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橫槊賦詩(횡삭부시) - 李東輝橫槊賦詩(이동휘횡삭부시)]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2. 3.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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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橫槊賦詩(횡삭부시)' 작품

https://youtu.be/rAcg737TCok

삼국지(三國志)에서 ⾚壁⼤戰(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수일 전, 보름달이 휘영청 뜨고 하늘은 청명하고 양쯔강은 달빛을 받아 긴 비단을 펼쳐놓은 듯했다. 조조(曹魏, 155~220)는 흥이 일어 배 위에 큰 잔치를 준비시켰다. 문무백관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조조는 창을 가로 들고 시를 지었다. 조맹덕횡삭부시(曹孟德橫槊賦詩, 조조가 창을 비껴들고 시를 읊는다), 이 장면을 바로 '橫槊賦詩'(횡삭부시)라고 한다. '횡(橫)'은 '가로 들다'라는 동사이고, '삭(槊)'은 길이가 긴 창이며, '부(賦)'는 '시문(詩⽂)을 짓는다'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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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개가 투항하기로 되어 있고 감녕이 호응하고 있으니 이제 승리는 손안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어 보였다. 조조는 자신을 인재를 찾기 위해서라면 먹던 밥도 내뱉고 달려 나와 맞이하여 대업을 이룬 周公(주공)에 비유하면서 '단가행'(短歌⾏)을 노래했다. 통일을 눈앞에 둔 영웅의 호쾌한 모습은 千古(천고)의 명장면이다. '산은 흙과 돌을 마다치 않아 높아졌고, 바다는 강물을 마다치 않아 깊어졌네(⼭不厭⾼,海不厭深)'라며 자신의 관용과 아량을 강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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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양주 자사 유복이 노래 중에 '달 밝고 별 드무니 날이 샌 줄 알고, 까마귀가 남으로 날아가는데, 나무를 세 번 돌아도, 앉아서 쉴 가지가 없네(⽉明星稀,烏鵲南⾶.繞樹三,何枝可依)'라는 부분이 불길하다고 말했다. 조조는 흥을 깬다면서 들고 있던 삭으로 유복을 찔러 죽였다. 지운 선생은 생전에 성재(誠齋) 대자유(大自由)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이야기를 그분의 어린 시절부터 마치 자신인 양 많이 회고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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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댁은 대지주로 어려움이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런데 1900년대 초 김성수 일가가 자신들 선조가 군수 시절 세작을 받았다며 지운 선생댁의 전답의 소유권을 주장했다. 거처 간 군수가 얼마인데 소유권을 주장하는가 하고 항의했지만 막무가내였다. 1909년경 지운 선생의 부친은 한양에서 허헌(許憲, 1885~1951) 변호사를 초빙하여 사랑체에 머물게 하면서 김성수 일가와 전답 소유권에 대한 송사를 버렸다. 허헌 변호사의 노력으로 전답의 절반은 지킬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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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 변호사는 1908년 7월, 광무 변호사법에 의거한 제1회 대한제국 변호사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대한제국 최초의 변호사 11호로 등록하고 그 첫 번째로 지운 선생댁과 김성수 일가의 전답 소유권 송사를 맡아 지운 선생댁을 위해 일했다. 그때 지운 선생은 허헌 선생에게 자신의 부친에게 권하여 자신을 머리 깍고 신식교육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해서 보통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때 함경북도 명천이 고향인 허헌 선생이 머물던 사랑방은 함경도 인사들의 사교장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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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학회를 이끌며 신민회를 조직해서 항일활동을 하던 함경남도 단천이 고향인 이동휘 선생도 허헌 선생을 만나기 위해 지운 선생의 사랑방을 찾은 분 중에 한 분이다. 훗날 지운 선생이 항일결사체를 만들고 사회주의 혁명 활동을 할 때 함께 한 중요한 동지분들이 허헌 선생을 찾아왔던 함경도 분들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그분들은 한 분도 배신하거나 변절한 분들이 없었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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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에게 이동휘 선생은 사회주의 혁명의 지도자로 모시기에 충분했다. 생전에 지운 선생이 이동휘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신걸 추려보자. 이동휘 선생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하고 박진순 등 러시아 교민 2세들이 레닌과 함께한 걸 알고 그분들을 모아 엉성하지만 1918년 4월 하바롭스크에서 러시아 한인사회당을 결성하고 대표를 맡았다. 하지만 코민테른이 보기에 형제당이 되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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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동휘 선생은 1919년 인정받는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낀 동지들에 뜻에 따라 원하지는 않지만 '민족기관과 협력하여 효율적으로 제국주의와 싸우기 위해' 상해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취임한다. 서로 지도자를 하겠다고 나서는 판에 이동휘 선생은 절망하고 있었는데 1920년 서울에서 지운 선생이 '사회혁명당'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집 선생에게 지운 선생과 그 조직원들을 상해로 초청하게 한다. 그래서 1921년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고 이동휘 선생이 대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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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 선생은 러시아 한인사회당을 통해 이미 국제당에서 홀랜드 꾸시넨 당수, 체코 스메랄 당수, 헝가리 벨라준 당수들과 친분이 있어 이미 소소한 자금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형제당에 지급하는 공산혁명 자금은 러시아 유대인들이 러시아 조선 교민들을 이용해 국제당의 위성 정당화 하는 공작에 번번하게 거부당했다. 그래서 지운 선생에게 국제당의 형제당으로 인정받기 위한 조직 작업을 부탁해서 고려공산당이 동양권 최초의 코민테른의 형제당 인정을 받고 거금의 군자금을 지급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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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이 이동휘 선생을 평가한 내용은 모두 14가지다.

