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鵬夢蟻生(붕몽의생)' 작품
지운 선생의 서화 속에 鵬夢蟻生(붕몽의생)도 하염없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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鵬夢蟻生(붕몽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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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붕(鵬)새처럼 크게 삶은 개미(蟻)같이 부지런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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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鵬)새는 용(龍)과 난(鸞)새와 같이 상상의 동물로 어마어마하게 큰 새다. 한번 날기 시작하면 9만리(九萬里)를 나른 후에야 날기를 멈춘다고 한다. 젊은이들에게 장래가 9만리 라고 하는 말은 붕새의 날기에 비유해서 앞길(날아갈 길)이 창창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개미는 미물이지만 부지런히 일하는 삶의 대표적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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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가훈으로 이 서화를 거실에 걸어둔 집들도 많다. 평범한 사람들이 학문이든 사업이든 무슨 일이든 원대(遠大)한 꿈을 갖고 꾸준히 노력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듯 지운 선생도 민족의 통일도 이 글을 쓰실 때 마다 '통일의 꿈은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믿으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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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도 김구도 품고 오로지 민족통일만 바라보았던 지운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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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백범 김구 선생을 과하게 숭모하거나 격하할 이유가 없는 사람이다. 지운 선생과 백범 김구 선생의 관계를 냉철하고 담담하게 바라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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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백범 김구 선생은 임시정부의 열악한 재정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고려공산당이 코민테른에서 지급받는 공산혁명 군자금을 갈취하려 했나 보다. 그래도 도덕적 양심은 있으셔서 갈취 명분을 만드셨나 보다. 마치 자금을 담당하는 김립(본명 김익용(金翼容)당시 가명 양춘산)이 군자금을 개인적으로 유용했다고 무고하여 "사기 공산당 자금 사건"을 일으켜서 지운 선생을 비롯한 자금담당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살해를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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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2월 8일 수요일 상하이 자베이 구역 바오퉁루에서 김립은 지운 선생, 유진희, 김하구와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백범 김구가 보낸 자객의 총격에 살해됐다. 백범도 자신의 회고록 백범일지에도 그리 기록하여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시키려 했다. 이에 임정 국무총리 이동휘는 코민테른이 공산혁명 자금으로 고려공산당에 지급한 돈을 갈취하려 무고한 사람을 죽이느냐고 항의하고 그 돈이 필요하면 아예 임정을 모스크바로 옮기고 코민테른에 승인받으라 했다. 백범은 이동휘도 임정에서 내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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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김립 선생은 백범이 무고한 덕에 독립유공자 지정도 거부됐다. 귀화 러시아 학자 박노자도 공개한 바 있는 비밀해제 된 코민테른의 "국제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 오토 빌레 쿠시넨이 1922년 5월 11일 자로 작성한 문서"에서 군자금은 상해 고려공산당에 지급되었고 결산보고 의무도 상해 고려공산당에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그리고 김구가 코민테른에 무고한 "사기 공산당 자금 사건"도 조사하여 근거 없다고 결론 내리고 무고한 단체 '상해임시정부'를 불법 단체로 지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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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김립 등 김구에 의해 살해된 동지들의 복수를 하자는 사회주의 혁명가들을 다독여 "김구 선생이 사회주의를 이해를 못 했을 뿐이지 일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는 그 애국충정은 귀한 것이다"라고 복수하지 못하게 했다. 이승만의 횡령자금도 대납하여 미국파도 감쌌고 또 군자금의 가장 많은 부분을 김원봉 등 임시정부의 항일운동 자금으로 지원하여 민족주의자 김구 조차도 품고 민족의 해방만을 바라보며 사회주의 혁명 운동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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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생전에 자신이 공산혁명 자금을 사상을 떠나 이승만이나 김구에게 지원한 것은 레닌이 1920년 6월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채택한 "민족과 식민지 문제에 대한 테제"에서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독자성을 지킨다면 식민지나 후진국의 부르주아지 민주주의나 민족주의와 동맹을 맺어 통일전선을 통한 동아시아의 혁명을 추진한다'라고 되어있어 조선의 독립자금으로 일부 전용되어도 테제의 지침을 지킨 것이라고 했다. 또 차후 조선공산당 2차 후반기와 3차 전반기 당비서로 코민테른에서 스탈린을 만났을 때도 지운 선생의 판단이 테제의 원칙을 지킨 것을 확인받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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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지운 선생은 김립(金立,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과의 인연도 설명했다. 어린 시절 김성수 일가가 지운 선생 집안의 논마지기를 자신들의 선조가 군수를 지낼 때 세작으로 농산물을 받았다며 소유권을 주장하며 뺏으려 하자 "잠시 군수만 했으면 다 너희 거냐?"며 경성에서 변호사를 모시고 왔는데 그 변호사가 바로 허헌 변호사였다. 그 덕에 절반만 빼앗기고 절반은 지켰다고 한다. 그때 사랑체에 기거하던 허헌 변호사에게 부탁하여 신식교육을 받도록 부친을 설득해 달라고 했다. 지운 선생은 허헌 변호사 덕에 머리 깎고 보통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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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함경도 명천이 고향인 허헌 선생에게 하루가 멀다고 함경도 지식인들이 찾아와 사랑방이 늘 붐비었는데 그때 이동휘 선생, 김립 선생 등 함경도 함흥의 지성인들과 교류했고 사회주의운동을 할 때도 함경도분들은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지운 선생을 인격적으로 대해주었고 특히 그 많은 함경도 분들은 한 분도 배신하거나 인간적인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목숨을 바쳐 자신을 지원해 주었다며 지운 선생이 죽어도 갑지 못할 은혜였다고 그래서 자신의 삶은 성공한 삶이었다고 늘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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