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2/11 - 목숨과 맞바꾼 국화화분 하나]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1. 12. 0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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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8폭병풍 2/11 작품

 

지운 김철수 선생의 8폭 병풍 4가지 버전 내용을 달리하는 11폭으로 남은 그분의 인생이다. 그 내용을 달리하는 11가지 내용 8폭병풍 중 두번째 작품 [목숨과 맞바꾼 국화화분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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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居何事多送迎 (별거하사다송영)

迎菊當夕又迎月 (송국당석우영월)

月白花白我心白 (월백화백아심백)

白莫相逆將奈別 (백막상역장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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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산당 2차 후반기와 3차 당비서 지운 김철수는 1926년 코민테른에 파견되어 스탈린을 독대하여 조선공산당을 승인받고 공산혁명 군자금을 받아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단체에 나누어준다. 그 군자금을 노리는 임시정부 백범 김구의 살해 위협속에 백주 대낮에 김립 등 조직원을 잃고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다 1930년 일제에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생활을 시작한다. 독립군의 변론을 자처한 김병로 선생과 이인 선생의 항소권유를 '조선의 법이 아닌 일제의 법에 판단받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포기하고 경성감옥 감옥병동에서 수감중일때 사연을 하나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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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경성감옥 간수들에게 국화 화분 하나를 요청한다. 감히 죄수가 화분을 요구한다고 무차별 구타를 하는 등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지운 선생은 그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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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은 한 수도장으로 죄인에게 일수록 수양에 관한 것을 제공해 주는 것이 옳잖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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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경성감옥 당국은 지운 선생요구에 굴복하고 하얀 국화 화분 하나를 제공했다. 지운 선생은 국화라는 벗이 생긴 기쁨에 잠도 설쳐가며 위와 같은 한시를 지어 다음날 일광욕장 마당에 작대기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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別居何事 多送迎

迎菊當夕 又迎月

月白菊白 我心白

白莫相逆 將奈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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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은 양금섭 교수님의 해설을 인용한다.)

별거함에 웬 일로 보내고 맞을 일도 많아

국화 맞은 저녁에는 또 달을 맞누나.

달 희고 국화 흰 데 내 마음도 희네.

희어 서로 거스르지 않으니 어찌 이별하리오.

*轉句는 김삿갓 고사 중의 <月白雪白 天地白>의 paro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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右四十二歲時 在於京城監獄避病舍 病已危篤待死而已矣 時强請菊一盆卽作詩自慰之 重(?)病監金東三翁和之 <遠隔東籬如有感(意) 悄然相對也相求> 此可謂唱和之樂也哉

오른 편은 마흔 두 살 때, (그때는) 경성 감옥의 환자 격리소에서 병이 이미 위독하여 죽음을 기다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국화 한 분을 강력하게 요청하여 곧 시를 지어 스스로를 위로했다. 중병감 김동삼옹께서 이에 화답했다.

동쪽 울타리는 막혀서 멀지만 느낌은 한가지라 (도연명의 東籬採菊 암유)

초연하게 서로 대하며 또한 서로를 추구하네.

이는 시로 화답하는 즐거움이라고 이를 만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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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삼(金東三)선생님의 지운 선생 시에 대한 댓구는 평소 지운 선생이 일러주신 앞 두구를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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繞床諦視默連頭 (요상체시묵연두)

*-------若不流 (------약불유) *繞床淸儀(요상청의)는 지운 선생 육필에는 없는 글인데 자료집 '지운 김철수'를 집필한 자들이 지어낸 글이다.

遠隔東籬如有感 (원격동리여유감)

悄然相對也相求 (초연상대야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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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은 신정철 선생님의 해설을 인용한다.)

마룻장을 둘렀어도 이어지는 넓은 생각

(--------------) 넘치지 않는 맑은 자세

동리는 멀다 해도 느낀 바는 같으니

그대를 바라보며 엄혹함을 구한다네

繞床과 東籬를 대조된 공간으로 읽었습니다.

('동리'를 감방을 나누는 울타리나 벽으로 해석해도 좋은 듯합니다.)

찾아보니, 도연명의 <음주>에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의고한 것 같습니다.

