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01_韓山 李氏

[향기 있는 삶의 이야기 2 - 67년 미국유학 선도자 이원복 전 화이저 회계사]

忍齋 黃薔 李相遠 2018. 7. 28.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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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여러분께 소개할 분은 제가 속한 목은 이색 선생의 후손 한산이씨 종친 일가 아버지 학열의 이원복(William Lee) 선생님의 이야기입니다. 우선 1939년생이시니 한국연세로 춘추 80이십니다. 한산이씨 페이스북 그룹 운영자를 맡아하실 정도로 연세가 무색할 만큼 인터넷 사용이 젊은이들을 초라하게 만드십니다. 한국에서는 명문 대전고와 충남대학교를 나오시고 ROTC 1기로 군복무를 마치신후1967년 뉴저지의 명문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로 유학을 나오셨으니 미국에 오신지 51년째에 접어듭니다. 그 대학에서 MBA까지 하셨으니 올드타이머로는 대단한 유학성과를 올리며 세계적 대기업 Pfizer에서 공인회계사로 근무하다 은퇴하셨습니다. 부인께서는 전북대 간호대 전신인 전주간호전문대를 나오시고 보사부 공무원을 하시다 뉴질랜드에서 보건학 석사까지 하신 재원에 역시 미국에서 MBA를 마치셔서 MBA부부이십니다. 두 아드님도 한분은 의사로 또 한분은 월가의 투자전문가로 키우셨습니다. 춘추80의 연세에 세상을 청춘처럼 살고 계시는 이원복 선생님을 2차례에 걸처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한산이씨 일가 숙부벌 되는 William Lee(이원복) 선생님은 1939년 충청남도 서천군 서천면 화금리 대숲밭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초등학교는 청주 주성초등학교를 입학하여 5학년까지 다니다가 6.25난리통에 깜둥이피난을 고향 대숲밭으로 돌아와 지금은 폐교된 연봉초등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9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중학교는 서천중학교를 졸업하였습니다.

 

 

대전고 2학년때 

 

 

대전고 3학년때 서천중 출신들과 함께

 

명문 대전고등학교를 37회로 졸업하고 59년 충남대학교로 진학하여 63년 ROTC 1기로 전방소대장으로 군복무를 하고 65년 4월 제대를 하였습니다. 전역후 2주만에 아버님을 여의고 2년동안 미국유학을 준비하여 67년 10월 뉴저지에 있는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에 유학하여 학부와 MBA를 마치고 세계적 대기업 Pfizer에서 공인회계사로 근무하다 은퇴하셨습니다. 

 

 

 

42년생 부인은 전주간호학교(전북대 간호학과 전신) 출신 공무원으로 뉴질랜드 빅토리아대학 WHO 장학생으로 공중보건학 대학원과정을 공부한 재원으로 미국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에서 회계학을 전공하고 Allied Chemical에서 근무했습니다. 슬하에 2남을 두어 명문 프린스톤을 졸업하고 MD로 미국 주류사회에 살고있는 자랑스런 큰 아드님 혁원(Jeff)군과 샌인트 루이스에 있는 명문 워싱톤 대학에서 영어와 회계학을 공부하고 뉴욕 금융가에서 근무하는 2남 스티븐이 있습니다. 

 

 

 

오른쪽 부터 큰아들 재프, 원복 숙부, 숙모님, 2남 스티븐

 

아래 내용들은 원복 숙부께서 페이스북에 올리신 살아오신 이야기들를 갈무리하였습니다.

 

William Lee 조카님. Lipitor를 만든 회사 Warner Lambert Co.(Pfizer 와 2002년에 Merge 했음) 에 1973년 MBA를 얻은 후 급우의 도움으로 들어오니 외국 사람은 단 저 1명. 제 입사 시 1971년에 아내가 공중보건 간호사(Victoria University, NZ에서 공중보건학 석사학위 취득) 직종으로 영주권을 신청해 영주권자? 시민권자? 인가를 묻는 질문에 영주권 신청 - Pending 으로 썼었지요. 입사 1년 후(3년 만에) INS는 미국 병원에서 실제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신청을 거절했습니다. 그 후부터 F-1, F-2 Visa가 Expire 했다고 게속 출국하라는 편지가 왔었지요. 그 때 한국에 나갈려고 결정했습니다. 막내 누나 매부님이 석사학위서 원본을 보내라기에 보냈더니 3주 후 명지대학 회계학 시간 강사직이 가능타고 해 여비에 보탤려고 가구 등을 다 팔고 사직서를 제출했습니다. PC가 나오기 전이어서 모든 Finance Report를 손으로 써 SEC로 보냈었습니다. 사표를 제출하고 1주 후 밤에 Assistant Controller가 집으로 전화를 했습니다. 우리 둘 다 미국에 살기를 원하는지 여부를 확인한 후 회사와 제 개인이민 변호사가 합동작전을 벌려 4개월만에 영주권을 따냈습니다. 제 상관들이 제 숫자 글씨를 좋아했다면서 회사가 저를 필요로 했다고 들었습니다. Warner-Lambert의 평판은 제가 영주권 따기 전에 갑자기 좋아져 많은 높은 자리를 지원할 수 있었으나 저는 영주권 관계로 그냥 제자리에 머물다 영주권 도와준 상관이 둬 번 올려채주어 그런대로 있다가 2002년 Pfizer, W-L Merge 시 좋은 Enhanced Retirement Package 받고 (그 당시 제 나이 62세) 나왔습니다. 그 당시 벌은 월급은 큰애 등록금(Princeton & University of Pittsburgh, School of Medicine)과 생활비로 많이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많은 돈은 아니지만 매달 우리를 돕고 있습니다. 오히려 막내는 장학금을 받고(전 Tuition 면제) 제 자신의 결정으로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과외로 Finance 계통 과목을 택했습니다. 2001년 9.11 나던 해 에 Merrill Lynch에 입사 후 2년 반 다니다 사표를 내고 Cornell에서 MBA(Johnson School)를 마치고 ML HK Office에서 5년 이상 일하다 다시 NY으로 와 Trader/Investment Strategist로 일하고 있습니다. 얘가 아마 제 형 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으리라 압니다. 우리 2 늙은이 그냥 평안하게 살고 있습니다. 언제 제 영주권에 대한 글도 올리려고 합니다. 가장 어려웠던 시절이었죠.

