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장미의 사는 이야기 그리고 80518

0. 韓山李氏/_091 지운서화

[堅持直操(견지직조) - 金立 선생의 삶]

忍齋 黃薔 李相遠 2020. 12. 8. 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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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 '堅持直操(견지직조)' 작품

지운(芝雲) 김철수(金綴洙, 1893~1986) 선생의 서화 휘호 중에는 '堅持直操(견지직조)'도 많이 보인다. 원래 堅持雅操(견지아조)라고 '굳게 맑은 지조를 간직하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에 "군자는 편안하게 거처하며 명을 기다리지만(居易以俟命) 소인은 험한 짓을 일삼으며 요행을 구한다(行險以行)"고 하고 '좋은 벼슬이 저절로 얽혀든다'는 호작자미(好爵自縻)가 후구로 쓰인다. 하지만 지운 선생은 우아할 아(雅) 대신 곧을 직(直)을 사용했다. 군자는 그 지조가 확고부동(確固不動)하여 항구한 덕이 있는 반면, 소인은 그 마음이 표리부동(表裏不同)하여 수시로 변덕을 부린다. 그러니 올바른 지조(志操)를 굳고 곧게(直) 유지하라는 의미에서 '堅持直操(견지직조)'를 쓰신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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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말 지운 선생 부친은 김성수 일가와 토지 소유에 대한 송사로 서울에서 허헌(許憲, 1885~1951) 변호사를 모셔다 도움을 받았다. 허헌 변호사는 사랑방에 머무르며 송사 일을 보았는데 청소년기의 지운 선생이 허헌 선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서당을 다니던 지운 선생은 허헌 선생에게 부탁하여 자신을 신학문을 배울 수 있도록 부친에게 이야기해달라고 하여 머리 깎고 보통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함경북도 명천이 고향인 허헌 선생이 머물던 지운 선생댁 사랑방은 자연스럽게 이동휘, 김립 선생을 비롯한 함경도 분들이 내왕이 빈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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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에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허헌 선생은 영어, 독일어, 일어를 공부하고 지계아문과 규장각, 법무아문에서 주사로 근무하며 1907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일본 메이지 대학교(明治大學) 법학부 법과에 입학하여 일본의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1908년 7월, 광무변호사법에 의거한 제1회 대한제국 변호사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대한제국 최초의 변호사 11호로 등록했다. 그리고는 변호사로서 첫 번째 업무를 지운 선생댁에서 보았다. 고향 선배였던 김립(金立, 1880~1922)이 이동휘 선생을 비롯한 서북학회와 신민회 분들을 모시고 지운 선생댁 사랑방을 찾아 친교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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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립 선생의 본명은 김익용(金翼容)이었는데 공부하려고 일본에 머물던 1907년 법을 공부하던 허헌 선생을 만나 조선이 군주제를 버리고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허헌 선생은 입헌(立憲)의 헌(憲)이니 글자 하나씩을 차용한 뜻으로 김익용(金翼容) 선생은 金立으로 개명을 하였다. 그리고 김립 선생은 조선에 돌아와 보성전문학교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전공하고 1910년에 졸업했다. 비록 고향 후배인 허헌 선생과 함께 입헌군주국가를 만들자는 결의는 경술국치로 무산되었지만, 이동휘 선생 등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하여 사회주의 독립국가건설에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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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 선생의 보좌역으로 러시아 한인사회당 창당에 기여했고 조직강화를 모색하고자 이동휘 선생이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에 취임하자 그 비서장으로 일을 보았고 레닌의 측근인 박진순(朴鎭淳, 1898~1938) 선생이 이동휘 선생에게 전한 ‘한인사회당이 지운 김철수 선생이 1920년 창당한 사회혁명당과 합치면 볼셰비키 혁명자금을 주겠다’는 레닌의 자금 지급 조건을 실행하기 위해 김립 선생에게 지운 선생 등 사회혁명당 인사들을 상해로 초청하라는 지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1921년 상해에서 이동휘 선생의 러시아 한인사회당과 지운 김철수 선생의 조선 사회혁명당이 연대하여 고려공산당을 창당하여 볼셰비키 형제당으로 2백만 루브르의 금괴를 수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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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립 선생과 지운 선생은 자금위원으로 볼셰비키 혁명자금으로 중국공산당과 일본공산당의 창당을 지원했고 조선과 중국의 인재들을 미국과 구라파로 유학시키는 일을 수행하다 임시정부의 경무국장 김구 선생이 김립 선생에게 공산당 자금 착복과 횡령 혐의를 씌워 김구 선생의 부하인 오면직(吳冕稙), 노종균(盧鐘均) 등을 시켜 1922년 2월 6일 지운 선생, 유진희 선생 그리고 김하구 선생과 함께 식사를 마치고 상해의 자베이구(閘北) 거리를 걸어가던 김립 선생을 총격을 가해 쓰러뜨리고 소지했던 코민테른의 자금 통장과 인감을 강탈해갔다. 김립 선생은 상해 불란서 조계 근처의 한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지운 김철수 선생은 은행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강탈당한 통장을 지급정지 시켜 김구의 자금강탈은 무위로 끝나고 말았지만 김립 선생은 원통하게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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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헌 선생은 이인(李仁, 1896~1979), 김병로(金炳魯, 1888~1964)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던 3대 민족 인권 변호사로 활동하며 1924년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조선인 변호사 회장으로 또 동아일보 사장직무대행 등으로 각종 사회활동 하였고 1926년에는 견문을 넓히고자 6개월 동안 세계 일주 여행을 하고, 1927년에는 신간회 단체 주요 간부로 활동했다. 1943년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단파방송 밀청사건에 연루되어 2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결성에 참여하고 1948년 4월 남북협상차 방북하여 이극로 선생 등과 함께 잔류하여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 대학 총장 등으로 활동하다 6.25 전쟁 중인 1951년 8월 대학 행사 참여차 청천강을 건너다 급류에 휩쓸려 익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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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절에는 민생을 위해 허헌 선생과 함께 입헌군주 국가 건설의 뜻을 세웠고 한일병탄 뒤에는 조선의 독립된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한결같은 지조를 지켰던 김립 선생은 '굳게 곧은 지조를 간직'한 堅持直操(견지직조)의 삶 그 자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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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 선생의 서화 휘호 중에는 '堅持直操(견지직조)'도 많이 보인다. 원래 堅持雅操(견지아조)라고 '굳게 맑은 지조를 간직하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에 "군자는 편안하게 거처하며 명을 기다리지만(居易以俟命) 소인은 험한 짓을 일삼으며 요행을 구한다(行險以行)"고 하고 '좋은 벼슬이 저절로 얽혀든다'는 호작자미(好爵自縻)가 후구로 쓰인다. 하지만 지운 선생은 우아할 아(雅) 대신 곧을 직(直)을 사용했다. 군자는 그 지조가 확고부동(確固不動)하여 항구한 덕이 있는 반면, 소인은 그 마음이 표리부동(表裏不同)하여 수시로 변덕을 부린다. 그러니 올바른 지조(志操)를 굳고 곧게 (直)  유지하라는 의미에서 '堅持直操(견지직조)'를 쓰신듯 하다.

