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연이관지(憐以觀之) - 박진순(朴鎭淳, 1898~1938)과 흑하사변(黑河事變, 자유시참변)]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2. 3. 0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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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연이관지(憐以觀之)' 작품

 

생전에 지운 선생은 '연이관지(憐以觀之)'의 휘호를 쓰면서 "같은 동포 민족을 불쌍히 보라"는 뜻으로 설명하곤 했다. 양금섭 교수님이 해석하셨듯, 글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연민의 정으로써 보다"가 될 것 같다. 생전에 남기신 회고록을 보면 박진순(朴鎭淳) 선생을 특별히 언급하곤 길게 사연을 남기신 게 아마도 그런 연민의 마음으로 보셨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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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순 선생은 1898년, 김막심 니콜라예비치가 개척한 러시아 연해주 파르티잔스크 콜라예프카 마을에서 밀양박씨 농부의 아들로 출생했다. 박진순의 선조가 16세기에 함경도로 귀양 갔고 부친이 1890년대에 연해주로 이주하여 박진순 선생을 생산했으니 박진순 선생은 러시아 교민 2세다. 1912년 한인 학교를 다니다 러시아학교를 입학해 1916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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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김응렬의 '대한독립단'에 입단했고 1917년 5월까지 혁명적 민족주의자로 살았다. 박진순 선생의 러시아학교 선생으로 볼셰비키 혁명에 참여하고 그 과정을 '공산주의자의 일기'라는 책으로 남긴 야료멘코는 자신의 책에서 '올가지역에서 제자 박진순과 함께 볼셰비키 혁명 완수를 위해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고 박진순의 볼세비키 혁명 활동을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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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4월 25일 이동휘 선생의 한인사회당에 참가하여 중앙위원이 되고 6월에는 전로 한족 중앙총회에 참여했다. 이동휘 선생이 1917년 혁명 전 러시아군에 생포되어 감옥살이하는 동안 박진순 선생은 이동휘 선생의 석방을 위해 각계 요로에 청원하고 러시아가 무너져 이동휘 선생이 풀려날 때까지 옥바라지를 하여 이동휘-박진순의 강철같은 동지애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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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한인사회에서 박진순 선생(이하 박진순)을 '시베리아 한인 3대 재사' 중 한 명이라 칭했다. 러시아어는 물론 한글과 한문도 공부하여 조선의 '동아일보'에도 자주 애국적인 기고문을 기고했고 민족성을 지키며 독립운동에 애썼다. 박진순은 늘 "반일본제국주의적 민족투쟁의 기치 아래 결집하라"고 주장했다. 1919년 7월 코민테른 국제당에 가입하기 위해 박진순, 이한영, 박애가 한인사회당 대표로 모스크바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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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중에 이한영과 박애가 병을 얻어 결국 박진순만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1919년 11월에 코민테른에 한인사회당 명부와 2차 당 대회 결과보고서인 '조선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제출하고 가입을 신청했고 이보고서는 코민테른 기관지에 바로 게재되었다. 1920년 1월 코민테른 외교위원장에게 '러시아혁명이 아시아 피압박 민족들과 국제적 제휴를 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출판사와 선전부를 설치할 자금을 한인사회당에 지급할 것을 요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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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코민테른 정세팀은 조선에서 지운 김철수의 '사회혁명당' 결성 소식을 박진순에게 알리고 일제와 미제의 밀정이 득실거리는 임시정부와 결합하려는 이동휘의 한인사회당이 사회혁명당과 연대하면 자금을 지원할 것을 약속한다. 박진순은 1920년 6월 코민테른 2차 대회에서 '조선 문제와 동양 문제' 보고를 하고 7월에는 정식대의원 자격으로 민족식민지 문제위원회에 배속됐다. 박진순은 이동휘가 조선의 사회혁명당과 결합하겠다는 결정을 코민테른에 알렸고 8월 7일 코민테른은 박진순을 유색인종으로는 최초로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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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은 박진순에게 얼마를 지원받기 원하냐고 물으니 박진순이 한 십만 루브르면 족하겠다고 하자. 레닌은 그걸 가지고 무얼 하겠느냐며 200만 루브르의 금괴를 지급했다. 박진순은 코민테른의 재외 전권위원의 자격으로 상해의 이동휘에게 갔다. 그사이 코민테른 유대계 슈마추키 등이 문창범이 시작한 이르쿠츠크파를 부츠 겨 박진순의 "반일본제국주의적 민족투쟁의 기치 아래 결집하라"는 주장을 빌미로 박진순은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민족주의자라고 비난하며 1920년 9월 15일 따로 원동비서부를 만들고 전권위원에 슈마추키 핵임 비서에 보이틴스키, 김만겸을 임명하며 박진순의 재외 전권위원 직위를 정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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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코민테른은 박진순에게 중앙정치보안국 약소민족부에서 일하라 권했다. 