 

 

67년 미국유학을 떠나기 위해 김포비행장에서 

 

William Lee added 2 new photos.

April 8Malapardis, NJ

[옛날을 되돌아 봅니다 --- 유학 계획이 가속화되었던 이유]

1963년에 전방 보병 소대장으로 부임했습니다. ROTC 1기생으로 고생 참 많이 했습니다. 이곳으로 유학올 계획은 대학 시절부터 했습니다만 좀 빠르게 진행해야할 이유가 군복무 중 생겼습니다. 제대를 1년 남겨놓고 육사 출신 연대장이 불공평한 일을 했습니다. 서울대 출신 한 소대장을 연대 작전참모 보좌관으로 임명했습니다. 저는 충남대를 나왔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서울대 출신이 아닌 다른 소대장들도 몹시 마음이 상했으리라 믿습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그 연대장은 그 당시 사윗감을 물색 중이라고 했습니다. 조그마한 연대 내에서도 이럴진대 사회에 나가면 지방 대학을 나와서는 살아나갈 견고한 자리를 마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혀를 깨물었습니다. 하루 빨리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1965년 4월에 제대하고 귀가하니 2주 후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어머님은 1948(제 나이 9살)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대 후 2년간 열심히 노력해 유학 준비를 마치고 1967년 10월에 F-1 Visa를 갖고 이곳에 온 후 계획했던대로 일을 끝마치고 현재 같은 타운에서 50년간 살고있습니다.
사진 설명:

 


좌측 사진 ~ 1963년 군단본부 막사에서

 

우측 사진 ~ 1963년 강원도 양구 대암산(대우산)
'피의능선'에서 분대장들과 함께.
'을지전망대', 'Punch Bowl', '제4땅굴'이 대암산 부근에 있습니다.

 

 

 