허헌(許憲, 1885년 7월 22일 함경북도 명천군 ~ 1951년 8월)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법조인 출신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가이다. 1904년에 한성외국어학교를 졸업한 허헌 선생은 영어, 독일어, 일어를 공부하고 지계아문과 규장각, 법무아문에서 주사로 근무하며 1907년에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그리고 일본 메이지 대학교(明治大學) 법학부 법과에 입학하여 일본의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1908년 7월, 광무변호사법에 의거한 제1회 대한제국 변호사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대한제국 최초의 변호사 11호로 등록했다. 그리고는 변호사로서 첫 번째 업무를 지운 선생댁에서 보았다. 고향 선배였던 김립(金立, 1880~1922)이 이동휘 선생을 비롯한 서북학회와 신민회 분들을 모시고 지운 선생댁 사랑방을 찾아 친교를 나누었다. 이동휘(李東輝, 문화어: 리동휘, 1873년 6월 20일 ~ 1935년 1월 31일)는 대한제국의 군인, 정치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기 육군 장교 출신으로 한말 애국계몽운동과 의병 운동을 이끌었고 함경도, 평안도, 북간도, 연해주 한인 사회 등에서 활동하면서 기독교인으로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는 독실한 전도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아호(雅號)는 성재(誠齋)이며 대자유(大自由)라는 호(號)를 사용하기도 했다.  김립(金立, 1880년 ~ 1922년 2월 6일)은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며, 사회주의자였다. 본명은 김익용(金翼容)이다. 다른 이름은 김익용(金益庸), 가명은 양춘산(楊春山)이다. 호는 일세(一洗). 중국으로 망명, 고려공산당, 한인사회당에서 활동했다. 재러시아의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언론기관지 한인시보의 발행인과 1918년 신민회의 망명간부회의에 참여하였다. 1918년 5월 11일에는 상하이에서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의 창당에 참여하였다.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권한대행 비서실 실장 서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하였고, 1921년초에는 고려공산당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21년 한형권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의 대표자로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에서 열린 코민테른에 참석, 1921년 11월 코민테른 회의에서 블라디미르 레닌으로부터 200만 루블을 지원받고, 그 중 한형권이 받은 40만 루블을 한인사회당과 한국인 사회주의 청년들을 위한 지원금으로 운반하던 중, 상하이에서 192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경무국의 김구가 보낸 오면직(吳冕稙), 노종균(盧種均) 등의 총격을 받고 암살당했다. 