지운 선생은 박진순에게 조선해방이라는 더 큰 일을 해야 하니 거부하고 상해에 남으라 조언했고 박진순은 그 말을 따랐다. 이미 코민테른 유대계와 이르쿠츠크파는 박진순의 군자금을 차지하고자 1921년 초에 자유시에 자칭 고려공산당을 만들고 약소민족 회의를 소집하여 군소 독립운동단체들을 모았다. 사회주의와는 무관한 문창범은 무언가 잘못돌아감을 느껴 빠지고 그자리를 ML파와 화요파가 차지하고는 군소 독립운동단체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자신들의 명령에 따르라고 강요했다. 하지만 군소 독립운동단체는 "우리는 사회주의는 모른다. 그저 조국 독립운동 할 뿐이다"고 반발하고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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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ML파와 화요파가 차지한 이르쿠츠크파와 유대계는 모인 단체들이 반혁명군이라 5군단장 스먀스키에게 밀고하여 장갑부대가 밀고 나와 한인독립단체가 모인 곳에 무차별 총격을 가해 독립군 8~9백 명이 사망하는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 불리는 자유시참변이 일어났다. 참담한 소식을 접하고 1921년 4월 1일 이동휘 선생은 상해로 모인 지운 김철수 등 '사회혁명당'과 함께 고려공산당을 정식 창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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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민테른은 홍수에게 흑하사변(黑河事變)을 조사하게 한 후 상해고려공산당을 정식 코민테른의 형제당으로 승인했다. 그리고 5군단장 스먀스키를 해임하고 이르쿠츠크파에 생포된 6백여 명의 독립군을 석방토록 하고 ML파와 화요파의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을 해산시켰다. 코민테른의 유대계 간계에도 불구하고 상해 고려공산당의 위상을 지킬 수 있었던 데는 학교 스승 야료멘코와 빨치산 활동을 했고 또 코민테른에서 레닌의 극진한 총애를 받았던 박진순의 공이 제일 크다. 하지만 이 자유시사변은 레닌사후 스탈린이 행한 '고려인 혁명화를 위한 20만 재러 고려인의 처참한 강제이주'의 빌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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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고려공산당 창당 이후 박진순은 이동휘 대표와 레닌의 접견을 성사시키고 배석했다. 또 이르쿠츠크파의 잔당들이 자신들이 공산주의고 상해파는 민족주의라고 비난하며 정강심사를 요청하자 레닌은 인도 로이가 쓴 "민족혁명을 통해 사회주의 건설" 테제까지 발표하며 상해파의 정강이 옳다고 발표하고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에 살고 있으니 볼셰비키로 복귀하고 상해파는 조선에 근거하고 일제를 피해 잠시 상해에 머무를 뿐이라며 이르쿠츠크파의 준동에 못을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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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순은 유대계의 견제로 상해 복귀를 못하고 1922년 모스크바국립대학 사회학부에 입학하여 1925년에 졸업했다. 1925년 10월 천도교 계통 조선농민사일을 보았다. 1926년 6월부터 1927년 1월까지 스탈린을 도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위원 임무를 보았다. 1929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볼셰비키' 편집장을 지냈다. 지운 선생이 1927년 스탈린을 만나러 가서 박진순의 집을 방문해서 박진순의 러시아 부인을 만나 악수를 하고 박진순과 부인이 뽀뽀하는 모습을 기이하게 보았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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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이 1930년 경상도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옥살이하는 동안 박진순은 1936년 러시아 외국인노동자 출판사에서 '조선'의 교정 일을 보았다. 1937년 스탈린이 패권을 장악하고자 대숙청을 하면서 박진순을 테러 단체에 참여한 혐의로 사형을 언도하고 1938년 3월 19일 총살형을 집행했다. 1956년 7월 18일 소련 최고 회의 군협의회는 박진순의 복권을 결정했다. 그리고 2006년 한국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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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1. '상해파' 고려공산당 = 러시아 한인사회당 + 조선 사회혁명당: 이동휘(李東輝)⋅김립(金立)⋅박진순(朴鎭淳)⋅김철수(金錣洙)⋅장덕수(張德秀)⋅계봉우(桂奉瑀)⋅최팔용(崔八鎔)⋅이한영⋅윤현진⋅최익준⋅하상연⋅정노식(鄭魯湜)⋅김효석⋅전익지⋅윤홍균⋅현익수⋅주종건(朱鍾建)⋅이봉수(李鳳洙)⋅홍도⋅보이틴스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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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 전로한인공산당 + 고려부 + 화요파 + ML파 : 김만겸(金萬謙)⋅김철훈(金哲勳)⋅장건상(張建相)⋅최고려(崔高麗)⋅한명세(韓明世)⋅오하묵⋅이성⋅신철(辛鐵)⋅김재봉(金在鳳)⋅여운형(呂運亨, 상해지부)⋅조동호⋅박헌영(朴憲永)⋅김단야⋅임원근