[정신상태가 이상해진 육군사관학교를 폐지하고 통합군사관학교로 통폐합을 시키길 바란다.]
한국 ROTC 1기 William Lee 숙부님이 느끼신 육군사관학교 출신-
.
<항명죄>
Samuel Lee 일가님의 아래 글을 읽고 정말 감명 많이 받았습니다. 특히 항목 5항(5. 정신상태가 이상해진 육군사관학교를 폐지하고 통합군사관학교로 통폐합을 시키길 바란다)에 기재한 육사 폐지 건의 사항을 찬조키 위해 제가 오래전 1963년 광주보병학교 ROTC 1기 12주 과정 장교 훈련에서 겪었던 육사생 구대장의 만행을 폭로한 댓글에 무려 14명의 페친님들이 무언의 관심을 표하셨습니다. 14명 페친님들의 귀중한 관심을 그대로 남겨둘 수 없어 우리 ROTC 보병 병과 1기생 4반이 체험한 사실을 밝힐려고 합니다.
저희들 나이 80에 가까워지고 있지만 동기 중 그 누구 하나도 이 사실을 폭로한 사실이 없습니다. 아마도 후배들에게 영향을 끼칠까 염려되어 입을 다무렸다고 봅니다.
벅찬 기대와 1기생 장교라는 긍지에서 많은 어려움과 서러움을 참고 12주 과정 중 9주 과정은 무사히 끝마쳤습니다. 3주를 남겨놓고 육사 출신 신임 중대장과 구대장이 부임했습니다. 아마 악질들만 선출해 3주간 더 가혹한 영내 훈련을 실시하라는 임무를 갖고 부임했음이 분명하다고 믿습니다. 9주 동안과는 달리 점호시간도 엄청 길어졌고 훨씬 엄격해졌습니다.
대답이 부정확하면 심한 Hook을 당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새벽 1시에 완전무장 비상이 걸려 선착순으로 집합을 해 꼴찌 20여명은 그 넓은 연변장 3바퀴를 돌게도 했습니다.
10주째 훈련이 시작하던 날 영외 훈련을 마치고 귀대하는 즉시 완전무장 선착순 집합 명령을 받고 연병장에 집합하였습니다. 연병장을 구보하라는 명령입니다. 5바퀴 돈 후 전 훈령생이 기진맥진했지만 목표인 7바퀴를 돌았습니다. 단 1분의 휴식도 없이 배낭과 총을 벗으라 합니다. 바로 Push-Up으로 들어갑니다. 5번 정도 하니까 중대 전원이 일어날 기력을 잃고 땅에 엎드리고 말았습니다. 구대장의 칼날같은 고함이 들려 왔습니다. 일어나! 일어나! 그러나 사전에 약속이나 한 듯 전 훈련생이 구대장의 명령을 무시한 채 그대로 엎어져 있었습니다.
30여분 엎어져 휴식을 취하니 살 것 같았습니다. 마이크로 들리는 구대장의 격한 목소리: "즉시 각 구대 영내로 들어가라."
영내로 오자마자 각자 자리에 놓인 종이 한 장. 전 중대 훈련생을 항명죄로 취급하니 다음 명령을 기다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후터는 모든 것이 선착순. 꼴찌 20명은 항시 개취급을 받았습니다.
휴가, 외박, 면회 일체 금지. 아침 6시 기상 대신 5시 기상.
이런 상황 하에 1주를 보냈습니다. 보통 시 3-4 주를 보낸 것 같았습니다.
마침내 올 날이 왔습니다. 2 주를 남겨놓은 월요일. 전중대원은 영내화(고무신) 갖고 연병장에 집합하라는 명령. 고무신을 손에 들고 근 7바퀴 연병장을 돌은 후 구보로 우리 막사와 가까운 영내 한 공중화장실 앞에 도착했습니다. 조그만 Bucket을 이용해 영내화로 똥물을 퍼내어 Bucket에 담아 부근에 마련된 똥저장소로 옮기라는 명령입니다. 왼종일 퍼냈습니다.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취사장 취사병들이 우리가 불쌍하다고 이날은 특식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12주 훈련 수료식에는 육사 출신 그 악질 구대장놈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송정리 역에서 특별히 마련된 기차를 타고 12주 동안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차창 밖을 내다보곤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앞으로는 광주쪽으로 대고 오줌도 안 싼다고 굳게 약속했습니다.
지금도 육사 출신 중대장 구대장들의 만행을 생각하면 같은 인간으로 같은 장교로 있을 수 없는 일을 했다고 믿습니다.

 

 

거론 조차 하기 싫은 6.25가 다시 다가옵니다. 제가 11살이 거의 다 될때 입니다. 어려운 때라 헝겁떼기로 만든 야구공 크기의 공으로 청주중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재미있게 축구를 하고 있던중 계속해서 조치원 쪽으로 가는 칙칙폭폭 화물 열차 소리를 들었읍니다. 저녁에 집에 돌아 오니 할머님 말씀: "원복아! 난리 났단다."
난리 중 지금도 기억에 남아있는 제가 겪었던 몇가지를 적어 보겠읍니다.
1. 할머님만 청주 집에 남아 계시고 나머지는 다 청주와 조치원 사이에 있는 산골 마을인 연정리로 피난. 연정리는 청주에선 30리, 조치원에선 20리.
2. 매주 토요일이면 할머님이 가꾸신 푸성귀를 가지고 연정리로 오시기 때문에 둘째 형과 나는 거의 청주 까지 마중을 나가 받아 옵니다. 청주 부근 야산 언덕위에서 푸성귀를 받는 순간 '호주기'가 무심천 인도교를 사정 없이 폭격합니다. 꼭 언덕 위에 엎드려있는 우리를 치는것 같은 느낌. 할머님은 기도합니다. "제발 우리 손자들을 살려주십시요. 우리 손자들 아무 죄도 없읍니다."
3. 푸성귀를 받으러 가던중 대변 문제로 형에게 콩잎을 따오라고 부탁. 콩잎이 아닌 옷나무 잎을 가져와 그것으로 밑을 닦은 후..... 찬바람이 불어올 때 까지 무척 고생했읍니다. 양약 대신 닭피를 바르기도 했읍니다.
4. 거의 매일 마을 뒷동산에 올라 한 조인 호주기 4대 조치원 내판 사이에 놓인 철로 22강다리와 다른 목표를 폭격해 묵사발 만들어 놓았던 일.
5. 청주무심천교를 폭격하던 중 마침 지나가던 소구루마를 명중해 소와 구루마, 사람이 공중분해 되던 일.
6. 1.4후퇴 (껌둥이 피난 이라고도 함. 껌둥이 들이 젊고 어린 여자를 보면 사정 없이 달려 들었음) ㅡ 할아버님, 누나, 저 셋이 걸어서 청주에서 충남 서천군 마산면 마명리 까지 피난. 논산 여인숙에서 하루밤을 잔 후 누나 티셔쓰 적은 봉창엔 이(Lice)가 가득하게 있는것을 알았읍니다.
7. 미나리 김치 먹은 후 병에 걸려 3개월 이상 고생하던 일.
8. 9.28 수복 후 실종된 큰형님(21세). 납치 되었거나 아니면 무심천 다리 밑에서 총살 되었다는 소문에 아버님과 같이 무심천 다리로 직행. 아버님 혼자서 산더미 처럼 쌓인 시체를 하나 하나 막대기로 재쳐 가며 점검하는것을 볼때의 내마음.
9. 이북으로 강제 압송중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에서 휴식하는 동안 벼가 자란 논바닥에 엎어져 계속 남쪽으로 기어서 탈출에 성공한 큰형님.
10. 청주농업고등학교 부근에 위치한 미군이 관리하는 자수하는 곳에 들려 영어로 자수를 하니 부대장인 한 미군 중령이 큰형을 꼭 붙들고 1주만 같이 통역으로 일하다 자기와 같이 가자고 해 Jeep에 많은 미군 물품을 가지고 집에 도착해 굶주렸던 동내 사람들과 나눠 먹었던 일. 그 후 큰형은 미군 중령과 부대로 가 통역일을 계속하고 마침내 중령의 추천으로 판문점 포로교환 수석통역관이 되어 활동하던 모습이 여러 신문에 기재되었던 일.