언제나 패권쟁취에 골몰한 백범 김구의 임시정부나 김사국의 서울파나 화요파나 엠엘파나 김재봉 박헌영의 일츠크파에 '지는 것'을 택했던 상해파 호남아(好男兒)들 - 앞줄 오른쪽 끝이 자금당당 중앙위원 김립 선생, 시계방향으로 레닌의 혁명동지이자 외교주역 박진순 선생, 소려공산당대표 겸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선생, 앞줄 왼쪽 현정건(*1) 선생, 뒷줄 왼쪽 고려공산당 자금당당 중앙위원 지운 김철수 선생, 뒷줄 중앙 역사학자 계봉우 선생, 뒷줄 오른쪽 이증림 선생

*1. 현정건(玄鼎健, 1887년 6월 29일~1932년 12월 30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ㆍ교육자이다. 본관은 연주. 독립운동가로서의 다른 이름(아호)은 읍민(揖民)이며, 소설가 현진건(玄鎭健)의 형으로 현진건의 반일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한제국 근대화 및 중립외교의 주역이었고 임시정부 평정관(評定官)을 지낸 고종의 최측근이자 독립운동가였던 현상건(玄尙健, 1875년-1926년)은 그의 재종형이다. 혼인을 통해 박종화(朴鍾和) 가문, 윤치호(尹致昊), 윤치영(尹致暎), 윤보선(尹潽善) 가문과도 겹사돈관계가 된다.
약력 - 조선 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24년 6월, 현정건은 독립운동을 위해 상하이로 망명해 오는 조선인 학생들의 중국 사회 적응과 그들의 상급학교 진학을 돕기 위한 김규식(金奎植)의 제안을 받아들여, 상하이에서 1917년 여운형이 세웠던 인성학교(仁成學校) 내에 개설된 조선인 학생을 위한 예비교(豫備校, 예비강습소)에서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영어 과목을 맡아 가르쳤고, 그 뒤 상하이 고등보통학교(上海高等普通學校)로 개편된 뒤에도 여운형, 김종상(金鍾商) 등과 함께 전임교사로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9월에는 상하이교민단에서는 실시한 의사원(議事員) 총선거에서 당선되기도 했다. 11월에는 상하이에서 윤자영이 조직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 상하이한인청년동맹)에 가입, 집행위원이 되었고 『횃불』, 『새길』 등의 잡지를 발간하였다.
이때 청년동맹회의 선언 문제로 의열단(義烈團)에서 시비를 걸어와 의열단측에서 윤자영을 구타하는 등 청년동맹회와 의열단과의 마찰이 있었는데, 의열단에서 먼저 자신들의 출판물 가운데 청년동맹회를 공격하는 글을 취소하고 청년동맹회에서도 성명서를 수정 발표하였고, 이때 청년동맹회 위원이던 윤자영ㆍ현정건 두 사람도 청년동맹회를 핑계로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 사사로이 쓴다는 의혹이 제기되어 일시직권정지 처분을 받기도 했으나 사실무근으로 판명되면서 이틀만에 복권되고 두 단체간의 시비도 일단락되었다고 한다.
1925년 5월 9일에는 상하이에 있던 조소앙(趙素昻)ㆍ여운형ㆍ윤자영ㆍ김상덕(金尙德)ㆍ최창식(崔昌植)ㆍ김규면(金圭冕)ㆍ손두환(孫斗煥) 등 약 30명의 조선인 동지와 함께 서문 밖 체육장에서 배일(排日) 중국인 단체의 집합에 참가하였고 이곳에서 "중국과 한국이 합동하여 일본에 맞서야 한다"는 취지의 『상하이주간(上海週刊)』5월 9일자 특별호에 실린 사설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9월 8일에는 상하이교민단의 의사원(議事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6년 10월 10일에 중국사정연구회(中國事情硏究會)를 조직하여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11월에 상하이에서 의열단 창립 9주년을 맞아 재중 조선인들에게 격문을 발표하며 성대한 기념식을 가졌다. 1927년 4월 10일 홍진(洪鎭)ㆍ홍남규(洪南杓) 두 사람의 명의로 발표된 전민족적독립당결성선언문(全民族的獨立黨結成宣言文)에 따라 11일에 삼일당에서 약 40명이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 창립총회를 열고, 한국유일당 조직을 촉성하는 것, 한국 민족의 독립적 역량을 집중하는 일에 노력하는 것, 등의 강령 및 명칭, 위원 기타를 결정하고 조직을 끝냈는데 이때의 집행위원으로 이동녕ㆍ조소앙 등과 함께 현정건이 포함되어 있었다. 11월에 다시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관내촉성회연합회(韓國獨立黨關內促成會聯合會)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을 하나로 집결시키려 애썼으나 1928년 봄에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 패륵로(貝勒路) 항경리(恒慶里)에서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조선으로 압송, 11월 9일에 신의주지방법원에서 변동화(邊東華)ㆍ황의춘(黃義春) 등과 함께 공판이 열렸다. 이때 변호를 맡은 것은 최창조(崔昌朝)ㆍ이희적(李熙迪)ㆍ탁창하(卓昌河) 등 신의주 변호사 세 명과 손홍팔(孫洪八)ㆍ현석건(玄奭健) 등 진주 변호사 두 사람이었다. 현정건은 자신은 회합에 참여한 적도 없고 관련도 없다고 완강히 부인했으나, 12월 12일에 신의주 지방법원은 치안유지법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3년을 언도하였다. 이에 불복하였으나 1929년 1월 19일에 평양으로 압송, 6월 10일에 열린 민사 제1호 법정 복심에서 원심의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2년 6월 10일에 만기출옥하였으나, 옥살이의 후유증으로 얻은 복막염으로 12월 30일 의전병원에서 향년 45세로 사망하였다.
