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이민 사회 속의 이민 2세들에 대한 단상]

忍齋 黃薔 李相遠 2019. 2. 14. 02:39
반응형

모두가 치과의사가 되고 의사가 되고 변호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한국인들이 자식에게 원하는 바이고 더러는 자식 본인도 원하기도 합니다. 특히 미국 교민들이 원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툭하면 "내가 누구 때문에 미국 와서 이 고생을 하는데?"라고 자식들을 겁박하기도 합니다. 덕분에 한국 교민 자제들은 다른 인종에 비하여 미국 사회에 전문가들로 자리를 많이 잡았습니다. 물론 자신이 원하고 부모가 원하고 능력과 재능까지 겸비하여 전문가가 되어 한인사회를 빛내는 수많은 인재를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1) 
고등학교 방학 때 미국 국립보건원(NIH) 팰로우쉽을 받아 쟁쟁한 학자들과 함께 연구했던 제 아들에게 제가 원하는 바를 포기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약사를 하던 교민이 미국 와서 세탁소를 하며 자식들을 키웠습니다. 자식들 중에는 약사, 치과의사, 변호사로 전문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천방지축으로 살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군대에 가서 검정고시로 고졸 학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제대하고 군 가산점을 이용하여 주 공무원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민이 심장마비로 급사를 했습니다. 전문가로 키운 자식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장례식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 쓸쓸한 죽음을 지킨 자식은 천방지축으로 살던 동네 공무원 아들이었습니다. 주변 친지들에게조차 내놓고 자랑하지 못해 없는 자식 취급했던 전문가가 되지 못한 아들이 동네 공무원이 되어 평소에도 아버지의 벗이 되고 위로가 되다가 결국 죽음도 지키고 외롭고 쓸쓸한 아버지를 요단강 너머로 보내드렸습니다.
.
후일 기회가 되어 약사, 치과의사, 변호사 자식들에게 물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아빠의 장례식에 못 오다니 미국 사람들도 그러지는 않는데 그 이유가 뭐냐고? 그랬더니 어린 시절부터 공부만 하라고 다그치고 더러는 매를 들고 영어도 못 해서 자신들의 말도 못 알아듣던 그 아버지는 저주의 대상이었답니다. 그래서 너희들이 지금 약사, 치과의사, 변호사로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어 돈 걱정 없이 풍족하게 사는 게 너희 아버지의 닦달 때문이라고 생각 안 하니? 그건 그렇지만 미운 건 미운 거랍니다. 

그때 전 아들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아들이 원하는 데로 사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2) 
세계적인 제약회사 화이자에서 회계사로 은퇴하고 뉴저지에서 은퇴 생활을 하시는 일가숙부벌 되는 William Lee 선생님은 어려운 시절 혈혈단신 유학을 나와 MBA를 받고 회계사로 취직하여 묵묵히 평생을 한 회사에 근무하면서 자식 둘을 의사와 월가 투자전문가로 키웠습니다. 자식들이 원하면 원하는 데로 열심히 부부가 회계사로 일하며 묵묵하게 뒷바라지를 해주었습니다. 말년을 두 아들이 시시때때로 직접 안내하는 알찬 여행으로 행복하게 주위의 부러움을 받으며 살고 계십니다. 

(3 - 
Passive Aggressive

B모라는 일가가 있습니다. 20여 년 전 우연히 온라인을 통해 그 존재를 알았습니다. 치과의사가 되기 위해 준비를 한다고 했습니다. 본인이 하고 싶었는지는 모르지만, 미국에서 목사를 하는 그 부친은 그가 치과의사가 되길 원했습니다. 연락이 뜸하다 수년이 지나 또 연락이 닿았습니다. 이번엔 MBA를 준비한다고 했습니다. 목사인 부친은 작고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또 연락이 뜸했습니다. 몇 년 전 목사가 된다고 신학교에 입학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에서 장가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
몇 년 전부터 제가 일찍 작고하셔서 단절되었던 제 고조부 증조부 조부 부친의 삶을 추적하여 블로그에 올리고 있습니다. 족보에는 제 고조부가 생전 주사 시절에 만들어 졌는지 진사입격에 주사를 했다는 기록이 있고 증조부는 금광국 기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어른의 증언과 조선왕조실록 국조 방목 승정원일기 총독부관보를 통해 고조부는 1915년 독살당하고 증조부는 고조부 독살 1년 전 1914년에 금광국에서 저 멀리 평안북도 동면 면장으로 전보한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고조부 독살 뒤 증조부는 평안북도 동면 면장을 사직하고 1916년에 충주 금방산 21만 평에 금광업 면허를 취득하여 금광업에 종사합니다. 1918년 일본인에게만 금광 면허를 발급하라는 일본 내각의 훈령이 내립니다. 1919년 고종 승하의 의문을 제기한다는 구실로 증조부를 참살합니다. 그때가 제 조부 11살 때였습니다. 11살의 어린 조부는 집안 내력에 대한 가승을 하나도 간직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내용을 보고 한국말도 잘 못 하는 이 B모라는 일가는 족보 타령하는 한국의 일가들과 합동으로 과거급제(제 고조부가 관직에 들 때는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는 폐지되었고 마지막 진사시 3등을 하셨습니다)도 못한 제 고조부가 어찌 학두마리의 당상관을 하느냐? 다른 일가의 관직을 제 고조부의 관직이라 사칭한다는 공격을 하고 있는데 그런 건 참을 수 있지만 #살인마 #전두환 을 처형하라는 제 주장을 트집 잡아 제가 미연방 공무원인 것과 5.18항쟁과 김대중 선생 그리고 전라도를 모욕하고 있습니다. 

근 20년 동안 치과대학에 실패하고 MBA 과정 도전에 실패하고 이제 목사가 되는 신학대학의 신학생이 되어 이리 인성이 파괴된 언행을 보인다는 게 슬프기 그지없습니다. 개신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과 인간의 죄를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B모 일가에게 임하길 간절히 기원할 뿐이고 이민 1.5세를 자식으로 두고 있는 아비의 심정으로 B모를 위해 기도할 뿐입니다.
.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