이와같은 비참한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할 뿐입니다.

 

 

세계적 기업 화이저에서 은퇴하시고 뉴저지에 사시는 일가 숙부님이신 William Lee 선생님께서 몇달전 부부동반 한국 나드리중에 전주 한옥촌에서 찍으신 사진인데 설명이 너무 재미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타고난 사주팔자는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에 따라 좋게도 바뀔수있지요. 한국민을 고통과 고난 속으로 몰아넣지 않고 좋은 사주팔자로 고처줄 지도자는 과연 누구일까 궁금합니다.

 

[사주팔자 고쳐주는 남자를 찾고있는 두 여자]

 

가능한 일일까요?
지난 10월 한국 방문 시 전주 한옥마을에 갔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거의 전부가 한복으로 바꿔 입은 후 거리를 누비며 활보하는 모습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우연히 목격한 한복을 입고 Tent 안 한 남자 앞에 앉은 두 여인. Tent 안 점쟁이(무당) 앞에 앉아 무언 가를 심각하게 듣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찾고있는 것은 그들의 사주팔자를 고쳐주는 남자입니다. 가능한 일이 되어 사주팔자 잘 고쳐서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내가 죽었다니...]

아래 사진은 어제 저녁 제 막내가 찍은 사진입니다.
머리는 희지만 건강상태는 아직도 양호합니다.
너무도 억울하고 분해서 페친님들/일가님들께 아래 사실을 알립니다.

얼마전 1967년에 만났던 고교 동기 JS가 전화를 했습니다. 얘는 대전에서 유명했고 제일 컸던 XX교회 목사님의 아들입니다. 현재 Tennessee 주에 살며 제가 이곳에 오기 전 저를 자기 누나 집에 불러 송별회를 해줬습니다.
JS의 첫 마디: "너 원복이 마져?" 제 대답: "반갑다. 얼마 만이냐? 별일 없구?"
JS: "야~ 너 살아 있구나. 그러면 그렇지..."
웬말이냐고 물었더니 걔의 말: "너 미국에서 죽었다고 고교 동문들 그리고 대학교 동문들 사이에 소문났어. 네 Wife가 생활이 궁핍해 아들과 함께 한국에 나와 무슨 물건좀 사달라고 애걸하며 다녔다면서?"
기막힐 일입니다. 멀쩡한 사람을 산송장 만든 인간. 멀쩡한 제 아내를 거지로 만든 인간이 대체 누구냐고 물었더니 거침없이 말해줬습니다. 그 인간의 이름은 K 성을 가진 고교 동기, 대학교 동기, ROTC 1기 동기, 한 때 대전 용두동에서 같이 살았던 이웃 친구입니다.
이곳에 쓰기조차 곤란하지만 사실을 사실대로 알리기 위해 사실대로 적습니다.
서강대학교를 졸업한 K씨 장남을 위해 제가 나온 이곳 경영대학원 가 입학허가서도 얻어 보냈지만(유학시험과 TOFL에 합격하면 Matriculated Admission 허가서가 나옵나다) 삼성에 취직이되어 이곳 유학을 포기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 얼마 후 K씨가 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마 제 전화번호는 JS로부터 얻은 것 같습니다. 제 첫 말: "니가 나 미국에서 죽었고 생활이 어려워 내 아내가 아들과 함께 한국에 나와 물품 사달라고 구걸했다는 말 퍼쳤다며?"
그 놈 대답: "응. 그렇게 됐어..."
제 말: "야~ 인간도 아닌 너같은 놈하고 말하기도 싫다." 하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제 추측이고 또 다른 몇몇 친구들의 추측이지만 왜 K가 이런 망언을 퍼뜨리게 되었나 거의 정답을 얻었습니다.
2013년에 ROTC 50주년 창설 기념을 위해 1기생 들의 발자취와 가족 현황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자가 발간되었습니다. 본인은 물론 아내의 내력, 자녀들 학력, 직업, 나이, 성별 등을 기록한 페이지 수가 많은 책자입니다(125불).
자랑이 아니옵고 제 두 아들은 자기들이 갈 길을 잘 택해 잘 나가고 있습니다. K씨 아들 다니는 삼성정도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분명히 이 책자를 본 후 K씨 마음이 나쁜 방향으로 급변했다고 믿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한 가지 더 K에 대해 쓸 말은 대학교시절에 한 고교 동기와 사이가 좋지 못해 보문산에서 둘이 만나 생사의 결투를 벌린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뒤쫓아가 그 싸움은 무승부로 끝난 일이 있습니다.
명년에 귀국해 사실을 밝힐 계획입니다. 이곳에 처음 알리는 사실입니다.
이런 인간을 수십년간 알고 지냈다는 것을 불행하게 생각합니다. 죄송합니다.

