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8폭병풍 11/11 작품
지운 김철수 선생의 8폭 병풍 4가지 버전 내용을 달리하는 11폭으로 남은 그분의 인생이다. 그 내용을 달리하는 11가지 내용 8폭병풍 중 11번째 작품[좌익소아병을 극복하고 거시적 차원에서 민족의 대동단결을 모색한 정치지도자]이다. 이 작품의 해설 역시 댓글로 재능기부를 해주신 양금섭 교수님의 해설을 함께 공부해 보고자 한다. 귀한 시간을 내어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해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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巖身徑晝 别風塵
惟我江山 一恨新
寇倭方驅 臨近海
相殘南北 是邦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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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윗 몸체 하룻 새에 먼지로 날려 흩어지니
오직 내 강산에 한 슬픔이 새로워라.
섬도적 방금 달려와 근해에 이르려는데
서로 죽이는 남과 북은 우리나라 사람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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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午秋 謹和楊秉益老友之憂國詩
甲子淸明節 九十二翁 遲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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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오(1978)년 가을, 삼가 양병익 늙은 벗의 우국시에 화운한 것을 갑자(1982)년
청명절에 92세 늙은이 지운이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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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병익(楊秉益, 1890~1979) 한학자 자는 윤겸(允謙), 호는 귀운龜雲). 본관은 남원南原), 성암(星岩) 원영(瑗永)의 자 순창군 동계면 귀미(淳昌郡 東溪面 龜尾)에서 태어남. 어려서는 그의 부친 밑에서 수학하다가 자라서는 심주 양석모(心洲 楊錫謨)의 문하에서 배웠다. 그는 학문은 실천이 없으면 배우지 않음만 못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하게 학문을 실천에 옮겼다. 나라가 망한 뒤에는 일본의 어떠한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오로지 절의를 숭상하였다. 조국 광복 후에는 여러 사람이 추대하였으나 사회의 혼란을 보고 은거생활을 하고 시문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유고인 귀운유고(龜雲遺稿)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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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소아병을 극복하고 거시적 차원에서 민족의 대동단결을 모색한 정치지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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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10월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은 전 세계 지성인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희망의 징표로 생각했다. 더구나 러시아 한인사회당으로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에 참여하여 사회주의 이론을 제공한 레닌이 아끼는 조선인 혁명동지들이 있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의 지성인들도 같은 생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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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1916년 와세다 대학 정치 실과를 마치고 귀국하여 항일 독립활동을 모색했다. 그 결과물로 1920년 3월 15일 장덕수, 최팔봉, 이봉수, 주종건, 최혁 등 15명과 함께 '사회혁명당'을 창당하고 12월에는 일본에 남은 김사국, 김사민, 박상훈 등 조선 유학생들이 재일본 사회혁명당을 결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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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봄, 이 소식을 접한 상해임시정부 이동휘의 측근 김립은 지운 선생을 초청했다. 이에 지운 선생은 이봉수, 주종건, 김종철, 도용호, 엄주천, 김달호, 송무영 등과 함께 지주 김금동의 후원으로 상해로 가서 상해의 사회주의 인사들과 함께 연대하여 사회주의 독립국 건설을 위한 사회주의 정당인 고려공산당을 창당했고 이동휘를 당수로 추대했다. 그리고 조선의 사회혁명당은 고려공산당의 조선 지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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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김립과 함께 재무 당당 중앙위원을 맡아 볼셰비키에서 지원한 공산혁명 자금을 담당했다. 자금은 볼셰비키 혁명에 참여했던 러시아 한인사회당(박진순)을 통해 지급되었다. 그 자금은 사회주의 성향을 떠나 임시정부를 포함하여 전 세계 항일 독립운동을 하는 한인 단체와 1921년 창당한 중국공산당에 골고루 지급했다. 최팔봉이 조선에서 발간한 '신생활'도 그 자금으로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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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혁명당이 상해에서 실제 활동을 시작했다는 이유로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동양 최초로 조선에서 창당한 사회주의 정당인 사회혁명당 앞에 상해파를 붙인다. 