1. 이동휘 선생은 매사에 열과 성으로 임한다.

2. 이동휘 선생은 한문 실력은 있어도 신학문 지식은 없다.

3. 이동휘 선생은 성의가 없는 사람은 멀리한다.

4. 이동휘 선생은 열변가다.

5. 이동휘 선생은 열변 중 청중을 압도한다.

6. 이동휘 선생은 호가 성재(誠齋)인데 자칭호인 대자유(大自由)로 불리기 원한다.

7. 이동휘 선생은 비위가 틀리면 바로 총을 빼 든다.

8. 이동휘 선생은 시도 때도 없이 울기를 잘한다.

9. 이동휘 선생은 군중을 모아놓고 연설하다가 소리를 놓아 우는 수가 있다.

10. 이동휘 선생은 대하는 사람을 바로 믿게 한다.

11. 이동휘 선생은 돈을 모르고 만지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아니한다.

12. 상해에서 '국무총리 궁둥이'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동휘 선생은 바지가 해어지면 기워입어 궁둥이가 누더기투성일 정도로 검소하다.

13. 이동휘 선생은 잘 성내지 않지만 한번 성내면 그 누구도 억제하기 어렵다.

14. 이동휘 선생이 국무총리 하다가 남 생각 안 하고 지 욕심만 부리는 이야기를 하던 이승만을 테이블 위에 있는 교자로 내리친 일을 모두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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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공산당이 자금을 차지하려는 유대인계의 간계로 흑하사변(黑河事變) 등 파벌 다툼으로 사사 오분 되어 약화하자, 1925년 주종건 등 화요회가 중심이 되어 조선공산당을 만들어 코민테른에 승인 요청했는데 코민테른에서 이동휘 선생의 찬성을 받아오라 했다. 주종건이 이동휘 선생에게 찬성을 요청하자 의논도 안 하고 종파를 하냐며 주종건을 죽이겠다 했다. 지운 선생은 이동휘 선생에게 분파처럼 보여도 다들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니 주종건에게 잘 이르고 합심하여 일제에 대항토록 하겠다고 설득했다. 그래서 이동휘 선생이 국제당에 '찬성' 전보를 쳐서 조선공산당을 승인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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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선공산당 만들자마자 1926년 초 105명의 조직원이 일경에 검거되고 ML 계의 패권 다툼 때문에 조선공산당이 해체되었다. 그렇게 해서 조선공산당 1차 2차전반기는 안개 속에 휘말렸고 지운 선생이 2차후반기와 3차전반기 책임 비서로 당권을 잡고 1927년에 스탈린을 만나 특별공산혁명 자금과 조선공산당 사후승인을 받고 코민테른의 정세교육을 받으면서 돈에 매수된 일본과 미국의 조정을 받는 밀정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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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지운 선생은 돈에 매수된 조선의 혁명가들과 독립운동가들의 면면을 보면서 사리사욕에 눈먼 조선의 지식인들 때문에 공산사회는 불가능하고 그런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을 이용하는 미국이 결국 세계를 장악할 거로 생각했고 구라파식의 하나의 공개적인 사회주의 정당이 그나마 해결책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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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조선공산당의 책임 비서로서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해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다. 1930년 일경에 체포되었다. 1936년 지운 선생은 감옥 속에서 61세의 나이로 성재 대자유 이동휘 선생의 병사소식을 접했다. 안재홍은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이동휘 선생 추모제를 하려다가 일경의 제지로 무산되었다는 소식도 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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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이동휘 선생을 생각하면 李東輝橫槊賦詩가 떠오른다고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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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三國志)에서 ⾚壁⼤戰(적벽대전)이 일어나기 수일 전, 보름달이 휘영청 뜨고 하늘은 청명하고 양쯔강은 달빛을 받아 긴 비단을 펼쳐놓은 듯했다. 조조(曹魏, 155~220)는 흥이 일어 배 위에 큰 잔치를 준비시켰다. 문무백관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조조는 창을 가로 들고 시를 지었다. 조맹덕횡삭부시(曹孟德橫槊賦詩, 조조가 창을 비껴들고 시를 읊는다), 이 장면을 바로 '橫槊賦詩'(횡삭부시)라고 한다. '횡(橫)'은 '가로 들다'라는 동사이고, '삭(槊)'은 길이가 긴 창이며, '부(賦)'는 '시문(詩⽂)을 짓는다'라는 뜻이다. . 황개가 투항하기로 되어 있고 감녕이 호응하고 있으니 이제 승리는 손안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어 보였다. 조조는 자신을 인재를 찾기 위해서라면 먹던 밥도 내뱉고 달려 나와 맞이하여 대업을 이룬 周公(주공)에 비유하면서 '단가행'(短歌⾏)을 노래했다. 통일을 눈앞에 둔 영웅의 호쾌한 모습은 千古(천고)의 명장면이다. '산은 흙과 돌을 마다치 않아 높아졌고, 바다는 강물을 마다치 않아 깊어졌네(⼭不厭⾼,海不厭深)'라며 자신의 관용과 아량을 강조하기도 했다. . 이때 양주 자사 유복이 노래 중에 '달 밝고 별 드무니 날이 샌 줄 알고, 까마귀가 남으로 날아가는데, 나무를 세 번 돌아도, 앉아서 쉴 가지가 없네(⽉明星稀,烏鵲南⾶.繞樹三,何枝可依)'라는 부분이 불길하다고 말했다. 조조는 흥을 깬다면서 들고 있던 삭으로 유복을 찔러 죽였다. 
성재 대자유 이동휘(李東輝1873년6월20일함남단천-1935년1월31일) 선생
문무백관을 불러 모은 자리에서 조조는 창을 가로 들고 시를 지었다. 조맹덕횡삭부시(曹孟德橫槊賦詩, 조조가 창을 비껴들고 시를 읊는다), 이 장면을 바로 '橫槊賦詩'(횡삭부시)라고 한다.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좌로부터 읍민(揖民)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 소설가 현진건의 형)(*1) 선생, 고려공산당대표 겸 임시정부 국무총리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레닌의 혁명동지이자 외교주역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 자금담당  중앙위원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 뒷줄 좌 고려공산당 자금당당 중앙위원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년~1986년 3월 16일) 선생, 역사학자 계봉우 선생, 이증림(李增林, 1897~?) 선생

