정 사상 최초로 평당원들이 원내에 진출한 국회의원들에게 질의서를 보내 무기명 찬반투표에 대한 답변서를 받아 내면서 4대 악법(언론법, 사학법, 과거사법, 보안법)의 개혁적 입법을 위한 천막농성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연대하여 전개하고 천정배 원내대표실 점거로 4개 악법 연내 처리 약속을 받아냈습니다. 그러나 누더기 개헌으로 아쉽게도 개혁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100년 정당, 당원이 주인인 정당'이라는 캐치 플레이를 외치던 열린우리당은 4년 만에 침몰했고 '이명박이 집권해도 된다'는 유시민의 망언으로 이어지는 정권재창출의 실패와 노무현의 죽음을 하승운 선생님은 아픈 마음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 후 하승운 선생님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이 투철한 독립군 부부의 아들 김원웅 전 통외통위원장의 옹립을 주도했으나 역부족이었습니다. 이제 하승운 선생님은 문재인이 집권한 한국에 문재인을 이어 개혁을 완결할 리더를 옹립하기 위해 여력을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하고자 하승운 선생님의 뜻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하승운 선생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응원합니다.

 

참고:

하승운 선생님의 사회활동 경력으로는 '단재 신채호 기념사업회 사무처장'을 엮임했으며, '생활체육 연합회 성남시 궁도연합회 회장'을 엮임한바 있습니다. 자격증은 '생활영어단어 지도사'와 '안전관리사 2급'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한국 민주정치 역사의 산증인 하승운 선생님

 

 
언제고 혹시라도 살아서 돌아올 남편 하남철 특무상사를 기다리며 어머니가 고이 가슴속에 간직한 하남철 특무상사의 명함
 
동작동 국립묘지 6.25 한국전쟁 전몰장병묘소에 유품으로 모셔진 부친 하남철 특무상사 
 
고등학교 졸업후 젊은 시절 친구와 함께
 
1971년 4월 27일, 선거권도 없는 19살 나이에 경험했던 제7대 대통령선거 경상북도 상주 신민당 선거참관인
 
경찰에게 폭행당하지 않으려고 상주 인근 산속에 숨어 있으면서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선거참관인의 책무를 할 수가 없었다.
 
제7대 대통령선거 경상북도 상주 신민당 선거참관인 수첩

 

 

박정희가 95만 표 차로 김대중에게 승리하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사진촬영에 빠져있던 20대

 
열린우리당 기간 당원으로서 '중단없는 개혁을 위한 당원연대(중개련)'를 만들어 헌정 사상 최초로 평당원들이 원내에 진출한 국회의원들에게 질의서를 보내 무기명 찬반투표에 대한 답변서를 받아냈다.
 
'중단없는 개혁을 위한 당원연대(중개련)'회의에 참석한 이종걸 의원과 하승운 선생님

 

 

하승운 선생님은 4대 악법(언론법, 사학법, 과거사법, 보안법)의 개혁적 입법을 위한 천막농성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와 연대하여 전개하고 천정배 원내대표실 점거로 4개 악법 연내 처리 약속을 받아냈다.

 

5.18의 의인 안병하 모임, 위안부소설 나비,날다 영문판 알리기 모임 등 활발한 사회활동중 

 

박원순을 응원하는 모임

 
독립군 부부의 아들 김원웅 전 외통위원장과 함께
 
박원순을 응원하는 모임
 

독립군 부부의 아들 김원웅 전 외통위원장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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