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8_黃薔(李相遠)

[열심히 살아 온 보답들]

忍齋 黃薔 李相遠 2018. 10. 21.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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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살아온 보답들] 

보답 1 - 미국 유학 

80년대 미국 유학을 나왔습니다. 한국에서 전북대 농공학과를 나왔습니다. 농토목이라고 토목과보다 관계배수학 같은 농촌기반시설 분야를 더 공부했습니다. 잡지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외국 저널에 비점오염(Non-point Source Pollution)을 접하게 되었고 궁금한 점들을 그 논문을 발표한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한국농촌의 무분별한 농약사용이 딱 비점오염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니 11곳의 쟁쟁한 대학교수님들이 함께 연구하자며 제게 대학원 입학을 권유하는 겁니다. 

그때는 돈이 있어도 외국에 달러를 가지고 나갈 수 없던 시절이고 문교부에서 치루는 유학 자격시험도 통과를 해야 유학을 나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당시 월급이 보너스 합쳐서 한 70만 원 정도 받았던 거 같습니다. 그런데 그 월급이 대기업 수준이었고 은행에서 마이너스카드까지 내주던 좋은 수준이었습니다. 전두환이가 언론 통폐합을 하면서 언론계 종사자에 대한 대접이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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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제게 함께 연구하자고 권하는 교수님들이 스타이펀드(stipend)라고 자신의 연구를 도와주는 연구조교(RA)나 학생들 수업을 도와주는 수업조교(TA)를 제안하면서 촌구석 학교는 800불 도시학교는 1000불을 제안하는 겁니다. 소위 아이비리그 학교는 돈이야기는 일단 와서 이야기하자고 하더군요. 아니 잘나간다는 언론계 종사자인 내가 받는 월급보다 더 주고 공짜로 대학원 공부까지 시켜준다니 바보 등신이 아닌 이상 마음이 요동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군다나 직장 근처 종로경찰서 정보과 형사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정신 차리고 근무 잘하냐며 범죄자 취급을 하고 직장상사들은 '자네 운동권인 줄 알았으면 뽑지도 않았어'라며 가자미눈을 하며 쳐다보기 일수였습니다. 울고 싶은데 뺨 때려 준다고 참아야 할 순간에 치고받고는 가장 월급을 많이 준다는 Virginia Polytechnic and State University라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긴 이름의 학교 농공학과로 월 $1200을 받기로 하고 연구조교로 나왔습니다. 

월급이 다른 학교에 비해 200불에서 400불가량 많았고 편도 비행기 표까지 받았으니 지도교수님이 정말 좋은 분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촌구석에 있는 그 학교는 후일 조승희 군이 토목과 수리연구실 교수 학생들을 싹 죽이는 바람에 유명한 학교가 된 바로 그 '버지니아텍'이었습니다. 물론 돌아가신 그분에게 수리학특론 수업도 들었지요. 

그런데 한국 농공학과는 그냥 토목과였습니다. 미국 농공학과는 농업 공학에 관련된 연구를 하는 학과였습니다. 그리고 학위를 받고 사회에 진출하는 사람들의 연봉이 토목과는 최소 8만 불인 반면에 농공학과는 그 절반 4만 불이었습니다. 뿌리 과학 등등 생소한 농업공학 분야도 힘들었지만, 처자식 봉양해야 하는 처지에 장래 걱정을 안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대충 초청해준 지도교수님에게 결례가 되지 않는 수준에서 보스턴의 노스이스턴대 토목공학과로 전학을 하였고 한 학기 공부하고 한 학기 미국회사에서 일하며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그러다 비주얼베이직이 막 나오던 때 '더미를 위한 비주얼 베이직'공부를 해서 포트란으로 공학 계산 프로그램을 짜면 비주얼 베이직으로 그래픽 인터페이스를 구현하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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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답 2 - 미국 연방 공무원 

제가 그러는걸 지켜보던 대기오염 모델링을 하시던 그레고리 교수님이 어날리티칼(analytical) 솔루션을 많이 사용하는 지하수 오염 분야에 그 재주를 활용해 보라고 권하길래 '지하수 오염 모델링 시뮬레이션'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지하수위 아래인 포화 대지하는 토질역학·공학으로 MIT에 석학들이 즐비했고 박사학위 연구 주제도 이미 남들이 다 연구한 것이라 비집고 들어가기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버지니아텍 농공학과에서 공부한 뿌리 공학을 응용해서 지표면에서 지하수위대까지 불포화대 연구에 매달리기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EPA에서 주유소와 세탁소에서 발생한 오염물질이 토양을 오염시킨다고 오염시킨 주유소와 세탁소에 복원 명령과 벌금을 수십만 불씩 부과하였는데 주유소 협회와 세탁소 협회에서 유명한 교수들을 고용하여 재판에서 EPA가 패소하는 일이 빈번했습니다. 