*1.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ㆍ교육자이다. 본관은 연주. 독립운동가로서의 다른 이름(아호)은 읍민(揖民)이며, 소설가 현진건(玄鎭健)의 형으로 현진건의 반일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 근대화 및 중립외교의 주역이었고 임시정부 평정관(評定官)을 지낸 고종의 최측근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현상건(玄尙健, 1875년-1926년)은 그의 재종형이다. 혼인을 통해 박종화(朴鍾和) 가문, 윤치호(尹致昊), 윤치영(尹致暎), 윤보선(尹潽善) 가문과도 겹사돈관계가 된다.
약력 - 조선 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24년 6월,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해 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사회 적응과 그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한 김규식(金奎植)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하이에서 1917년 여운형이 세웠던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개설된 조선인 학생을 위한 예비교(豫備校, 예비강습소)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 과목을 맡아 가르쳤고, 그 뒤 상하이 고등보통학교(上海高等普通學校)로 개편된 뒤에도 여운형, 김종상(金鍾商) 등과 함께 전임교사로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9월에는 상하이교민단에서는 실시한 의사원(議事員) 총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윤자영이 조직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상하이한인청년동맹)에 가입, 집행위원이 되었고 『횃불』, 『새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였다.
이때 청년동맹회의 선언 문제로 의열단(義烈團)에서 시비를 걸어와 의열단측에서 윤자영을 구타하는 등 청년동맹회와 의열단과의 마찰이 있었는데, 의열단에서 먼저 자신들의 출판물 가운데 청년동맹회를 공격하는 글을 취소하고 청년동맹회에서도 성명서를 수정 발표하였고, 이때 청년동맹회 위원이던 윤자영ㆍ현정건 두 사람도 청년동맹회를 핑계로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사사로이 쓴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일시직권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면서 이틀만에 복권되고 두 단체간의 시비도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홍진(洪鎭)ㆍ홍남규(洪南杓) 두 사람의 명의로 발표된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에 따라 11일에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창립총회를 열고, 한국유일당 조직을 촉성하는 것, 한국 민족의 독립적 역량을 집중하는 일에 노력하는 것, 등의 강령 및 명칭, 위원 기타를 결정하고 조직을 끝냈는데 이때의 집행위원으로 이동녕ㆍ조소앙 등과 함께 현정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1월에 다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하나로 집결시키려 애썼으나 1928년 봄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邊東華)ㆍ황의춘(黃義春)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崔昌朝)ㆍ이희적(李熙迪)ㆍ탁창하(卓昌河)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孫洪八)ㆍ현석건(玄奭健)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에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동아일보」 1933년 1월 1일 기사에는 1월 3일 오후 1시에 현정건의 발인이 이루어질 것이고 영결식이 가회동 177번지의 자택에서, 묘소는 동소문 밖의 미아리에 마련되었다고 적고 있다.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은 남편이 죽은 뒤 이레, 달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조금 밝은 모습을 보이는 듯 싶더니, 끝내 2월 10일에 "(남편이 없이)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 "죽은 몸이라도 형님(현정건)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남편 옆에) 같이 묻어달라"는 요지의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현정건의 영전 앞에서 음독자살하였다. 남편이 죽은지 41일만의 일이었다. 다른 자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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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증림(李增林, 1897~?, 李元,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공 중앙위원)은 함남 함흥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했다. 1920년 재상해(上海) 고려공산당의 대표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공산주의세력과 연계를 도모했다.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국내부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7월 토오꾜오(東京)에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1927년 1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春景園黨]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4월 신의주경찰서에 검거되어 1929년 12월 신의주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30년 1월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가했다. 4월 김철수(金錣洙)와 함께 검거되어 1931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전 건국동맹 함남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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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맹덕횡삭부시(曹孟德橫槊賦詩, 조조가 창을 비껴들고 시를 읊는다), 이 장면을 바로 '橫槊賦詩'(횡삭부시)라고 한다. '횡(橫)'은 '가로 들다'라는 동사이고, '삭(槊)'은 길이가 긴 창이며, '부(賦)'는 '시문(詩⽂)을 짓는다'라는 뜻이다.
임정 1920년 신년축하 기념사진 두번째줄중앙이 국무총리 이동휘 우측 1인 건너 안창호 또 1인 건너 총리비서장 김립 선생