임시정부의 김구가 볼셰비키 지원자금을 탈취하고자 벌인 '사기 공산당자금 사건'으로 김립을 암살하자 지운 선생은 홀로 자금총책의 역활을 수행하여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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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독단적인 임시정부를 개조하기 위해 1921년부터 1923년까지 개최했던 '국민대표회의'와 그 참석자들의 제반 경비로도 볼셰비키 자금이 사용됐다.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조파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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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지운 선생은 ML 파 등이 패권 쟁탈을 감행하여 붕괴 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다시 조선으로 귀국했다. 지운 선생이 귀국하자 김제 금구출신 일본 경찰 최탁(崔鐸, 1892~?)이라는 자조차도 볼셰비키 자금을 갈취하려고 자신의 권력을 이용했다. 최탁은 지운 선생을 어르고 달래며 1년간 부안 가택에 지운 선생을 연금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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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이 해제 된 후 경성으로 상경하여 파쟁으로 얼룩진 조선공산당의 조직부장으로 일본에서 사회혁명당 창당에 기여한 김사국의 죽음을 맞아, 김사국의 장례를 사회장을 밀어붙여 각 파간의 알력을 해소하고 파당으로 생긴 부정적인 이목을 해소했다. 그 후 6.10만세 사건으로 수배 중에 다소 정돈된 조선공산당 2차 하반기와 3차 전반기의 책임 비서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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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5월, 지운 선생은 직접 러시아로 가서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의 자격으로 코민테른에 출두하여 스탈린과 독대했다. ML 파 등이 훼방 놓고 또 김구(임정)가 코민테른에 '사기 공산당자금 사건'으로 무고하여 명예가 실추된 조선공산당의 사정을 직접 통역 없이 영어로 설명하여 '조선공산당'을 조선의 유일한 형제당으로 추인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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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하여 스탈린과 독대하여 조선공산당 단독으로 공산혁명 자금으로 백만 루브르에 해당하는 금괴를 지운 선생이 직접 수령했다. 운반상의 문제로 60만 루브르는 러시아 은행에 보관하고 40만 루브르는 현금화시켜 1927년 이후 조선의 독립단체에 독립자금으로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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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1927년 코민테른에서 스탈린을 독대하여 조선공산당을 추인받고 군자금을 받을 당시, 세계정세도 한 달 가까이 코민테른의 국제정세 전문가들로부터 설명을 들었다고 한다. 일본과 미국이 포섭하여 간첩으로 활용되는 인물들의 명단과 면면을 알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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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24년 레닌 사후, 입지가 약화된 박진순 선생은 모스코바대학을 마치고 다시 코민테른의 집행위원으로 있었는데 스탈린의 독주와 스탈린의 고려인에 대한 인식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고 했다. 자유시 사변처럼 고려인들은 종파를 일삼고 일제와 미제의 앞잡이 하는 자들이 많다는게 스탈린이 가진 고려인에 대한 인식이었다고 한다. 결국 스탈린은 1930년대 수십만의 고려인을 혁명화시킨다는 미명아래 강제이주를 강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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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쯤 지나고 나자, 충격에서 벗어난 지운 선생은 인간의 사사로운 욕심으로 인하여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이길 수 없다는 생각을 했고 결국 미국의 자본주의가 세계를 제패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바로 그 1927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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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지운 선생이 수령한 자금 중에는 김구가 이승만이 횡령했다며 이승만 사살 명령을 내린걸 풀게 하기 위해 횡령했다는 금액을 대납하는 데도 사용됐다. 그 이유로는 국제정세상 미국통 조선인이 아쉬운 상황에 이런저런 사소한 이유로 미국통 조선인을 살해 하려는 게 너무 안타까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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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지운 선생은 군자금을 일반인에게 모금한다는 게 너무 소액일 뿐 아니라 설사 모금되어도 오가는 경비도 나오지 않고 회계상에도 가려야 할 시시비비가 너무 많아 오히려 무고한 사람들만 다쳤다며 모금은 무모한 짓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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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L 파 등 사회주의 각 파벌은 그 자금을 갈취하고자 또다시 조선공산당을 패권 쟁탈의 장으로 만들었다. 김구 임시정부는 아예 그 자금을 갈취하고자 지운 선생에 대한 사살 명령을 내리고 실제로 대낮에 길거리에서 지운 선생과 함께 가는 동료들을 사살하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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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분란으로 인해 1928년 태재로 조선공산당은 해체되고 만다. 