 

 

 

 

 

 

[옛날의 추억이 또 그리워져... 당숙모님의 양철집에서 있었던 '메주 싸움'을 회상합니다]

옛 당숙모님 집 사진은 2012년에 연봉리에 살고있는 제 6촌 동생이 촬영했습니다. 그때는 아무도 살고있지 않았지만 2013년도에 그 집 부근에 다세대주택이 건립될 계획이라고 들었습니다.

때 : 64년 전 겨울(1/1952) 6촌 형님 결혼식이 있었던 날.
장소 : 서천군 한산면 연봉리.
집 : 당숙모님이 사시던 양철집. 지금은 빈집.
일어났던 일 1 : 뒷동산에서 있었던 씨름 시합에서 부여에서 온 청년 아저씨가 일가 청년 10여명을 단숨에 하나씩 물리치다.
일어났던 일 2 : 이날 밤 이들 모두가 양철집에서 자기로 배정되었다.
일어났던 일 3 : 시합에서 진 10여명이 부여에서 온 승자를 메주로 집중 공격을 감행했다.
일어났던 일 4: 이 사건을 안 제 조부님이 패자 10여명을 소환해 무릎을 꿇리고 벌을 주었다.
일어났던 일 5 : 부여에서 온 그 승자는 사라졌다.
20여명이 수색작전을 벌렸으나 허탕.
그 이튿날 알게된 사실 : 그렇게 추운 겨울날밤 연봉리를 떠나 거의 구보로 40리 떨어진 서천에 가서 버스로 부여에 안착.
결과 : 패자 10여명은 같은날 아침 연봉리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음.
즐거웠어야 할 결혼식은 억망진창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은 거의 다 떠나버렸음.

이런 일이 다시 없기를 바라면서 섭섭한 마음으로 연봉리를 떠났음.

 

 

[말잠자리]

늙은이는 옛날에 있었던 일이 그리워 지는가 봅니다. 작년에 제가 64년 전에 졸업한 청주주성국민학교를 방문했습니다.
제가 5학년 때 있었던 일입니다. 왜 철부지같이 이런 일을 했나 지금도 알 수 없습니다.
화창한 한 여름날 점심시간에 한 친구와 같이 학교 바로 옆에 있는 무심천(밑 사진 참조)으로 말잠자리를 잡으러 갔습니다. 세 마리 네 마리 많이 많이 잡았습니다. 친구의 부름도 잊은채 또 잡고 또 잡고... 얼마나 점심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릅니다. 
교실로 가기위해 막 무심천 언덕을 올라오니 장재덕 담임선생님이 우리 반 애들을 이끌고 제가 서있는 쪽으로 저를 찾으러 오고 있었습니다.
머리를 굽혀 선생님께 인사를 하니 손가락 사이에 말잠자리를 낀 제 손을 꼭 잡으시며 "그래 많이 잡았니?"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부터는 제 별명이 '말잠자리'가 되었습니다.

 

 

[송사]

나이가 들수록 아주 옛날에 있었던 일이 그리워지는가 봅니다. 6.25동난 시 1.4후퇴때 할아버님, 막내누나 그리고 저 셋이 본적지인 서천군 한산면 연봉리(하계부락)로 피난을 갔습니다. 일명 '깜둥이 피난'이라고도 합니다. 깜둥이 미군들이 어린 여학생까지 겁탈하려는 위험을 알고 피난을 갔던 것입니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일입니다. 연봉리에 도착 즉시 연봉국민학교 5학년에 다녔습니다. 매학년마다 교실 하나. 우리 반에 30여명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얼마 후 졸업식이 다가왔습니다. 이 학교에들어온지도 얼마 않되는데 교감선생님이 저를 부른다고 알렸습니다. 저보고 재학생 대표로서 졸업식날 송사를 읽으라는 요청이었습니다. 그 난리 중에도 무엇때문인지 '사'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은 사실이지만 교감선생님이 바로 제 일가분 이셨습니다.
답사를 읽었던 졸업생과 매일같이 방과후에 남아 열심히 연습해 송사를 성공리에 읽고 졸업식을 무사히 끝마쳤습니다.
그 덕분에 할아버님이 새옷도 사주셨고 엿사먹을 돈도 조금 얻었습니다.
10년 전인 2006년에 연봉국민학교를 방문했는데 안타깝게도 학생수 부족으로 폐교가 되었습니다(사진참조). 그러나 지금은 말끔하게 고쳤습니다.
6개월간 다닌 학교지만 정이 듬뿍 들었습니다.
답사를 읽은 선배님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실지.
같이 학교에 다니던 친척 똘만이들은 다 잘 지내는지.
아마 저를 잘 보아주신 교감선생님은 돌아가셨는지.
저의 국민학교시절에 있었던 일이 지금은 정말 까마득히 먼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렸습니다.
개수된 건물은 학교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쓰인답니다.