국공합작(國共合作) 원조(元祖) 성재(誠齋) 대자유(大自由) 이동휘(李東輝, 1873 6 20~1935 1 31)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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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의 죄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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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은 고려인들이 코민테른의 혁명자금만 노리는 분파와 분열만 획책하는 혁명화 대상의 적성 민족으로 각인시키는 비극의 실마리 제공한 과정도 살펴보겠습니다. 러시아 조선인들은 레닌을 도와 1917 러시아혁명을 성공했습니다. 1918년에 이동휘 선생님은 러시아 한인사회당을 만들고 코민테른에 국제당 승인을 받기위해 1919년에 레닌의 측근으로 레닌을 도와 혁명을 성공한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님을 코민테른에 파견했습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한인사회당의 부실한 조직력과 사회주의 정강의 미숙함을 들어 코민테른 국제당 승인과 지원을 보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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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와 합작 단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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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이동휘 선생님은 조직력 강화를 목적으로 민족(民族)주의 세력인 상해임시정부와 민공합작(民共合作)을 단행했습니다. 이동휘 선생님은 1919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하며 국무총리에 취임했습니다. 조직력 강화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코민테른에서 요구하는 사회주의 정강 요건을 맞추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코민테른에서는 박진순 선생님을 통해 1916년 일본에서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을 결성했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1920년 조선에서 사회혁명당을 결성하였으니 러시아 한인사회당과 연합하여 조선의 사회혁명당의 정강으로 고려공산당을 만들면 국제당의 지위와 자금지원을 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코민테른의 국제당 조건을 충족 시켜 1921년 이동휘 선생님의 러시아 한인사회당과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조선 사회혁명당이 연합하여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고 이동휘 선생님을 당수로 추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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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합작(國共合作) 대한 이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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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과 1923 중국에서 국공합작(國共合作) 둘러싸고 코민테른 내부와 중국공산당 내에서 이견이 발생했습니다. 코민테른에서 중국공산당에 파견한 '마링(馬林)' 국민당은 부르주아 정당이지만 모든 계급이 연합한 당으로 프롤레타리아트는 국민당에 들어가 그것을 혁명의 주도 세력으로 변모시킬 있다는 주장을 하며 국공합작을 지지했습니다. 하지만 진독수(陳獨秀)’ 국민당은 부르주아 정당의 하나일 뿐이며 공산당이 가입하여 부르주아와 뒤섞이면 당의 독립성을 상실한다며 국공합작을 반대하여 서로 주장이 첨예하게 맞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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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의 민공합작은 국공합작의 전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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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6 중국공산당 3 대회에서 이동휘 선생님의 민공합작의 예를 들어 중국공산당의 국공합작을 의결하였습니다. 마링(馬林)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지도자 이동휘 선생님이 민족주의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조직력이 강화되었음을 중국공산당 3 대회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코민테른이 보낸 당대회 격려편지에서도 이동휘 선생님의 "민족주의단체인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함께 제국주의의 침략을 막아내면서도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의 혁명운동에서 주체적 요인을 형성할 "이라는 입장을 올바른 노선으로 평가했습니다. 결국 중국공산당 3 대회는 중국공산당과 국민당의 합작과 공산당원이 개인 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할 것을 결정했습니다. 