러시아 코민태른은 상해임시정부를 불법단체로 규정한다. 그해 12월 중국 길림 돈화현에서 '조선공산당 재건추진위원회'가 결성된다. 지운 선생은 위원장에 추대되어 조선공산당의 재건이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지운 선생은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귀국하여 결국 1930년 2월 경남 양산에서 피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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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형을 언도받고 변호사인 지인 허헌과 김병로가 항소하자 했지만, 일본법으로 판단 받기를 원치 않는다고 거부하고 1938년 8년 8개월 복역 후 병구완으로 출소하여 온양 온천과 금강산 등에서 요양한 후 1940년 서대문형무소에 재수감되어 1945년 해방되어 공주감옥에서 출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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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장안의 사회주의자들은 지운 선생 주변으로 모였다.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를 두고 장안파라고 한다. 아무튼 익히 박헌영과 미국과의 관계도 잘 알고 있던 터라 박헌영의 독주를 용인하고 대신 (1) 공산당을 서구처럼 '공개당'으로 하고 (2) 민족주의자들과 통일전선을 통해 통일국가를 달성해 달라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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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은 그 요구를 수용하여 '박헌영의 8월 테제'에도 선언했다. 하지만 홍회식 집에서 있었던 열성자대회를 기점으로 박헌영은 권력욕을 보여 지운 선생을 한참 후배인 신익희의 부하인 체신 차장으로 홀대했고 박헌영을 만나는 것조차 지운 선생에게 모멸감을 주는 박헌영의 수하 이현상을 거쳐야만 가능했지만, 내색도 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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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공개당과 통일국가의 요구만 실현되면 된다는 신념으로 미국이 내세운 이승만을 찾아가 정당 통일을 모색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 결과 1945년 10월 25일 이승만은 정당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결성하고 11월 이승만이 박헌영에게 전형위원 7인의 임명을 논의하려는데 박헌영은 이승만에게 일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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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이승만은 말이 통하는 지운 선생을 공산당 대표로 전형위원에 선임했다. 하지만 박헌영은 분노하며 지운 선생에게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여하지 말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지운 선생은 자신은 당권에 한치의 관심도 없으며 단지 좌우익의 가교 역만 하겠다고 논방하고는 참여를 강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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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독립촉성중앙협의회'는 성황리에 39명의 중앙위원을 선출했지만, 정권쟁취의 야욕으로 박헌영과 여운영 등이 반발하며 불참했다. 지운 선생은 마지막으로 이승만과 박헌영을 달래서 '이승만-박헌영 영수 회담'을 추진했다. 하지만 이승만은 억지만 부리는 공산주의자는 못 믿겠다며 거부하고 또 박헌영은 반동분자와는 대화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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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박헌영은 당권을 움켜쥐기 위해 지운 선생에게 약속한 공개당 원칙을 무시하고 비밀결사형태로 당원모집도 어렵게 하여 지운선생을 따르는 300명의 영등포 노동자과 함께 공개당원으로 입당 시켜 줄것을 요구하며 정판사를 점거하여 농성하기까지 했으나 박헌영은 비밀결사체 형태의 당운영을 강행했다. 그리고는 1946년 8월 8일 박헌영은 지운 선생을 정권처분 시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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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박헌영이 미국이 지원하고 용인한 공산주의자인데 같은 미국파인 이승만과 각을 세우는지 의아해했다. 그래서 지운 선생이 곰곰히 생각해보니 박헌영의 극단적인 행동 뒤에는 미국의 사악한 음모가 있음을 감지하고 절망감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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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 부분 언급에 대하여 설왕설래하기에 이후 이야기는 좀 더 심사숙고하고 분위기가 허락할 때 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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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조선의 지도자들이 사악한 강대국의 교란 전술에 노라나지 말기를 바랐고 단순하게 민족통일이 되기를 바랐다. 좌우익이라는 정치 노름판에 희생되기 시작한 약소국의 운명을 1927년 코민테른에서 느끼셨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내가 너무 어려 이해를 못 했지만 지금은 그 마음이 절절하게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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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학시절 결성한 곡귀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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