 

 

 

 

[영주권 이야기]

대한민국 '복수여권'을 아시는 분 계십니까?
이 복수여권은 미국에서 영주권 소지자에게 주어졌던 여권입니다.
영주권(Green Card)은 이곳 이민국(INS)이 발간하고 복수여권은 한국 총영사관에서 발간했습니다.
영주권은 국내에서 사용하는 ID, 복수여권은 해외여행 시 필요로 했습니다. 해외여행을 위해서 미국 시민이 되는 순간까지는 이 여권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둘 다 중요했다고 봅니다.
저는 영주권을 취득하는데 좀 힘이 들었습니다. 제 Wife가 NZ 한 대학에서 공중보건학을 전공했기때문에 Wife 명의로 영주권을 신청했었습니다. 신청 후 3년 반만에 이곳에서 실제 경험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 소식이 왔습니다. 저도 계획했던 학업을 끝마친 후라 이민국에서 며칠 내로 출국하라는 편지가 왔습니다. 며칠 고민하다 한국에 나가기로 결정하고 제가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제출한 후 쓰던 살림과 자동차를 팔았습니다. 그 당시 월남 참전 해병대 장교 8 가족이 이 부근으로 이민을 왔었습니다. 그들에게 좋은 가격으로 팔았습니다. 참 후했습니다.
허나 좋은 일이 생겼습니다. 회사가 제 사표를 보류하면서 영주권 취득을 도와준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때만해도 참 좋을 때 입니다. 제 이민 변호사와 회사 인사과가 합동작전을 벌려 4개월만에 제 영주권을 따냈습니다.
제가 쓰던 살림과 자동차를 비싸게 사 간 해병대 장교들에게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사실 그대로를 얘기하니 오히려 잘 되었다고 했습니다.
미국에 온 후 9년만에 영주권과 복수여권을 취득했습니다. 그 이듬해 우리 식구 셋이 그립던 고국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게 바로 사람의 운인가 봅니다.

 

 

 

 

 

 

 

[칭찬]

 

'고래도 칭찬을 하면 춤을 춘다' 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저는 칭찬을 받을만한 남을 칭찬해 주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남한테 칭찬을 받으면 감사하면서도 송구스럽게 느끼고 상대방을 도울 길이 없나 생각합니다.
2010년 남아공에서 FIFA World Cup Soccer가 열렸던 해 식구들과 인근 한국 음식점에 가 아침을 먹어가며 한국팀과 Argentina팀과의 경기를 보았습니다.
NYC에 있는 한 한국 TV station의 Anchorwoman이 접근하더니 제가 입고있는 국가대표팀 Uniform을 극구 칭찬하며 Interview를 요청했습니다.
음식점을 나와 '한아름' 한국 식품점으로 향했습니다. 일을 본 후 막 식품점을 나오려고할 때 젊은 한 쌍을 만났습니다. 청년이 저를 딱 가로 막더니 Uniform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자기 여자친구 소개를 하는데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생겼습니다. 뉴져지주립의대(UMDNJ)를 지원했는데 현재 Waiting List로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이곳 의대 지원 및 입학 과정과 요령에 대해 좀 알고 있어 조언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의대 Admission Office Chairperson에게 전화를 해서 기필코 그 의대를 들어가야만 되겠다고 간절하게 말하라고 부탁했습니다.
명함을 주고 받고 해서 3일 후 제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의대에 합격되었다는 반가운 소식을 알려줬습니다. 지금쯤은 의대를 졸업하고 정식 의사가 되었으리라 믿습니다.
지금은 연락이 없지만 의대 재학중에는 서로 연락이 있었습니다. 당연한 조언을 해줬다고 생각하며 이 Uniform을 보내준 아들에게도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2 번이나 사라졌던 단골 이발사 S씨)

 