1919 러시아 한인사회당 이동휘 선생님이 상해임시정부에 개인자격으로 참여하여 국무총리에 취임한 것이 중국공산당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국공합작의 전범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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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르뷰로(高麗局)의 탄생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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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1923 1월부터 6월까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코민테른 혁명자금으로 지원한 상해임시정부의 진로와 독립운동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열린 국민대표회에서 패권 다툼으로 개조파와 창조파가 대립하여 결과를 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사이 이미 1921년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으로 '상해파' '이르쿠츠크파를 곤경에 몰아넣은 코민테른의 쿠시넨 같은 유대인들은 집요하게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을 사주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 코민테른 꼬르뷰로(高麗局)를 설치하고 상해 고려공산당을 간섭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인해 1923 12월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지도자 이동휘 선생님은 꼬르뷰로를 탈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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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그뷰로(組織局)의 탄생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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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이동휘 선생님과 박진순 선생님을 지원하던 레닌이 1924 1월 사망하자, 그해 2월 코민테른 집행위원회는 조선 문제에 대한 위원회를 소집하는데 여기에서 보이찐스키와 쿠시넨의 견해 차이가 발생했습니다. 보이찐스키는 상해파를 지지하며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자신의 독자성을 유지하며 임시정부 같은 민족주의적 단체에서 활동할 수 있다는 견해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쿠시넨은 조선 공산주의자가 임시정부 같은 민족적 단체에 참가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상해파를 비난했습니다. 더군다나 코민테른의 국제당에 대한 협력방침이 스탈린에 의해 지도방침으로 바뀌어 그해 3월 꼬르뷰로를 해체하고 간섭이 더 심해진 오르그뷰로(組織局)를 신설하여 잡다한 조선 사회주의 단체의 통합에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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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그뷰로(組織局)의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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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시넨 같은 코민테른 유대인들의 사주를 받은이르쿠츠크파고려공산당은 1924 4 1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철훈(金哲勳), 박응칠(朴應七), 남만춘(南萬春), 전우(田友), 장도정(張道政), 이형근(李衡根), 이젤손 등이 책임자 회의를 개최하고 5 7고려공산당창립대표회 준비위원회를 개최하며 오르그뷰로를 창립했습니다. 그러나 오르그뷰로는 사회주의 정강도 마련하지 못했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조선 내의 사회주의 혁명가의 자질을 가진 대표들도 참석하지 못한 상태에서 설치되었다가 1년 뒤에 코민테른의 자금지원이 없는 상태에서 소멸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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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화 대상민족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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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을 장악한 스탈린은 쿠시넨 같은 유대인들의 수작을 간파하지 못 한 체 고려인들은 자유시참사를 일으켜 무장항일 자기동족을 몰살하며 코민테른의 혁명자금만 노리는 분파와 분열만 획책하는 혁명화 대상의 적성 민족으로 각인시키는 비극의 실마리가 되어 1930년대 수많은 고려인 지도자들이 처형당하고 또 숙청당하고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하여 3만을 아사시키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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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이 쓰신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 선생의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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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더러 게걸음을 한다는 핀잔을 두고, (가재?)를 우회적으로 예찬했습니다. 청산에 한 줄기 샘물일지언정 강호 만 리 넓은 세상이 (더러운) 물이 되기를 원치 않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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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步有能後步能(전보유능후보능) 앞으로도 잘 걷고 뒤로도 잘 걷네.

