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연이관지(憐以觀之)' 작품
생전에 지운 선생은 '연이관지(憐以觀之)'의 휘호를 쓰면서 "같은 동포 민족을 불쌍히 보라"는 뜻으로 설명하곤 했다. 양금섭 교수님이 해석하셨듯, 글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연민의 정으로써 보다"가 될 것 같다. 생전에 남기신 회고록을 보면 박진순(朴鎭淳) 선생을 특별히 언급하곤 길게 사연을 남기신 게 아마도 그런 연민의 마음으로 보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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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순 선생은 1898년, 김막심 니콜라예비치가 개척한 러시아 연해주 파르티잔스크 콜라예프카 마을에서 밀양박씨 농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박진순의 선조가 16세기에 함경도로 귀양 갔고 부친이 1890년대에 연해주로 이주하여 박진순 선생을 생산했으니 박진순 선생은 러시아 교민 2세다. 1912년 한인 학교를 다니다 러시아학교를 입학해 1916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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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김응렬의 '대한독립단'에 입단했고 1917년 5월까지 혁명적 민족주의자로 살았다. 박진순 선생의 러시아학교 선생으로 볼셰비키 혁명에 참여하고 그 과정을 '공산주의자의 일기'라는 책으로 남긴 야료멘코는 자신의 책에서 '올가지역에서 제자 박진순과 함께 볼셰비키 혁명 완수를 위해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고 박진순의 볼세비키 혁명 활동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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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4월 25일 이동휘 선생의 한인사회당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이 되고 6월에는 전로 한족 중앙총회에 참여했다. 이동휘 선생이 1917년 혁명 전 러시아군에 생포되어 감옥살이하는 동안 박진순 선생은 이동휘 선생의 석방을 위해 각계 요로에 청원하고 러시아가 무너져 이동휘 선생이 풀려날 때까지 옥바라지를 하여 이동휘-박진순의 강철같은 동지애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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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한인사회에서 박진순 선생(이하 박진순)을 '시베리아 한인 3대 재사' 중 한 명이라 칭했다. 러시아어는 물론 한글과 한문도 공부하여 조선의 '동아일보'에도 자주 애국적인 기고문을 기고했고 민족성을 지키며 독립운동에 애썼다. 박진순은 늘 "반일본제국주의적 민족투쟁의 기치 아래 결집하라"고 주장했다. 1919년 7월 코민테른 국제당에 가입하기 위해 박진순, 이한영, 박애가 한인사회당 대표로 모스크바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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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중에 이한영과 박애가 병을 얻어 결국 박진순만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1919년 11월에 코민테른에 한인사회당 명부와 2차 당 대회 결과보고서인 '조선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제출하고 가입을 신청했고 이보고서는 코민테른 기관지에 바로 게재되었다. 1920년 1월 코민테른 외교위원장에게 '러시아혁명이 아시아 피압박 민족들과 국제적 제휴를 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출판사와 선전부를 설치할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지급할 것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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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코민테른 정세팀은 조선에서 지운 김철수의 '사회혁명당' 결성 소식을 박진순에게 알리고 일제와 미제의 밀정이 득실거리는 임시정부와 결합하려는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이 사회혁명당과 연대하면 자금을 지원할 것을 약속한다. 박진순은 1920년 6월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조선 문제와 동양 문제' 보고를 하고 7월에는 정식대의원 자격으로 민족식민지 문제위원회에 배속됐다. 박진순은 이동휘가 조선의 사회혁명당과 결합하겠다는 결정을 코민테른에 알렸고 8월 7일 코민테른은 박진순을 유색인종으로는 최초로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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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박진순에게 얼마를 지원받기 원하냐고 물으니 박진순이 한 십만 루브르면 족하겠다고 하자. 레닌은 그걸 가지고 무얼 하겠느냐며 200만 루브르의 금괴를 지급했다. 박진순은 코민테른의 재외 전권위원의 자격으로 상해의 이동휘에게 갔다. 그사이 코민테른 유대계 슈마추키 등이 문창범이 시작한 이르쿠츠크파를 부츠 겨 박진순의 "반일본제국주의적 민족투쟁의 기치 아래 결집하라"는 주장을 빌미로 박진순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민족주의자라고 비난하며 1920년 9월 15일 따로 원동비서부를 만들고 전권위원에 슈마추키 핵임 비서에 보이틴스키, 김만겸을 임명하며 박진순의 재외 전권위원 직위를 정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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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코민테른은 박진순에게 중앙정치보안국 약소민족부에서 일하라 권했다. 