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식분(識分) - 자기 분수를 알라! -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한국인의 인식을 바꿔야']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2. 16. 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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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dwI4WVvi1ok

백낙천 시에 '식분지족(識分知足) 외무구언(外無求焉)'이라고 '자기 분수를 알고 만족할 줄 알면 밖에서 또 뭘 구하리요'라는 구절이 있다. 물론 불교도인 동정 선생은 부처님의 심오한 가르침을 '식분(識分)' 휘호로 방원(芳園) 선생의 중년 시절 호인 방산(芳山)을 위해 남기셨다. 미천한 입장에서 그 심오한 뜻은 뒤로하고 '자기 분수를 알라'는 확실한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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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서찰 등을 일별하면서 느낀 점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한국은 '질투(嫉妬)가 지배하는 파멸(破滅)로 가는 소인배(小人輩)의 나라'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분열(分裂)과 자멸(自滅)을 막는 길은 수신(修身)일 거다. 바로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한국인의 인식을 바꿔야'만 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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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박진순 선생,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 스탄케비치 선생 등이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 혁명을 성공한 민족적 역량이 풍부했음에도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등 사회주의 정강도 수립하지 못한 채 패권 쟁취에만 급급한 자질이 부족한 사회주의 결사체가 속속 등장했다. 지운 선생의 서찰 등을 통해 살펴본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사를 살펴보면 한심한 생각이 들 정도로 분열된 종파들의 이합집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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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 박진순 선생 등이 헌신적으로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던 모습에 감복했던, 레닌 시절의 코민테른은 지운 선생이 1916년 일본에서 창설했던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과 1920년 6월 조선에서 창당한 사회혁명당의 조직체계와 정강이 사회주의 정당의 전범임을 인식하고 박진순 선생을 통해 이동희 선생의 러시아 한인사회당과 결합하게 하여 1921년 상해에서 고려공산당을 창당하게 하고 코민테른의 형제당으로 동양권의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 창당을 자문하고 지도할 코민테른의 위치와 공산혁명 자금 집행 권한을 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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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돈이 결부되면 인간의 사악한 사리사욕이 발동하게 된다. 민족주의 항일 독립체인 김구의 상해임시정부조차 코민테른의 공산혁명 군자금 차지에 뛰어들고 만다. 상해 고려공산당의 창당은 조선의 젊은 지식인들에게 직업적인 사회주의 혁명가의 길이 금전적 보답이 따르는 길처럼 인식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1921년 12월에는 일본에서 김사국이 재일유학생 중심의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를 조직하고는 고려공산당을 자처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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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봄에는 김사국을 중심으로 조선에서 서울청년회를 사회주의정당의 패권 쟁취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엠엘파, 화요파, 서울파 등 파벌들의 난립으로 코민테른에서 서로 자기들이 조선공산당의 주동 세력이라고 주장할 정도로 심각한 난립을 보였다. 1925년 4월 17일 서울 아서원에서 박헌영, 김단야, 조봉암 등이 조선공산당을 창립하고 1차 초대 책임 비서로 화요파의 김재봉(金在鳳)을 선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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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4월 18일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의 패권 내지는 붕괴를 목적으로 고려공산청년회(일명 화요회당)를 결성하고 책임 비서가 되었다. 1925년 11월, 일제는 김재봉을 비롯한 조직원을 대거 구속하여 와해(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하고 말았다. 1925년 12월 강달영을 2차 책임 비서로 제2차 조선공산당을 출범시켰다. 