背石穿砂自作家(배석천사자작가) 돌을 지고 모래를 뜷어 자기집을 짓는도다.

靑山一脈寒泉裏(청산일맥한천리) 청산 속에 차디찬 한줄기 물일지언정

不願江湖萬里波(불원강호만리파) 강호만리의 물결은 되기 싫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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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발 갈 수 있다면 뒷 발도 갈 수 있고

등딱지로 모래 뚫어 스스로 집을 짓네.

푸른 산 한 자락 차거운 샘 속에서

세상의 만리풍파를 원하지 않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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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은 19966월 고려대에서 『미당 서정주시 연구 (未堂 徐廷柱 詩 硏究 )』로 박사학위를 받고 우주베키스탄 등에서 코이카 한국학 교수를 지내시다 고려대 조치원분교 교양학부 국어 교수로 은퇴하신 양금섭 교수님께서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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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을 망친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여운영과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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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의 흔적을 살펴보겠습니다.

1919 9월 전로한인공산당

1920 1월 이르쿠츠크 공산당 고려부

1920 7 '전로고려공산당 중앙총회'

1921 5월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 고문에 보리스 스미야스키, 위원장 김철훈, 군정부장 최고려, 오하묵, 비서장 이성

1921년에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대적하고자 상하이에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 지부를 설치하여, 여운형, 김만겸, 조동호 등이 위원으로 활동

1922 12월 코민테른의 주도로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함께 해체되었고, 이후 꼬르뷰로(1923.2)를 설치