「동아일보」 1933년 1월 1일 기사에는 1월 3일 오후 1시에 현정건의 발인이 이루어질 것이고 영결식이 가회동 177번지의 자택에서, 묘소는 동소문 밖의 미아리에 마련되었다고 적고 있다. 현정건의 부인 윤덕경(尹德卿)은 남편이 죽은 뒤 이레, 달포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가 조금 밝은 모습을 보이는 듯 싶더니, 끝내 2월 10일에 "(남편이 없이) 아무래도 살 수가 없다", "죽은 몸이라도 형님(현정건)과 한 자리에서 썩고 싶으니 (남편 옆에) 같이 묻어달라"는 요지의 유서를 시동생 현진건에게 남기고 현정건의 영전 앞에서 음독자살하였다. 남편이 죽은지 41일만의 일이었다. 다른 자식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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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증림(李增林, 1897~?, 李元, 고려공산당 중앙위원, 조공 중앙위원)은 함남 함흥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했다. 1920년 재상해(上海) 고려공산당의 대표자로서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공산주의세력과 연계를 도모했다. 1921년 5월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에 참석하여 국내부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7월 토오꾜오(東京)에서 일본경찰에 검거되었다. 1927년 12월 조선공산당 제3차 대회[春景園黨]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8년 4월 신의주경찰서에 검거되어 1929년 12월 신의주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30년 1월 조공재건설준비위원회에 참가했다. 4월 김철수(金錣洙)와 함께 검거되어 1931년 10월 경성지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해방 직전 건국동맹 함남지역 책임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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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 1920년 신년축하 기념사진, 두번째줄 중앙 국무총리 성재 이동휘 선생, 그 오른쪽 한사람 건너 안창호 선생, 또 한사람 건너 국무총리 비서장 김립 선생
지운 선생의 서화 휘호 중에는 '堅持直操(견지직조)'도 많이 보인다. 원래 堅持雅操(견지아조)라고 '굳게 맑은 지조를 간직하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에 "군자는 편안하게 거처하며 명을 기다리지만(居易以俟命) 소인은 험한 짓을 일삼으며 요행을 구한다(行險以行)"고 하고 '좋은 벼슬이 저절로 얽혀든다'는 호작자미(好爵自縻)가 후구로 쓰인다. 하지만 지운 선생은 우아할 아(雅) 대신 곧을 직(直)을 사용했다. 군자는 그 지조가 확고부동(確固不動)하여 항구한 덕이 있는 반면, 소인은 그 마음이 표리부동(表裏不同)하여 수시로 변덕을 부린다. 그러니 올바른 지조(志操)를 굳고 곧게 (直)  유지하라는 의미에서 '堅持直操(견지직조)'를 쓰신듯 하다.
지운 선생의 서화 휘호 중에는 '堅持直操(견지직조)'도 많이 보인다. 원래 堅持雅操(견지아조)라고 '굳게 맑은 지조를 간직하라'는 뜻으로 중용(中庸)에 "군자는 편안하게 거처하며 명을 기다리지만(居易以俟命) 소인은 험한 짓을 일삼으며 요행을 구한다(行險以行)"고 하고 '좋은 벼슬이 저절로 얽혀든다'는 호작자미(好爵自縻)가 후구로 쓰인다. 하지만 지운 선생은 우아할 아(雅) 대신 곧을 직(直)을 사용했다. 군자는 그 지조가 확고부동(確固不動)하여 항구한 덕이 있는 반면, 소인은 그 마음이 표리부동(表裏不同)하여 수시로 변덕을 부린다. 그러니 올바른 지조(志操)를 굳고 곧게 (直)  유지하라는 의미에서 '堅持直操(견지직조)'를 쓰신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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