미국에서 고르기가 어렵고 힘든 것들 중 하나가 마음에 드는 이발사를 찾는 일입니다.
오래 전에 이곳에 처음 왔을 때도 그랬지만 6년 전까지만해도 애를 먹었습니다.
미국 이발사는 언제나 이발을 완료하기까지 10 분 이상 걸리지 않습니다. 다 깎은 후 OK? 하면 끝. 불만스럽지만 그냥 집으로 옵니다.
제가 너무 촌놈같이 보여서인지 아내가 언제나 신문지를 밭이고 다시 손질을 해줍니다.
그래서 차로 50 분 이상 걸리는 한인이 많이 사는 곳인 Fort Lee까지 가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 이발소를 찾았습니다. 다행히 M이발소에서 일하시는 S씨를 만나 그 분의 훌륭한 솜씨에 감탄했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깎던 같은 스타일로 깎아주셨습니다. 제 얼굴 모양이 좀 길은 땅콩형이라 그 것에 맞춰 깎으셨습니다. 
그 분을 만난 이후 근 6년 간 걱정이 없었는데 또 큰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분이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이 분 대신 다른 한국 이발사가 해준 이발은 미국 이발사와 비슷했습니다.
S씨의 거처를 수소문했으나 허탕이었습니다.
그 후 오랫동안 이발하는 기일을 늘리기위해 Crew Cut을 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날 인근에 사는 한 한인 친구를 만났는데 조금 전 S씨가 자기 이발을 해줬다고 말했습니다.
미국인이 경영하는 P이발소로 오셨답니다. 너무도 즐거운 소식이었습니다. 그 후 6~7년 간은 아무 일이 없었습니다.
지난 10월 초 제가 한국 가기 즉 전에 그 분이 이발을 해주셨습니다. 얼마 전 이발을 하기위해 전화를 하니 40일 전에 몸이 불편해 집에 머물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그 분과 그만이구나 생각하고 Crew Cut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또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어제 S씨가 몸이 좋아지셔 다시 나오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아침 재빨리 그 분을 찾아가 이발을 했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셔 오래오래 제 단골 이발사가 되어주시길 바랍니다.

 

 

 

(미국에 와 처음 맛본 칠면조)
이번 11월 24일은 미국 명절인 추수감사절입니다. 오래 전 학생시절을 생각해서 인근 대학에 다니던 한국 유학생 외톨 3명을 초대했었습니다. 불고기와 김치를 기대했던 그들이 칠면조 굽는 냄새를 맡고는 크게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칠면조 포장에 붙어있는 요리방법을 떼어 옆에 놓고 한줄 한줄 읽어가며 4~5시간 동안 굽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 피곤해 보였고 그 맛이 어떨지 걱정하는 모습 같았습니다.
드디어 아내가 오븐에서 다 익은 칠면조를 식탁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3 외톨은 모두 말이 없었습니다. 그냥 모두 칠면조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Mr. Kim이 맨 처음 접시를 받아 저쪽 의자로 갔습니다. 우리 부부의 온 신경은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가 용감하게 칠면조를 떼어 입에 넣더니만 맛이 좋다는 표정과 함께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른 2 외톨도 맛이 좋다면서 칠면조를 다른 채소와 함께 부지런히 먹었습니다. 우리 둘은 먹지 않았어도 배가 부른 듯 했습니다. 이제 살았구나 하고 안심을 했습니다. 상당히 큰 칠면조는 뼈만 남고 살은 한 점도 없이 다 없어졌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외톨들에게 물었습니다.
"불고기 보다 맛이 있었남?" 그들 왈: "넘 맛있었어유~"
그 다음부터 그들은 제 아내를 '칠면조 아줌마'라고 불렀습니다.
Happy Thanksgiving!!!

 

 

 

 

 

 

 

 

 

 

 

 

 

 

 

 

 

 

 

 

 

 

 

 

 

 

 

[제 아내 이야기]

아래 Dr. Samuel Lee(한국 이름: 이상원 박사)의 글을 읽고 선뜻 제 마음에 떠오르는 일이 생각나 사실 그대로를 적겠습니다.

1969년 보건사회부에서 근무 시 WHO에서 장학금을 받고 뉴질랜드 빅토리아대학교에서 공중보건학(Public Health Administration) 석사과정을 마치기 위해 홍콩 경유 뉴질렌드로 떠날 때 일어났던 일입니다. 그 당시에는 홍콩이 영국 관리 하에 있어서 여행객 안전에 대해 문제가 있었으며 납북사건도 자주 일어날 때입니다. 떠나기 전 납북되는 일이 없도록 철저한 안전과 방어에 대해 특별교육을 받았답니다. 1968년에도 보건사회부 다른 과에서 3명의 직원이 일본 조련계 공작원들에 의해 홍콩에서 납치되어 일본 경유 북한으로 납치되었던 사실을 강조하며 납북에 대한 철저한 안전교육을 이수한 것으로 압니다.
홍콩에 도착 후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 한 남성이 마이크를 통해 정중하게 하던 말 : "한국 보건사회부에서 근무하시는 고XX씨 Gate Number XX로 빨리 와주시기 바랍니다.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아내 옆에 앉았던 한 남성이 자리를 재빨리 옮기더랍니다. 그 사람에게 자기 소개를 했던 관계로. 아내는 틀림없는 북한 공작원의 짓이란 것을 직감하고 3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비행장 내 우체국으로 재빨리 자리를 옮긴 후 호주 주재 한국대사관(그 당시엔 호주에 있는 한국대사관이 뉴질랜드 영사 업무도 맡았었다고 함)으로 만일을 위해 일어났었던 일과 비행기 도착시간을 FAX 했다고 합니다. 우체국 부근에 앉아 다른 동양계통 손님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다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무사히 탑승하고 목적지에 도착하니 다른 부처에서 일찍 온 유학생 3이 마중나와 이젠 살았구나 하고 안심의 숨을 쉬었다고 합니다.
북한공작원놈들은 강제 납북 후 언제나 자발적으로 귀순했다고 주장함으로 납북된 가족은 항시 어렵고 애매한 처지에 빠집니다. 지금도 가끔 말하길 만일 그 때 내가 납북되었다면 아마 김정일 한테도 끌려갔을 지 모른다고... 자기는 그런대로 되었을지 몰라도 한국 자기 가족은 파탄에 빠지게 되었으리라고... 그 말 듣고 제가 한 말. "난 니가 아닌 딴 여자하고 살텐데..."