1925년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 청년회 주요간부로 박헌영, 김단야, 임원근 등이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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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朴憲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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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朴憲永) 1900 5월 충남 예산에서 몰락한 양반·지주 영해(寧海)박씨 박현주(朴鉉柱)와 양모 탐진최씨(耽津崔氏)의 서자로 출생했습니다. 생모는 과부에서 재가한 이학규(李學圭)입니다. 대흥소학교 졸업 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YMCA 활동을 했습니다. 미국 유학을 꿈꾸었고 일본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밀항도 했습니다. 그러다 상해 고려공산당에서 구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1920 11월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습니다. 그 당시 중국 상해는 이동휘 선생님의 러시아 한인사회당과 지운 김철수 선생님의 조선 사회혁명당이 상해파 고려공산당을 창당하며 코민테른의 국제당으로서의 지위로 동양권의 공산혁명 지도와 자금 집행으로 상해는 상해파 고려공산당으로 인해 사회주의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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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영(朴憲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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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직업혁명가를 꿈꾸는 수많은 조선의 청년들이 상해로 모였습니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의 정보조직도 선교사 등으로 위장하여 상해로 모여 고려공산당, 중국공산당, 일본효민공산당 창당의 모습과 실체를 파악하기에 바빴습니다. 박헌영도 그중에 하나였고 또 코민테른의 구미 유학생에 합격하기 위한 준비 학교도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그 준비 학교의 학생으로는 김단야, 임원근, 주세죽, 현에리스 등이 있었고 박헌영도 그중에 한 명이었습니다. 조선인과 중국인 각각 40명 정도를 선발하는 코민테른 구미 유학생 선발에는 이미 일본 유학 경험이 있고 학식이 출중한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출신 나용균, 와세다대학 학사 출신 장덕수, 도쿄조시가쿠인(東京女子學院) 출신 김마리아, 상해동제대학 출신 이극로 등 학사학위 이상의 쟁쟁한 조선의 수재들이 지원하여 경성제일고보 출신 박헌영은 불합격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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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呂運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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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의 상해 지부장으로 있던 여운형(呂運亨)은 박헌영을 비롯한 준비학교 불합격생들에게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하부조직이므로 코민테른의 자금으로 원하는 구미 유학도 시켜주고 직업적 사회주의 혁명가도 시켜주겠다고 회유하여 떼거리로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에 가입시켰습니다. 공산당선언과 사회주의 사상을 이해해야 하는 까다로운 상해 고려공산당 가입보다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은 자격심사 없이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었지만 엄격한 코민테른의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코민테른의 승인이나 경제적 지원이 없어서 실제로 직업적 사회혁명가가 될 수 없었고 더더욱 구미 유학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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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呂運亨)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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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학술적인 심화교육 보다는 선동 선전술 위주의 교육을 하는 단기과정의 국제레닌학교나 동방노력공산대학 수료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조선에서 상해를 거쳐 여운형을 따라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에 가입한 조선의 사회주의 관심자들은 스스로 먹고살아야 하는 경제적 여건으로 인하여 와해되고 박현영은 미국 정보기관의 지원을 받아 상해에 머무르고 있던 현순 목사의 도움을 받아 다소 경제적인 곤란함을 해결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현순 목사는 미국정보기관과 박헌영을 이어주다 함께 북한에서 처형된 미군혁역장교출신 미정보요원 현앨리스의 부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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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기억한 