코민테른에서는 자유시 참사까지 유발하며 패권 쟁탈을 자행한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에 해산명령을 내렸지만, 이동희 선생의 상해 고려공산당의 협력권은 유지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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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선계 동지 박진순 선생을 무한하게 아끼던 레닌이 1924년 사망하자 스탈린의 코민테른은 형제당에 대한 협력 방침에서 직접 지도 방침으로 바뀌었고 그 틈을 타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가들은 자신들이 조선의 공산당 주동 세력임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지운 김철수 선생은 종파주의자들의 책동조차 조선 독립에 대한 애국심으로 인식하여 이동휘 선생에게 조선공산당의 승인을 허락한다는 전보를 코민테른에 치도록 종용하는 실수를 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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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조선공산당은 1926년, 6.10 만세 운동에 가담하여 실패하는 바람에 조직원들이 일제에 체포되며 해산(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되고 말았다. 지운 선생은 남아있는 동지들을 추슬러서 책임 비서로서 다시 조선공산당 결성을 추진했다. 이를 제2차 후반기라 구분하기도 한다. 1926년 9월 제3차 조선공산당 책임 비서 가 되자마자 조선공산당에 대한 코민테른의 승인과 경제적 지원이 절실함을 깨닫고 코민테른으로 가서 이봉섭 선생의 주선으로 스탈린을 만나서 조선공산당을 추인받고 군자금을 수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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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코민테른의 직접 지도 위세에 눌려 1달간에 걸친 정세교육을 받았다. 그 내용은 코민테른이 파악한 조선의 사회주의 운동가를 자처하는 자들의 정보 숙지가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일본과 미국으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조선의 독립운동단체의 실체를 일본과 미국에 제보하는 사람들이 누구누구인지를 알려주었다. 그때 지운 선생은 조선의 사회주의 혁명이 요원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구라파처럼 조선공산당이 하나의 사회주의 공개정당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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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군다나 1924년 레닌 사망 이후 입지가 좁아진 박진순 선생이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뒤 스탈린 치하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있으면서 스탈린이 고려인들을 종파 분자에 미국과 일본의 첩자가 많은 혁명화 대상 민족으로 생각한다는 내용을 박진순 선생으로 부터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 혁명화의 일환으로 러시아 내 20만 고려인에 대한 강제이주 계획을 지시했다는 내용도 접했다. 또 스탈린은 반혁명분자, 테러 분자, 부패분자, 분파분자 등을 근절하고 미국과 일본의 간첩을 색출할 목적으로 정보사찰 부서를 신설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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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은 참담한 심정으로 험난한 길을 거쳐 조선에 들어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잠행을 거듭하다가 만나는 동지들이 코민테른에서 일러주었던, 돈을 받고 미국과 일본을 위해 정보를 넘겨준다는 인물들이 많아지자 곧 일경의 체포가 임박했음을 알고 1930년 어느 날 일부로 경상도 양산지서 앞 여인숙에 묵었더니 그다음 날 아침 일경들이 잡으러 와서 잡혔다. 그리곤 8년 8개월 옥살이를 하고 병보석으로 나왔다가 다시 재수감되어 해방되던 1945년 공주감옥에서 출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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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국 1당 정책을 우선에 두고, 종파를 철저히 금지하는 사회주의 정치결사체에서조차 조선의 자칭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패권을 쟁취하기 위해 종파와 분파를 서슴없이 자행하고 동지를 밀고하고 서로 시샘하고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꼭 자신만이 우두머리가 되어야 하는 스탈린 같은 자들이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결국, 사리사욕에 물든 조선의 사회주의 종파 분자들이 러시아 20만 고려인을 강제이주 시켜 3만이 넘는 고려인을 그 과정에서 아사시킨 빌미를 주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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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 본인도 해방정국에 사악한 박헌영의 패권 쟁취에 맞서느라 사회노동당을 결성하는 등 종파 분자가 되고 말았다며 자신이 용서되지 못해 스스로 사회주의 혁명가 김철수에게 사망 선고를 내리고 자연인 김철수로 살아갔다고 늘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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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한국인의 인식'이 사회주의 혁명운동에서도 유감없이 나타난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부친 방원 선생 유품으로 남겨진 지운 선생의 서찰들을 통해 조선의 자랑스러운 항일투쟁의 역사도 볼 수 있지만 치사하고 치졸한 패권 다툼의 어리석음도 적지 않게 살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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