우리 모두 조심하고 또 조심해서 다시는 Roy Chung이 당한 처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만 되겠습니다.

노파심에서 제 아내가 오래 전에 당했던 일을 적어 보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67년 10월 뉴저지에 있는 Fairleigh Dickinson University에 유학하여 학부와 MBA를 마치고 세계적 대기업 Pfizer에서 공인회계사로 근무하다 은퇴하신 한산이씨 일가 이원복 (William Lee) 숙부님이야기 2탄은 두 효자 아드님 의사 혁원이와 투자전문가 탁원이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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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드님의 효성스런 이야기는 이원복 (William Lee) 숙부님의 페이스북 게시글과 댓글 중에서 발췌한 것들로 되도록 원문을 살려서 생생하게 소개합니다. 1편을 보시고 난뒤 2편을 보시면 더욱 내용이 흥미진진 해질겁니다. (빌췌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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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아가라 폭포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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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Lee: 나이아가라 폭포는 저도 2 애들이 어렸을 때 자주 갔었습니다. 한 번은 강 건너 Canada 쪽 호텔에서 묵었는데 미국과 달리 호텔 화장실에서 벌레를 발견하고 미국 쪽으로 건너왔던 생각이 납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나이아가라 폭포까진 자동차로 6~7시간 정도 걸립니다. 토론토, Montreal 에도 갔었지요. 어딘지 모르게 미국과는 여러가지 면에서 뒤떨어짐을 발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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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아드님과 만든 많은 여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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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땐 제 초봉이 좀 박봉이어서 애들과 함께 뱅기 타고 먼곳은 못갔지만 자동차로 갈 수 있는 이름난 곳은 거의 다 갔었습니다. 그래 제 막내는 우리를 국내는 물논 세계 여러 나라를 구경시켜 줍니다. 한 번은 왜 우리를 그렇게 자주 여러곳을 구경시켜 주냐고 물었더니 저희가 즈그들 어렸을 때 우리가 많은 곳을 데리고 다녀 그 은혜를 갚는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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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곤 개기일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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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애들이 어릴 때 가능한 한 여러 곳을 자주 같이 다니시길 바랍니다. 근래 있었던 일로 막내는 저희들을 Oregon State를 구경시켜 줬습니다. 지난 해 8/20에 있었던 Great American Eslipse가 오레곤 주에서 시작되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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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에이 방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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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Lee: 저와 제 아내는 딱 한 번 LA에 갔습니다. 그 것도 딱 하루밤 자고. 3년 전 막내가 Montana State에서 우리를 만나 서부를 관광케 해준다기에 LA에서 시작하는 Group Tour로 Montana까지 온 후 저와 아내는 막내와 합류해 다른 곳을 방문했었습니다. LA에서 하루 저녁 자는 날 그곳에 사는 많은 제 아내 대학 동기들과 만나 재미있는 시간 가졌습니다. 우선 AAA local office에 들리셔 Tour Book(California), Maps 등을 얻으시고 AAA Tour Specialist와 간단한 면담도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미리 전화로 약속을 하시기 바랍니다. 엇그제 제 큰애한테 얻은 정보인데 Anaheim Holiday Inn이 하루 쟈녁에 $103 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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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루이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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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Louis 참 흥미있는 곳이죠. 막내가 바로 Washington University in St. Louis 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습니다. 자랑이 아니옵고 얘는 좀 애어른입니다. 제 형 혁원이가 Princeton 때 우리가 등록금때문에 애먹다는 것을 알고 제 스스로 딱 한 대학 만 지원했습니다. 영어 SAT 점수가 워낙 높아 대학교에서 얘에게 기숙사비를 제외한 전면 장학금을 면제해 줘 4년 간 근 공짜로 대학을 졸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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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학년 때 선택과목으로 Business Subject를 택했다고 합니다. 그래 왜 너 혼자서 오직 한 대학만을 지원했었느냐고 물으니 그의 대답은 제 Initial 'STL(Steven Tugwon Lee)'은 STL(St. Louis)와 같아 지원했다고 합니다. 졸업 후 Merrill Lynch HK Office 에서 Trader로 근무하다 일시 중단하고 Cornell Johnson School에서 MBA(Finance)를 얻은 후 다른 미국 투자회사에서 Trader(Hedge-Fund)/Investment Strategist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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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 큰아들과 큰며느리도 Barnes Jewish Hospital, Washington Univ. in St. Louis Medical School에서 4년 간 Fellowship을 이수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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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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