20대의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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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에서 자금을 집행하던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코민테른의 구미 유학생에 합격하기 위한 준비학교를 다니던 20살의 박헌영을 소상하게 기억했고 현순 목사 등을 통해 미국의 간첩이 된 걸 추측했으며 1927년 코민테른의 세계정세교육 시 받은 미국과 일본의 간첩 일을 하는 조선 혁명가의 명단에서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준비 학교를 다니던 박헌영은 영특하긴 하였으나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 미국 유학을 가고자 함을 숨기지도 않아 사회주의 혁명가의 자질이 없었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또한 지원자들이 이미 조선과 일본 그리고 중국의 유수한 대학을 졸업하여 전공 심화가 이미 되어 있었고 유학을 하러 가고자 하는 나라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있어 박헌영 같은 고등보통학교 졸업 수준으로는 합격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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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독수가 육성한 196명의 불란서 유학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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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 선생이 나중에 들으니, 중국공산당의 진독수 선생은 상해 불란서 조계 인사들의 도움으로 40명분의 장학금으로 등소평, 주은래 등 사회주의 열성 청년 196명을 선발하여 불란서 한곳으로 유학을 보냈다고 합니다. 196명 전원 불란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모택동을 도와 중국공산당을 통하여 신중국을 건설하고 천하통일을 이루었습니다. 지운 김철수 선생님은 생전에 미리 알았더라면 진독수 선생에게 부탁하여 더 많은 조선의 청년들에게 서구문물을 배워올 기회를 주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함을 아쉬워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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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고려인 혁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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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파 고려공산당은 박진순 선생님과 레닌의 인연으로 인해 코민테른 국제당 지위와 자금지원으로 인해 명실상부한 동양권의 공산 지도국의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활동을 시샘한 코민테른의 유대인들과 사회주의 혁명가 자질도 갖추지 못한 여운형과 같은 조선의 얼충이 지도자들이 상식에도 어긋나게 러시아영토에 있는 코민테른의 하부조직이나 가능한 이루쿠츠크파(irkutsk) '고려공산당'을 부추겨 11국 원칙에 어긋나게 패권 쟁탈을 벌여 결국 스탈린의 미움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박진순 선생님 같은 수많은 러시아 고려인 지도자들은 사형을 당하고 20만 고려인은 혁명화 명분으로 집단이주를 당해 그 와중에 3만이 얼어 죽고 굶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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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김철수가 바라본 여운형과 박헌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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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안타까운 일은 지운 김철수 선생님이 해방 후 14년만에 출옥한 후에 여운형, 박헌영 같은 인사들을 만나보니 자신들이 저지른 일이 얼마나 참담한 죄악인 줄 눈곱만큼도 반성하지 않고 해방된 나라의 우두머리가 되겠다고 눈에 핏발을 세우며 남의 이야기는 한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은 체 자신들의 허망한 주장만 하는 모습에 그 참담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생전에 박헌영이 진짜 미국 간첩이냐는 질문에 그놈은 간첩보다 더한 놈으로 자신의 야망을 위해 온 민족도 몰살할 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잊지 않고 이런 이야기 듣고나 말지 제 목숨 보전을 위해 말을 아끼란 말씀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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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혁명가나 운동권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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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치하나 미군정시절이나 2020년대나 우익적폐 세력과 더불어 사회주의 혁명가나 운동권 출신이라는 탈을 뒤집어쓰고 오직 자신의 부귀와 영달을 향해 달리는 인사들을 보게됩니다. 한국 국민들이 그자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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