지운 선생은 박진순에게 조선해방이라는 더 큰 일을 해야 하니 거부하고 상해에 남으라 조언했고 박진순은 그 말을 따랐다. 이미 코민테른 유대계와 이르쿠츠크파는 박진순의 군자금을 차지하고자 1921년 초에 자유시에 자칭 고려공산당을 만들고 약소민족 회의를 소집하여 군소 독립운동단체들을 모았다. 사회주의와는 무관한 문창범은 무언가 잘못돌아감을 느껴 빠지고 그자리를 ML파와 화요파가 차지하고는 군소 독립운동단체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군소 독립운동단체는 "우리는 사회주의는 모른다. 그저 조국 독립운동 할 뿐이다"고 반발하고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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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ML파와 화요파가 차지한 이르쿠츠크파와 유대계는 모인 단체들이 반혁명군이라 5군단장 스먀스키에게 밀고하여 장갑부대가 밀고 나와 한인독립단체가 모인 곳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독립군 8~9백 명이 사망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불리는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참담한 소식을 접하고 1921년 4월 1일 이동휘 선생은 상해로 모인 지운 김철수 등 '사회혁명당'과 함께 고려공산당을 정식 창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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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은 홍수에게 흑하사변(黑河事變)을 조사하게 한 후 상해고려공산당을 정식 코민테른의 형제당으로 승인했다. 그리고 5군단장 스먀스키를 해임하고 이르쿠츠크파에 생포된 6백여 명의 독립군을 석방토록 하고 ML파와 화요파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해산시켰다. 코민테른의 유대계 간계에도 불구하고 상해 고려공산당의 위상을 지킬 수 있었던 데는 학교 스승 야료멘코와 빨치산 활동을 했고 또 코민테른에서 레닌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던 박진순의 공이 제일 크다. 하지만 이 자유시사변은 레닌사후 스탈린이 행한 '고려인 혁명화를 위한 20만 재러 고려인의 처참한 강제이주'의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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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고려공산당 창당 이후 박진순은 이동휘 대표와 레닌의 접견을 성사시키고 배석했다. 또 이르쿠츠크파의 잔당들이 자신들이 공산주의고 상해파는 민족주의라고 비난하며 정강심사를 요청하자 레닌은 인도 로이가 쓴 "민족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 테제까지 발표하며 상해파의 정강이 옳다고 발표하고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에 살고 있으니 볼셰비키로 복귀하고 상해파는 조선에 근거하고 일제를 피해 잠시 상해에 머무를 뿐이라며 이르쿠츠크파의 준동에 못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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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순은 유대계의 견제로 상해 복귀를 못하고 1922년 모스크바국립대학 사회학부에 입학하여 1925년에 졸업했다. 1925년 10월 천도교 계통 조선농민사일을 보았다. 1926년 6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스탈린을 도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 임무를 보았다. 1929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볼셰비키' 편집장을 지냈다. 지운 선생이 1927년 스탈린을 만나러 가서 박진순의 집을 방문해서 박진순의 러시아 부인을 만나 악수를 하고 박진순과 부인이 뽀뽀하는 모습을 기이하게 보았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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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이 1930년 경상도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하는 동안 박진순은 1936년 러시아 외국인노동자 출판사에서 '조선'의 교정 일을 보았다. 1937년 스탈린이 패권을 장악하고자 대숙청을 하면서 박진순을 테러 단체에 참여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하고 1938년 3월 19일 총살형을 집행했다. 1956년 7월 18일 소련 최고 회의 군협의회는 박진순의 복권을 결정했다. 그리고 2006년 한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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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상해파' 고려공산당 = 러시아 한인사회당 + 조선 사회혁명당: 이동휘(李東輝)⋅김립(金立)⋅박진순(朴鎭淳)⋅김철수(金錣洙)⋅장덕수(張德秀)⋅계봉우(桂奉瑀)⋅최팔용(崔八鎔)⋅이한영⋅윤현진⋅최익준⋅하상연⋅정노식(鄭魯湜)⋅김효석⋅전익지⋅윤홍균⋅현익수⋅주종건(朱鍾建)⋅이봉수(李鳳洙)⋅홍도⋅보이틴스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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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 전로한인공산당 + 고려부 + 화요파 + ML파 : 김만겸(金萬謙)⋅김철훈(金哲勳)⋅장건상(張建相)⋅최고려(崔高麗)⋅한명세(韓明世)⋅오하묵⋅이성⋅신철(辛鐵)⋅김재봉(金在鳳)⋅여운형(呂運亨, 상해지부)⋅조동호⋅박헌영(朴憲永)⋅김단야⋅임원근
a. 화요파: 김찬⋅김재봉⋅윤덕병⋅홍덕유⋅홍증식⋅조봉암⋅박헌영⋅임원근⋅김태영⋅조동호 등 약 60여 명
b. ML파: 김근(金槿)⋅안광천⋅양명⋅한위건⋅고경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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