EPA는 인도계 학자가 개발한 토양 오염 정도를 추정하는 컴퓨터 모델을 사용하는데 이게 지하토질을 균질(homogeneous)하게 간주하고 하는 거라 주유소와 세탁소에 고용된 학자들이 지하토양을 2계층 정도의 불균일(heterogeneous)하게 해석해서 EPA 오염 수치는 실제보다 과한 오염 수치라고 주장하는 게 법정에서 먹히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EPA가 큰돈을 들여 아예 heterogeneous 하게 여러 토질 층에 적용하는 표준컴퓨터 모델 공모에 나섰고 저는 지하수 위에 오염물질이 섞이는 정도까지 연장해서 해석하고 그 컴퓨터 모델을 비주얼 베이직으로 구현해 보겠다고 제안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랬더니 프레젠테이션을 해달라고 하고 간단하게 시연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겁니다. 사실 간단하게 비슷한 걸 혼자서 '더미를 위한 비주얼 베이직' 공부를 할 때 만든 게 있었습니다. 쟁쟁한 학자들과 쟁쟁한 기술직 공무원들 앞에서 시연했습니다. 내용이야 그 과제에 지원한 쟁쟁한 학자들 것과 거기서 거기였지만, 

지하수 위와 섞이는 지점의 오염치를 구현하고 그 입력과 결과를 윈도 환경에서 그래픽으로 구현한다는 게 어필을 해서 그 과제를 수행하게 되었는데 해군에서 보자는 겁니다. 그 프로그램에 지하수와 섞이는 부분을 연장해서 지하수가 배출되는 지역까지 프로그램을 짤 수 있겠냐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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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핵잠수함을 운영할 때 무식하게 핵 쓰레기를 덤핑해서 그게 문제 되는 곳들이 있는데 그걸 확인하는 도구가 필요했던 거지요. 그 도구로 제가 제안한 EPA 프로그램을 쓰겠다는 것이니 신나도 이런 신바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하수 공부한다고 브라운대학 지질학과 지구물리학 헐만 박사 밑에서 지하수 공부도 했고 해군이 지원하는 오션그랜트 학교 중에 하나인 로드아일랜드 주립대(University of Rhode Island)에서 연구를 마무리하고 그 연구결과들을 가지고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학생 신분으로 큰 과제를 수주하여 교수님들 월급을 주면서 공부를 했고 또 핵 어쩌고 하면 탑시크릿트가 붙어 정부가 보증하여 저절로 신분도 해결되었고 어디 도망도 못 가게 연방 공무원으로 붙잡혔는데 이게 좋은 직장을 저절로 잡는 꼴이 된 것이지요. 원래는 촌구석에 처박힌 국립연구소에 있어야 하는데 제 각시가 그런 시골 갈 거면 너 혼자 가라고 해서 일반직 공무원을 택했습니다. 

육군공병단 근무 시에는 무슨 모델 이야기만 나오면 아예 거론된 모델 시뮬레이션을 다 구현해 버리는 바람에 미국판 4대강 사업인 플로리다 남부 복원사업을 전담했고 그 결과를 윗사람이 자기 공으로 돌려 훈장을 받는 조건으로 저를 초고속 진급을 시켜 그곳에서 대각선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샌프란시스코 지역 에너지성 산하 단체로 2003년 말에 전근을 오게 되었습니다. 