국화분을 지운선생이 옥리들에게 얻어낸 이후 쓴 작품이라, 소재가 국화로 서로 통하는 점도 참고할 만합니다.

이 작품은 지운 선생과 국화를 동격으로 오버랩시켜서 읽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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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과 맞바꾼 국화화분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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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일광욕장 마당에서 지운 선생과 일송 선생이 한시를 주고받는 낙이 그나마 감옥생활 속에 보람이었다고 회고했다. 물론 하얀 국화 화분 하나를 구하기 위해 지운 김철수 선생의 따님은 지운 선생의 시신을 찾아가라는 경성감옥의 연통을 받고 겨우 숨소리만 들리는 지운 선생의 몸에서 가옥한 구타의 흔적을 목격했고 지운 선생의 시신(?)은 세브란스병원에서 부활(?)하는 기적을 시연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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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금섭 교수님은 그분의 서화해설에서 蛇足을 달아 "고통의 절정에서 서로 추구하던[相求] 두 志士의 염원이 <강철로 된 무지개>로 상황을 압도하는 듯"하다고 그 느낌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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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서화는 바로 지운 선생이 경성감옥 당국에 국화 화분을 요구하여 받아내고 지은 바로 그 시이다. 참고로 그당시 신문에 보도된 지운 김철수 선생의 사연과 체포사연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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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신문화원 간 '芝雲 金綴洙'에는

繞床諦視默連頭 (요상체시묵연두)

繞床淸儀若不流 (요상청의약불유)

遠隔東籬如有感 (원격동리여유감)

悄然相對也相求 (초연상대야상구)

라고 되어 있고 양금섭 교수님이

"김동삼 선생 화답시 첫 두 줄(起承句)는 잘못 채록한 것이다. 그래서 출전 확인도 했던 것이고, 분석에서는 제외시키고 휘호에 있는 끝 두 줄만 다뤘던 것이다. 기구와 승구를 같은 두 글자로 시작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다. 故人들에 대한 결례다."라는 지적도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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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 육필을 확인한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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繞床諦視默連頭 (요상체시묵연두)

--------若不流 (------약불유)

遠隔東籬如有感 (원격동리여유감)

悄然相對也相求 (초연상대야상구)

만 있다. 2구 4자는 기억을 못하신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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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 한국정신문화원 간 '芝雲 金綴洙'에 나온 4자 繞床淸儀를 삭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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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김동삼(金東三, 1878년 6월 23일 ~ 1937년 4월 13일) 선생은 안동에서 출생하여 의성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냈다. 본관은 의성이고 아명(兒名)은 김긍식(金肯植)이며 아호는 일송(一松)이다. 훗날 한학을 공부하다가 근대 교육과 민족주의 운동으로 뜻을 돌려 1907년 유인식, 김후병 등과 함께 협동학교를 설립하여 계몽 운동을 벌였다. 협동학교는 보수적인 성격이 강한 안동 지역에서 개혁 유림 세력이 힘을 합쳐 세운 3년제 중등학교였다. 이 무렵 계몽 운동에 뛰어든 인사들 중 신민회를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한일 병합 조약 체결을 내다보고 해외 독립 운동 기지 설립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는데, 일송 선생도 양기탁 등과 함께 해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자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1910년 마침내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이 계획을 구체화하여 1911년 서간도로 망명했다. 이시영, 이동녕, 이상룡, 윤기섭 등과 함께 간도 지방에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설립하는 데 참가했다. 경학사는 자치 조직, 신흥강습소는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무장 투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간도 지역에서 군정부를 설립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고 1919년 서로군정서(독판 이상룡)로 조직을 개편하고 참모장을 맡았다. 3·1 운동의 단초 중 하나를 제공한 무오 독립 선언에 39인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1919년경, 일송 선생은 상하이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1922년에 만주 지역 독립군 단체가 통합한 대한통의부에 가담했고, 1923년에는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 및 의장으로 참가하였으며 1925년 정의부 참모장에 취임했다. 1931년 하얼빈에서 이원일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시신은 한용운이 수습하여 장례를 치렀다. 대한민국 정부는 고인의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에 옥중 유언인 다음 문구를 적은 어록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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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하느냐. 내 죽거던 시신을 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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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안동시 임하면 천전리 278번지 생가 자리에는 그의 생가 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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