a. 화요파: 김찬⋅김재봉⋅윤덕병⋅홍덕유⋅홍증식⋅조봉암⋅박헌영⋅임원근⋅김태영⋅조동호 등 약 60여 명

b. ML파: 김근(金槿)⋅안광천⋅양명⋅한위건⋅고경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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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관지(憐以觀之)'의 휘호를 쓰면서 "같은 동포 민족을 불쌍히 보라"는 뜻으로 설명하곤 했다. 양금섭 교수님이 해석하셨 듯, 글자를 그대로 해석하면 "연민의 정으로써 보다"가 될 것 같다.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좌로부터 읍민(揖民)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 소설가 현진건의 형)(*1) 선생, 고려공산당대표 겸 임시정부 국무총리 성재(誠齋) 이동휘(李東輝, 1873년 6월 20일~1935년 1월 31일) 선생, 레닌의 혁명동지이자 외교주역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 자금담당  중앙위원 일세(一洗) 김립(金立, 본명 金翼容, 가명 楊春山 1880년~1922년 2월 6일) 선생, 뒷줄 좌 고려공산당 자금당당 중앙위원 지운(遲耘) 김철수(金綴洙, 1893년~1986년 3월 16일) 선생, 역사학자 계봉우 선생, 이증림(李增林, 1897~?) 선생

*1.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ㆍ교육자이다. 본관은 연주. 독립운동가로서의 다른 이름(아호)은 읍민(揖民)이며, 소설가 현진건(玄鎭健)의 형으로 현진건의 반일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 근대화 및 중립외교의 주역이었고 임시정부 평정관(評定官)을 지낸 고종의 최측근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현상건(玄尙健, 1875년-1926년)은 그의 재종형이다. 혼인을 통해 박종화(朴鍾和) 가문, 윤치호(尹致昊), 윤치영(尹致暎), 윤보선(尹潽善) 가문과도 겹사돈관계가 된다.
약력 - 조선 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24년 6월,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해 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사회 적응과 그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한 김규식(金奎植)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하이에서 1917년 여운형이 세웠던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개설된 조선인 학생을 위한 예비교(豫備校, 예비강습소)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 과목을 맡아 가르쳤고, 그 뒤 상하이 고등보통학교(上海高等普通學校)로 개편된 뒤에도 여운형, 김종상(金鍾商) 등과 함께 전임교사로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9월에는 상하이교민단에서는 실시한 의사원(議事員) 총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윤자영이 조직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상하이한인청년동맹)에 가입, 집행위원이 되었고 『횃불』, 『새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였다.
이때 청년동맹회의 선언 문제로 의열단(義烈團)에서 시비를 걸어와 의열단측에서 윤자영을 구타하는 등 청년동맹회와 의열단과의 마찰이 있었는데, 의열단에서 먼저 자신들의 출판물 가운데 청년동맹회를 공격하는 글을 취소하고 청년동맹회에서도 성명서를 수정 발표하였고, 이때 청년동맹회 위원이던 윤자영ㆍ현정건 두 사람도 청년동맹회를 핑계로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사사로이 쓴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일시직권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면서 이틀만에 복권되고 두 단체간의 시비도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홍진(洪鎭)ㆍ홍남규(洪南杓) 두 사람의 명의로 발표된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에 따라 11일에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창립총회를 열고, 한국유일당 조직을 촉성하는 것, 한국 민족의 독립적 역량을 집중하는 일에 노력하는 것, 등의 강령 및 명칭, 위원 기타를 결정하고 조직을 끝냈는데 이때의 집행위원으로 이동녕ㆍ조소앙 등과 함께 현정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1월에 다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하나로 집결시키려 애썼으나 1928년 봄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邊東華)ㆍ황의춘(黃義春)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崔昌朝)ㆍ이희적(李熙迪)ㆍ탁창하(卓昌河)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孫洪八)ㆍ현석건(玄奭健)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에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동아일보」 1933년 1월 1일 기사에는 1월 3일 오후 1시에 현정건의 발인이 이루어질 것이고 영결식이 가회동 177번지의 자택에서, 묘소는 동소문 밖의 미아리에 마련되었다고 적고 있다.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은 남편이 죽은 뒤 이레, 달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조금 밝은 모습을 보이는 듯 싶더니, 끝내 2월 10일에 "(남편이 없이)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 "죽은 몸이라도 형님(현정건)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남편 옆에) 같이 묻어달라"는 요지의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현정건의 영전 앞에서 음독자살하였다. 남편이 죽은지 41일만의 일이었다. 다른 자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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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증림(李增林, 1897~?, 李元,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공 중앙위원)은 함남 함흥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했다. 1920년 재상해(上海) 고려공산당의 대표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공산주의세력과 연계를 도모했다.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국내부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7월 토오꾜오(東京)에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1927년 1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春景園黨]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4월 신의주경찰서에 검거되어 1929년 12월 신의주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30년 1월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가했다. 4월 김철수(金錣洙)와 함께 검거되어 1931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전 건국동맹 함남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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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관지(憐以觀之)
레닌 옆에서 사진기를 바라보는 박진순 선생
연이관지(憐以觀之)
박진순 선생에 대한 지운 선생의 기록
한인사회당 모스크바대표단. 왼쪽부터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 ·박애·이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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