보답3 - 부동산투자 

그런데 샌프란시스코 지역은 물가가 비싸서 십만 불이 넘는 연봉에 비싼 지역 고려한다고 몇만 불 더 주는데도 이 지역에서는 홈리스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십만 불 좀 넘는 수입으로는 2~3십만 불대의 집에 사는 게 상식적인데 이건 그 5배가 넘는 것이니 집값이 미쳤다고 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도 아는 사람 통하고 해서 어마어마한 팔로알토에 내가 내던 월 모게지 수준으로 살고 싶을 때까지 살라는 분들이 있어서 아들 공부시키고 그 집에서 직장을 재작년까지 다녔습니다. 제 각시는 손가락을 빠는 한이 있어도 백만불하는 집을 사서 살았어야 한다고 아직도 주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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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기지는 제 수입을 엄청나게 초과하고 제 각시가 다시 병원에 근무하며 오물 튀겨가며 일해도 손가락 빨고 살기도 벅찬 수준이었습니다. 비싼 곳이 있으면 싼 곳도 있습니다. 그래서 눈 딱 깜고 아프리칸 아메리칸들이 모여 살아 백인들과 동양인이 얼씬도 안 하는 곳에 제 각시의 반대를 무릅쓰고 샀습니다. 

오클랜드 우범지역, 리치먼드 언인코퍼레이티드(Unincorporated) 지역, 이스트 팔로알토 게토(ghetto) 지역. 하나는 듀플렉스에 이스트 팔로알토는 대지가 3백 평이 넘는 집입니다. 전부 합해봐야 60만 불이 넘질 않았습니다. 

6년 전에는 싼 가격에 2003년부터 살게 해준 집주인 영감님이 돌아가시고 재작년에는 집주인 할머니가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자식들이 집 팔겠다고 해서 이사를 해야 했는데 남미계에게 세를 주던 이스트 팔로알토로 이사를 했습니다. 시골에서 5만 불도 안 할 우리가 세 살던 집이 2.6밀리언에 내놓차마자 팔렸습니다. 제 각시는 지옥에 가는 표정으로 따라왔지요. 

제 각시 말대로 그 집을 15년 전에 1밀리언에 샀으면 지금은 1.6밀리언의 차액이 생겼겠지요. 하지만 사는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봐야 뭐합니까? 그 집 팔면 어디 가서 사나요. 다른 집은 함께 오르지 않겠어요. 그 세월 감당하기 힘든 모기지 내느라 싸우고 불화하다 이혼하기 딱 맞지요. 

그런데 이스트 팔로알토로 이사하고 나니 예전의 이스트 팔로알토가 더 이상 아닌 겁니다. 오래전부터 해가 바뀔수록 거 무신 분들이 스탁톤 안티옥 등 내륙 쪽으로 이사를 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오클랜드와 리치몬드 집값은 10배 가까이 올랐고 이스트 팔로알토는 3배 가까이 올랐습니다. 돈 욕심에 팔고 싶어도 다시 그 가격에 어찌 살 건가를 생각하면 그냥 놔두고 열심히 세나 잘 받아야 할 판입니다. 세입자들이 그동안 불만 한번 비춘 적이 없었던 것이 처음 입주할 때 내던 월세를 한 번도 올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변 월세들이 2배 3배가 올라있던 겁니다. 이사한 이스트 팔로알토는 바다 쪽으로는 페이스북 본사가 고속도로 주변엔 아마존 별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또 지난달에는 제가 사는 골목이 1에이커(약 천 평)당 집을 3층까지 22체까지 지을 수 있도록 조닝이 바뀌어 최종 통과가 되었습니다. 제가 사는 집터에 최소 5체에서 6체까지 집을 지을 수가 있는 겁니다. 

당장 살고 있으니 그것이 소득으로 직결되지는 않습니다만 기분이 좋아집니다. 제 각시의 이루지 못했던 팔로알토 집 구매를 못 한 원망도 확 줄어들었습니다. 또 카트리나 이재민들을 위해 23만 불을 투자해 지은 미시시피 베이스 앤 루이스 지역의 집값 하락에 대한 정부에 대한 원망도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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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개처럼 취급당했지만, 열심히 살았던 미국에서의 삶에 대한 보답은 줄줄이 사탕으로 이어지고 있는 거겠지요. 꿈이 아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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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i.east-palo-alto.ca.us/index.aspx?nid=619&fbclid=IwAR3nWEsNVg3EaVJrwk47xDBQI-LqeYYfIihe_1jhrdMXK7JPSf9Tcfq9V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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