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71 서화보따리

[우경희(禹慶熙, 1924-2000) 선생 작품]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2. 15.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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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 방원 선생의 서화중에 소품들이 제법 있는데 삽화 같은 연하장들이 또 엄청 있다. 그중에 우경희 선생의 삽화가 눈에 띈다. 방원 선생이 창경궁 식물원, 청량리 원예연구소 분소, 경무대 온실, 한남동 식물원, 부천 소사의 식물원 등 꽃 속에서 사셨으니 그림을 그리는 친구분들이 어쩔 수 없이 많을 수밖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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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식물원 구석구석에는 스케치하는 화가분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중에 우경희 선생도 있었다. 우경희(禹慶熙, 1924-2000) 선생은 1924년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나 경기중과 동경제국미술학교를 졸업한 분이다. 개성에서 중학교 미술 교사를 하다가 개성에 있던 미군 문화원(USIS)에 스카우트되어 선전 선동 포스터를 그리다 한국전쟁이 터져 서울로 피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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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만화가 유용하다는 걸 느끼곤 순수미술을 접고 삽화를 그리기 시작하셨다. 물론 1974년 12월 6일부터 12일까지 공간사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 때는 수채화(水彩畵)를 비롯하여 서양화의 참모습을 보여주시는 걸 잊지는 않았다. 전쟁 이후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국내 신문연재 소설 삽화에 우경희 선생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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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작품으로 최인호의 <불새>, <별들의 고향>, 홍성유의 <비극은 없다> 등이 있다. 씨름선수 같은 덩치에 하루 두 갑의 골초셨던 우경희 선생은 의외로 성격이 깔끔했다. 일제강점기 때 징병 돼 동남아에서 1년을 고생했는데, 그때 틈날 때마다 스케치를 많이 했고, 6·25전쟁 땐 유엔사령부에서 삽화가로 일하며 스케치와 소묘를 끊임없이 했는데 그 작품정리도 꼼꼼하게 하셨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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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덩치에 비해 실같이 가는 펜으로 가는 선을 즐겨 그렸다. 1963년에 나온, 한국 최초로 신지식 선생이 중국판을 번역한 5권짜리 빨강머리앤의 삽화도 우경희 선생이 그렸다. 또 첫 여성지 여원의 표지며 내지 삽화도 그렸다. 1983년 전두환 폭정이 꼴 보기 싫다고 미국 시애틀로 이주한 우경희 선생은 그곳에서도 교민신문에 글과 그림을 기고하고 그곳 미술인 협회를 만들고 고문을 맡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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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 시절이 지나고 나자 한국을 자주 오가시다가 2000년 6월 5일 오후 4시 삼성서울병원에서 급환으로 별세했다. 건축가인 시용과 재미사업가인 시찬 두 아드님과 두 따님을 남기시고 다복하게 사시다가 방원 선생보다 18년 앞서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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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희
왼쪽이 우경희 선생, 가운데는 소설가 최인훈 선생

 

왼쪽부터 계몽사 편집인 우진주, 우경희 화백, 고정일, 이우경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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